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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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읽은 것이 아닐까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아스토리아 기초학교 입학원서」
좋은 소식이네요. 제 시력이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요.
“이 입학원서는 무엇인가요? 아스토리아 기초학교? 그런 시설이 있었나요?”
적어도 저는 전생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네요.
“지금까지는 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해 비밀로 하였습니다만, 얼마 전 겨우 확정되었습니다. 내년 3월부터, 아스토리아 기초학교를 개교합니다.”
“……뭐라고요?”
잠깐, 이게 대체 무슨 이벤트죠? 원작에서는 이런 기초학교는커녕, 비슷한 이벤트라고 할 만한 것도 전혀 없는데요?!
“농담하시는 건가요?”
“하늘에 맹세하고 아스토리아 왕국에 맹세하고 아그네스 님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맹세하는데, 한 치의 거짓이 아닌 진실입니다.”
혼란스럽네요. 어째서 파노스 왕자는 하나같이 제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만 골라서 하는 거죠?
“아까까지의 말씀대로라면, 이 입학원서를 작성하게 되면…….”
“아그네스 영애님이라면 올해 열한 살 생일이 지나실 테니까, 바로 내년 봄부터 입학하시게 됩니다.”
어질어질하네요. 아직 아스토리아에 입학하기 전까지 최소 3년 정도의 여유는 있다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정이 앞당겨지다니요. 물론, 실제 아스토리아 왕립학교와는 다른 시설이니까 줄거리 전개에 이상을 끼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이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1회 이용권」과 입학원서를 같이 주시는 이유는…….”
“아그네스 영애님께서는, 내년 3월에 개교할 기초학교의 첫 신입생으로 입학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제가 아그네스 님에게 드리고 싶은 부탁입니다.”
설마……설마 제게 하실 부탁을 이런 곳에 쓰려고 했었다니……. 대체 언제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죠? 일 년 전,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부터인가요? 아니면 프레타리아에서 제게 내기를 했던 시점인가요? ……그보다 더 이전은 아니겠죠?
“자, 잠깐만요. 제가 입학한다고 한들 기초학교는 첫 세대인데, 사교계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것 같은데요?”
“이미 국내의 상위 귀족 자제분 100여 명의 입학원서를 받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입학할 예정이고요. 현재 명망이 자자한 아그네스 영애님이 입학하신다면, 신입생의 수는 더더욱 늘어나겠죠.”
“그……교육하시는 분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어설픈 강사진으로는 기초교육의 역할을 하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전 재상이셨던 케빈 가니스 후작님, 알렉산드로스 왕국 역대 최고의 학자인 크리스토스 코스타스 백작님, 프레타리아 원어민 강사인 에벨리나 올가 님, 은퇴하신 왕실 제7 기사단의 부단장이신 오디세우스 베오트람 님, 레오니다스 전 추기경님 등께서 최고의 교육을 해주실 겁니다. 그밖에도 여러 저명한 학자분이나 국무를 담당하셨던 분들도 참여해주신다고 확답을 받았습니다.”
“……장소는요? 너무 외진 곳에 있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아스토리아 왕립학교에서 3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학교와 기숙사도 최대 1000여 명의 수용인원을 산정했습니다. 개교 몇 개월 전에는 아스토리아 왕립학교와 왕복을 할 수 있는 통로도 만들 겁니다.”
……빈틈이 전혀 없잖아요.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준비된 것을 보니 설마…….
“최근 1년간 연락이 안 되었던 게…….”
“여러 국내외 중요 사교계 활동에 참여하고, 여러 주요 귀족 여러분의 자제들과 1대1로 만나 입학 설득을 하고, 은퇴하시고 일선에서 물러나신 학자분들에게 몇 번이고 방문해서 교수진으로 초빙하고, 아스토리아 왕립학교 주변 부지와 건물을 사서 리모델링과 재건축을 했습니다.”
엄청난 행동력이시네요. 고작 10살인 파노스 왕자가 이렇게까지 움직일 수 있다고요? 심지어 니콜라스 왕자도 아니고 서자인 파노스 왕자는 사용할 수 있는 권한도 훨씬 적을 텐데……. 무엇이 파노스 왕자를 이렇게까지 움직이게 만든 거죠?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왜 제게 이런 부탁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학교를 지으려고 노력하신 거예요?”
“……현재 입장에서의 저는, 영애님을 정당하게 만날 수 있는 구실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우연히 사교계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고, 그것으로는 한참 부족합니다.
