〈 56화 〉 체육 수업입니다
* * *
“자세 잡아!”
오후 수업 시간의 운동장. 약한 바람이 부는 와중에, 두 사람이 훈련용으로 만든 검을 쥐고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붉은색의 곱슬머리를 가진 백작 영식이었고, 한 사람은 회색의 스트레이트 머리카락을 가진 자작 자제분이셨습니다.
“시작!”
오디세우스 선생님의 시작 신호가 울리고, 두 남성분이 동시에 중앙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처음의 거합에서 몇 번의 합이 오가고, 마침내 회색 머리 남성분의 칼끝이 붉은 머리 남성분의 어깨에 닿았습니다.
“승자, 아키스 히에로!”
“아자!”
회색 머리의 남성이 승리의 함성을 지르고, 이내 두 사람의 약혼자로 보이는 영애분들이 나와 두 사람의 땀을 닦아 주었습니다.
지금은 체육 수업시간입니다. 물론, 체육 수업이라고는 해도, 귀족들의 체육 수업이라서 축구나 피구를 하는 체육 수업은 아니지만요.
중세 배경 아카데미에 체육 수업이 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그런 식이면 애초에 중세 아카데미란 것 자체가 창작물이니까요. 그래서 일단은 ~아스토리아~의 세계관에는 체육 수업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체육 수업과는 다르게, 아스토리아 왕립학교에서는 검술, 승마, 수영, 투창 등의 전투와 많이 관련된 운동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아스토리아 기초학교에서도 비슷한 커리큘럼으로 내려온 것 같네요.
그렇다고는 해도 대부분의 수업에서는 남성분들만 검술이나 승마 대전을 하시고, 여성분들은 남성분들의 대련 후, 약혼자의 땀을 닦아주거나, 승마에서 뒤에 타는 역할 등의 보조적인 것 말고는 수업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모처럼 체육 활동에 어울리게 옷을 갈아입는다고 해도 말이죠.
“저기요, 엘렉트라 양? 아그네스 님에게 너무 붙지 말아 주실래요?”
“하지만 저는, 아그네스 님의 장난감이니까 아그네스 님의 시선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걸요? 아그네스 님, 아예 제가 아그네스 님에게서 도망칠 수 없게, 제가 아그네스 님의 앞에 앉아 있으면 아그네스 님께서 뒤에서 안아주시는 건 어떠세요?”
“그런 짓을 하게 놔둘 것 같아요! 아그네스 님! 엘렉트라 양은 두고 저희끼리 다른 곳으로 가죠!”
어쩌다……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거죠.
분명 엘렉트라 영애를 집요하게 괴롭혔는데, 엘렉트라 영애는 저를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제가 있는 곳으로 자진해서 찾아오거나, 솔선해서 제 가방을 들어주거나 하고 있습니다.
아리아나는 그런 엘렉트라 영애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거의 매일, 아니, 매시간 싸우고 있는 형국입니다. 아리아나가 저렇게 엘렉트라 영애와 사이가 나빠지면, 오히려 엘렉트라 영애의 증언에서 애꿎은 아리아나가 표적이 되어버릴지도…….
“죄송하지만, 두 사람 다 사이좋게 지내주면 안 될까요…….”
어째서 이야기를 잘 풀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계속해서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네요.
“다음!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그리고 파노스 알렉산드로스!”
“아, 잠시 나갔다 와야겠네요.”
니콜라스 왕자의 대련 시간이 왔습니다. 상대는 파노스 왕자인 것 같고요. 니콜라스 왕자의 약혼자인 저는 응원하러 가지 않을 수 없으니까, 대련이 끝났을 때 보조할 준비를 해야겠죠.
“두 사람 다 제가 없는 사이 싸우지 마세요!”
““……네.””
뭔가 불안하지만, 두 사람을 두고 니콜라스 왕자의 검술 대련을 응원하러 나왔습니다. 손수건과 상처 치유의 물약도 확실히 챙겼고요.
“자세 잡아!”
니콜라스 왕자와 파노스 왕자가 검을 들고 준비 자세를 했습니다. 아마 게임의 줄거리대로라면……니콜라스 왕자가 이기려나요?
니콜라스 왕자는 어렸을 때 한 번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파노스 왕자에게 승리를 내주지 않으니까요. 유일하게 승리를 한 번 내주는 경우는, 주인공, 엘렉트라 영애가 파노스 왕자 루트를 탈 때뿐입니다.
엘렉트라가 파노스 왕자 루트를 타면서, 파노스 왕자는 자신의 수비적인 전술을 포기하니까요. 대신 자신감이 없었던 과거를 극복하고, 적극적인 공격 전술을 통해 니콜라스 왕자와의 대련에서 승리를 종종 가져옵니다.
파노스 왕자가 과거를 극복했다는 모습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는 장면 중 하나죠.
“시작!”
오디세우스 선생님의 시작 신호가 울렸지만, 두 사람 다 자리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두 사람 모두 상대의 움직임에, 최대한 집중하는 모습이네요.
‘타닥!’
몇십 초 정도의 정적이 흐르고,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전에 먼저 움직인 쪽은 파노스 왕자였습니다.
