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택배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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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아무 일정이 없는, 평일의 어느 날 오후. 저와 마리는 현재 평민으로 분장을 하고 멜리나 자작 가문 영지에 들어와 있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어 있는가 하면, 게임의 스토리가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파노스 왕자에게 설득당한 뒤, 어찌어찌 아스토리아 기초학교에 입학하는 것까지는 마음먹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바로 주인공 캐릭터, 엘렉트라 멜리나 자작 영애의 입학입니다.
원래 게임의 스토리라면 제가 특별히 나서지 않더라도, 3년 뒤 자연스럽게 아스토리아 왕립학교에 입학할 겁니다.
하지만 파노스 왕자의 기행으로, 첫 입학 시기가 무려 3년이나 빨라졌습니다.
그렇기에 엘렉트라 영애가 기초학교까지 입학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미지수가 되었습니다.
물론 엘렉트라 영애는 3년 늦게 아스토리아 왕립학교에 입학하고도, 그때부터 게임의 캐릭터들을 전부 무지성 유혹할 수 있을 정도의 순수한 매력을 갖고 있는 아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건 주요 등장인물들의 인간관계가 아직 미숙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니콜라스 왕자와 파노스 왕자, 아그네스와 니콜라스 왕자, 아그네스와 아리아나, 파노스 왕자와 아리아나, 아그네스와 제이스, 아그네스와 에리자……. 각자 캐릭터들 간의 갈등이 있고, 그 갈등을 비집고 들어와서 유혹하는 것이 엘렉트라 영애의 역할이죠.
하지만 지금, 거의 모든 캐릭터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갈등의 중심이라고 할 수도 있는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와 갈등을 겪고 있는 인물은…….
“아그네스 영애, 다음 주에는 아그네스 영애가 왕궁으로 오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최고의 셰프에게 식사를 준비하게 하고, 원하신다면 숙박할 수 있는 방도 준비해 놓겠습니다.”
“영애님, 오늘 무도회에서는 아쉽게도 형님이 참여하지 못하셨으니, 대신 저와 첫 번째 곡을 추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그리고 이 붉은색 아네모네는 선물입니다. 잘 어울리시네요.”
“아그네스 님! 이게 뭔지 아세요? 저번에 보여드린 새로운 별장에 있는 농장에서, 자급자족한 식재료로 만든 간식이에요! 게다가 엘리스에게 전수받아서, 제가 직접 만들 수도 있게 되었어요! 장래에 프레타리아에 오시면, 매일 드실 수 있으실 거예요.”
“아그네스 누나, 재료를 사러 영지 시장에 잠시 탐색을 하려 내려가려는 데, 어울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눈에 띄지 않게 사용인은 최소한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답례로 제가 추천하는 식당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그네스 언니, 아그네스 언니! 저희 이번 주에는 드디어 1천 개 돌파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희 둘 다 아그네스 언니가 정한 시간을 지키고, 아래 직원 분들에게 공정을 맡긴 거니까요. ……그래서, 상으로 오늘도 아그네스 언니와 같이 자면 안 될까요?”
…….
…….
…….
갈등……갈등이라고 할 만한 게…….
본인의 감정을 숨기고 조용히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는 니콜라스 왕자를 제외하면, 적어도 저와의 갈등이라고 할 만한 요소는 없는 것 같네요.
그 니콜라스 왕자도 절대 겉으로는 티를 안 내고 있으니까……. 엘렉트라 영애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기가 굉장히 힘들어지겠죠.
지금도 이 상태인데, 만약 3년이나 아카데미에서 서로 친분을 쌓으면, 그때는 주인공 버프고 순수한 매력이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그 차이를 약간이라도 메울 수 있는 게 엘렉트라 자작 영애의 동시 입학인데…….
게임의 설정대로라면, 엘렉트라 영애가 기초학교부터 같이 입학하는 것은 힘들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엘렉트라 영애의 집안인 멜리나 자작 가문은, 찢어지게 가난하기 때문이죠.
그녀의 부친인 오데른 멜리나 자작은, 굉장히 불운한 캐릭터입니다.
오레른 멜리나 자작이 어렸을 때도, 멜리나 자작 가문은 허울뿐인 가난한 귀족 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남인데도 아스토리아 왕립학교의 학비를 지원받지 못했고, 안 그래도 고립되어 있는 가난한 멜리나 자작 가문은, 사교계에서 더욱더 고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갖고 있어봤자 불편하기만 한 멜리나 자작 가문의 당주라는 직책을 얻게 되었고, 어찌어찌 착하고 아름다운 남작 가문의 차녀와 결혼하는 것까지는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사기를 당해서 엄청난 빚을 지거나, 영지에 산불이 나서 큰 손해를 입거나, 아내인 카타리나 자작 부인이 병으로 쓰러지는 등……. 굉장히 불행한 일을 연달아 겪습니다.
결국 엘렉트라가 아홉 살일 때, 카타리나 자작 부인이 병으로 타계하고, 오레른 자작은 거의 미치기 직전까지 다가갑니다.