영애님과 저는 약혼자도, 가족도, 사업 동료도 아니므로, 어떻게든 정당한 구실로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
“물론,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라는 공작 영애의 3년이라는 시간을 사는 것은, 이런 작은 종이 한 장으로는 너무나도 부족하다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그네스 영애님이라면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분이시기에, 승낙해주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약 제가 ‘상식적인 선에 한함’을 언급하며 이 부탁을 거절한다고 해도, 파노스 왕자는 별다른 말 없이 받아들이시겠죠. 하지만 파노스 왕자가 어떤 심정으로 이 기초학교를 지으려고 했던 건지를 생각해 보면, 쉽사리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파노스 왕자……아리아나에 대해 그렇게까지 진심이었군요.
확실히 제가 입학하면, 제 약혼자인 니콜라스 왕자도 입학할 테고, 니콜라스 왕자와 썸을 타는 상대이면서, 동시에 제 친구인 아리아나도 당연히 입학하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파노스 왕자는 학교의 동급생이라는 신분으로, 아리아나와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원래 게임의 줄거리와는 다르게 지금 세계에서 파노스 왕자는, 아리아나의 약혼자도 무엇도 아니니까요.
여기서 제가 부탁을 받아들이고 입학을 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세 사람의 삼각관계에 혼란만 초래합니다. 가만히 두기만 하면 지금은 좀 싸우기는 하지만, 결국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니콜라스와 아리아나는 알아서 잘 이어질 테고. 파노스 왕자만 조심스럽게 줄거리에서 분리하는 게 가능하겠죠.
하지만 파노스 왕자는……1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리아나와 연락하거나 만나는 것도 참고,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해왔습니다. 그 목적이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정당하게 만날 수 있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라니……감동적인 것을 떠나서, 그것을 제가 한 마디로 끊어서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 해도 되는 일일까요.
보답 받지 못한 노력만큼 슬픈 것은 없으니까요. 고3 수능을 앞두고 사고로 죽어버린 전생의 저와 마찬가지로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아그네스 1회 이용권을 받고, 기초학교에 입학하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아그네스 영애님!”
파노스 왕자를 아리아나와 이어줄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노력의 결실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제가 이야기를 바꾸어버려서 파노스 왕자를 이렇게까지 고생시켰다는 자각도 좀 있고요. 제가 중간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파노스 왕자는 원래 자신의 약혼자인 아리아나와 만날 구실이 실컷 생겼을 테니까요.
그런 이유로 파노스 왕자에게 아그네스 1회 이용권을 돌려받고, 아스토리아 기초학교의 입학원서를 작성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입학원서를 작성하던 도중, 갑자기 의문이 들었습니다.
“파노스 왕자, 분명 제가 드린 이용권에는 ‘상식적인 선에 한함’이라는 문구를 적었었죠?”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희 가문의 교육 커리큘럼을 바꾸시는 것은 ‘상식적인 선’을 지키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만약 제가 이것을 언급하며 부탁을 거절했었다면, ‘아그네스 1회 이용권’은 다시 갖고 계실 생각이셨나요?”
“만약 그렇게 결정하셨다면……그때는 다른 부탁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다른 부탁이라……. 제 3년을 사는 것에 견줄 정도의 가치가 있는 부탁인가요?
“조금 궁금한데, 입학하기로 해 준 대가로 물어봐도 될까요?”
“……아그네스 영애님을 처음 만난 이 장소에서, 형편없었던 제 사교댄스 실력을 보여드릴 수 없어서 차마 권유하지 못한, 달빛 아래에서 두 사람만의 무도회를 다시 한번 신청하려고 했습니다.”
“……그랬었군요.”
파노스 왕자는 지금은 아리아나를 좋아하지만, 첫사랑 상대는 아마 저였을 테니까요. 아마 오늘 춤을 출 기회가 생겼다면, 진정한 의미로 저에 대한 과거의 후회를 버릴 수 있으셨겠죠.
“……이번 한 번만이에요.”
“네?”
입학원서의 작성을 완료한 저는, 파노스 왕자에게 오른손을 살짝 내밀었습니다.
“춤, 권유하지 않으실 거에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부디 달빛 아래에서, 저와 단둘만의 무도회에 참석해 주세요.”
“한 곡 정도라면, 어울려 드릴게요.”
그렇게 저와 파노스 왕자는 서로의 손을 잡고, 반주도 관객도 없는 무대에서, 언제 끝날지 정하지도 않은 채,
세상에서 가장 긴, 한 곡의 춤을 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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