파노스 왕자는 니콜라스 왕자보다 키가 크고 힘이 셉니다. 이건 원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니콜라스 왕자가 파노스 왕자에게 승리를 내주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대련에서 파노스 왕자의 수비적인 태도 때문입니다.
파노스 왕자가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고 막기만 한다면, 니콜라스 왕자의 처지에서는 조금 커다란 대련용 인형에 불과하니까요. 막는 사람은 때리는 사람보다 다양한 공격을 하기 힘들고, 움직임이 단순해지면 머리가 좋고 즉흥적인 움직임에 강한 니콜라스 왕자가 파노스 왕자를 압도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파노스 왕자가 먼저 공격을 시작하면,
“하앗!”
“크윽!”
니콜라스 왕자는 파노스 왕자의 묵직한 일격을 받아내기 힘들어지고, 조금 단순한 공격이더라도 니콜라스 왕자에게 파노스 왕자의 유효타가 들어가게 됩니다.
파노스 왕자가 공격하고, 니콜라스 왕자는 방어하고, 파노스 왕자가 쫓아가면, 니콜라스 왕자는 피합니다. 니콜라스 왕자의 순발력으로 위기를 한 번씩 극복하고 있지만, 결국 장기전이 되었을 때 스테미나가 더 많은 것도 파노스 왕자 쪽입니다.
“하이야앗!”
“으악!”
결국, 스무 합 정도의 대치 끝에, 파노스 왕자의 일격이 니콜라스 왕자의 검을 떨어뜨렸습니다.
“승자, 파노스 알렉산드로스!”
“와아아!”
“파노스 님~~!”
“파노스 님, 멋있어요!”
치열한 대결에 뜨거워진 관객들의 함성, 특히 파노스 왕자를 응원하는 영애분들의 함성이 운동장에 울렸습니다. 게임에서의 파노스 왕자의 존재감과 비교하면, 차이가 정말 크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네요.
아, 이렇게 멍하니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죠.
“니콜라스 왕자님, 괜찮으신가요?”
파노스 왕자를 사모하는 영애들이 파노스 왕자에게 달려갔고, 저도 서둘러 나가서 니콜라스 왕자의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추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아그네스 영애.”
“무슨 말씀이세요. 충분히 잘 싸우셨어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니콜라스 왕자의 땀을 닦아주고, 손을 펼쳐서 상처가 나진 않았는지 확인했습니다. 마찰 때문에 조금 까진 상처가 있네요.
“요즘 파노스와 대련할 때마다 쉽지 않다고 느꼈는데, 오늘 결국 져버렸습니다.”
“이기는 날이 있으면 지는 날도 있는 거죠. ”
“뭐, 그래도 마냥 지기만 한 것은 아니라 다행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니콜라스 왕자는 저와 파노스 왕자 측 영애분의 무리를 번갈아 보았습니다. 확실히, 일방적으로 진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체격과 완력의 차이가 있음에도 상당히 분투하긴 했죠.
“니콜라스 왕자, 손 펼치세요.”
“네, 아그네스 영애.”
상처 치유의 물약을 꺼내, 니콜라스 왕자의 손바닥에 발라 주었습니다. 골고루 발라주기 위해 제 손바닥으로 문질러서 발라주었습니다.
“…….”
“니콜라스 왕자?”
니콜라스 왕자가 갑자기 약을 바르고 있던 제 손을 잡았습니다.
“제대로 바르지 않으면, 상처가 덧날 수도 있다니까요.”
“그건 알지만, 그래도 잠시만 이러고 있게 해주시죠.”
학교에 들어온 이후로 부쩍 이런 스킨십이 많아졌네요. 아리아나가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 질투심을 유발하려는 걸까요.
아, 그러고 보니 파노스 왕자가 이겼다는 것은……엘렉트라 영애가 파노스 왕자 루트를 타기 시작했다고 봐도 되는 걸까요?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제가 모르는 곳에서 친분을 쌓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리아나는 니콜라스 왕자와 이어주려고 하니까, 엘렉트라 영애가 파노스 왕자를 노리면 모든 것이 손쉽게 풀릴 텐데요. 아, 슬슬 놓지 않으면 아리아나가 의심하겠네요.
3분 정도 지나고, 제가 먼저 니콜라스 왕자의 손을 놓았습니다.
“자, 여기까지만 하세요. 그 손으로는 5분 정도 아무것도 만지지 마시고요.”
“좋은 시간은, 금방 지나가는 법이네요.”
“혹시 가져온 짐이 있으면 교실까지는 제가 들어드릴게요.”
“가져온 것은 없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니콜라스 왕자의 보조는 대충 끝났고, 슬슬 자리로 돌아갈까요. 수업시간도 앞으로 10분 정도밖에 안 남았네요.
“앞으로 10분 남았는데, 혹시 추가로 대련하고 싶은 사람 있나! 혹시 원한다면 여성 간의 대결도 허용하겠다!”
모든 남성분의 대련이 끝나고, 오디세우스 선생님이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의견을 물어보셨습니다. 여성분 간의 대련이라니, 설마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제 예상과는 다르게 두 명의 여성이 손을 들었습니다. ……아리아나와……엘렉트라 영애?
“아리아나 영애와 대련하고 싶습니다!”
“엘렉트라 양과 대련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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