하지만 아내와 똑 닮은, 자신의 딸 엘렉트라를 보며 마음을 굳게 먹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인 엘렉트라와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집안 내적으로는 엘렉트라 영애가 온갖 가사 노동을 도맡고, 농장에서 식량도 자급자족으로 생산하며 최대한 생활비를 아낍니다. 아버지인 오레른 자작은 영주의 입장에서 영지 경영을 회복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입니다. 두 사람의 노력 끝에 결국, 엘렉트라가 열세 살이 되기 직전, 모든 빚을 갚고 영지 경영을 흑자로 돌리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엘렉트라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오레른 자작은 딸인 엘렉트라 자작 영애를 아스토리아 왕립학교에 입학시킵니다. 혼자 남은 아버지가 걱정되기도 하고, 학비가 그렇게 저렴한 것도 아니기에 입학하지 않으려고 했던 엘렉트라 영애이지만, 오레른 자작은 자신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평생의 소원이라고 말하며 엘렉트라 영애를 아스토리아 왕립학교에 입학시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바로 「~사랑과 운명, 아스토리아~」 의 줄거리입니다.
즉, 지금의 오레른 자작은 딸을 아스토리아 기초학교부터 입학시키고 싶어도, 도저히 자금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레른 자작이 엘렉트라 영애를 입학시키려고 하여도, 빚이 많이 남은 영지와 아버지에게 맡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생활비를 두고 엘렉트라 영애가 입학하려고 할 리가 없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학비와 생활비 정도만 해결되면, 어떻게든 학교에 입학시키고 싶은 오레른 자작은 엘렉트라 영애를 기초학교에 입학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저에게는 이를 해결해 줄 자금이 충분히 있습니다.
화상 치료의 물약을 판매해서 벌어들인 로열티가, 잔뜩 쌓여 있으니까요.
화상 치료의 물약뿐만이 아닌, 제이스가 개발한 ‘살 빠지는 물약’이나 ‘상처 치유의 물약’도 에리나와 에리자가 솔론 영지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물약들의 저작권은 제이스가 가지고 있으므로, 로열티 또한 제이스에게 들어가기는 하지만, 저도 중개인 입장이 되어서 약간의 수익이 들어오기는 하니까요. 제가 모든 권리를 갖고 있는 ‘화상 치료의 물약’까지는 아니지만, 이 수익도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거의 쓰지 않으니까요. 사치품과 보석을 생각 없이 사들이던 어린 시절의 저는 더는 없고, 그나마 최근에 큰돈을 사용한 적은, 제가 사용하는 여성용 기수복의 사이즈가 조금 작아져서 새로 맞춘 것 정도겠네요.
돈이 너무 많아서 제이스의 생일 일주일 전에는, ‘남동생의 날’이라는 앙겔로풀로스의 행사(자작)도 만들어서, 제이스와 함께 시내를 돌아다니며 먹고 싶은 것이나 갖고 싶은 것을 전부 사 준 적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사용해도 지금까지 전체 수익의 2할도 채 사용하지 못했지만요.
어쨌든, 계획을 실행할 자금 자체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아스토리아 기초학교의 입학원서와, 한 학기분의 수업료+반 년 치 생활비가 든 소포, 그리고 소포의 내용을 설명한 편지를 준비했습니다.
일부러 3년 치 학비를 전부 넣지 않고 반 년 치만 넣은 이유는, 혹시나 갑자기 생긴 큰돈으로 입학을 포기하고 가문의 빚을 갚는 데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편지에는 만약 엘렉트라 영애가 학교에 잘 다니는 것이 확인되면, 다음 학기의 학비와 생활비도 지원해 드리겠다는 내용을 적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들키지 않고 이 돈과 편지를 전해주느냐는 건데…….
“……그래서, 제가 이 물건과 편지를 전하고 오라는 말씀이신가요?”
“네. 혹시 어려울까요?”
멜리나 자작 가문의 저택 안으로 금화가 든 소포를 넣고, 아마 지금 집안에 있을 엘렉트라를 부른 뒤 나오기 전에 사라지면 되는 일이긴 한데…….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라, 왜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의문이 남았습니다.”
“아…….”
그렇죠……. 생각해 보니 지금의 저는 멜리나 가문하고도 엘렉트라 영애와도 전혀 친분이 없잖아요.
마리가 매번 별 말없이 다 해주다 보니까 저도 무의식적으로 핑계를 만들지 않았네요. 어떡하죠. 도저히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는데요.
마리에게 만이라도, 솔직하게 고백할까요? 제가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고, 이 세계의 주요 사건을 알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말 한다고 이런 허황된 이야기를 믿어줄지도 의문이고, 믿는다고 해도 엘렉트라 영애에 관해 설명하기까지는 한참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제가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하는 중, 마리가 소포와 편지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말하기 힘든 이야기라면, 지금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마리는 소포와 편지를 멜리나 가문 저택의 마당으로 던져 넣고,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멜리나 자작님! 편지와 소포가 왔습니다!”
“네, 잠시만요~.”
안에 엘렉트라 영애의 목소리(추정)가 들리고, 마리는 저택의 문이 열리기 전 빠르게 몸을 숨겼습니다.
“이것으로 되었습니까, 아그네스 님.”
“아, 네! 고마워요, 마리!”
……언젠가 마리에게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야겠네요. 그게 오늘은 아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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