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파노스 왕자를 만났습니다
* * *
“정말 여기가 맞아요? 프레타리아의 중앙 귀족들의 저택이 있는 거리로 보이는데요.”
“저희 세이타리디스 가문은 알렉산드로스 왕국 말고도 다른 여러 나라에 귀족 지위가 있으니까요. 물론 가장 높은 지위는 본가인 알렉산드로스 왕국의 후작이에요. 참고로 프레타리아에서는 세이타리디스 백작이에요.”
이중 국적과 비슷한 걸까요. 프레타리아 사람의 시점에서 아리아나는 검은색, 아니 하늘색 머리 외국인이겠네요.
아리아나를 따라 들어간 세이타리디스 저택의 안은, 별장인데도 생각보다 깨끗했습니다. 아마 상시관리하는 사용인이 따로 있는 거겠죠.
“아리아나 님, 식사 준비를 할까요.”
아리아나의 사용인이 마리에게 물었습니다.
“집에서 식사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아그네스 님, 혹시 외식은 어떠세요?”
“외식이라면, 별장 안이 아닌 밖에서 먹는 식사인가요?”
“네. 프레타리아에는 밖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이 많거든요. 물론 아그네스 님도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시겠지만, 모처럼 프레타리아에 오셨으니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어서요.”
자주 올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아리아나가 추천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30분 후, 저와 아리아나, 마리와 아리아나의 경호원까지 네 명이 옷을 갈아입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평소처럼 화려한 드레스와 구두가 아닌, 평민처럼 보이기 위해 장식이 별로 없는 소박한 옷을 입고 단화를 신었습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써서 얼굴을 가리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고요.
아리아나의 시종은 마리와는 다르게 경호 능력이 없어서, 다른 남성 사용인이 변장하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넷이 다니면, 마치 젊은 부부와 두 딸처럼 보이겠네요.
“두근거리네요, 아리아나. 아, 말투도 바꾸는 게 좋을까?”
아리아나가 안내하려고 하는 식당은 귀족이 아닌 평민들도 많이 방문한다고 하니까요. 기왕 평민으로 변장했으니 말투같이 겉으로 보이는 것은 전부 조심하는 편이 좋겠죠.
“그, 그렇지. 아, 아, 아그네스……님…….”
아리아나는 저보다 평민으로 변장한 경험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제가 지위가 더 높다 보니 말을 놓는 것에 대해서는 망설이는 것 같네요.
“아리아나, 알렉산드로스 왕국에서는 물론 내 지위가 더 높지만, 이곳에서 나는 평민이고, 오히려 아리아나만 백작 아니야? 계속 그렇게 존댓말을 하면, 나도 아리아나 님이라고 부를 거야.”
“아, 아니. 그러지 말아……줘……아그네스…….”
훨씬 편한 사이가 된 것 같네요. 오랜만에 전생에서 친구와 말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럼 가자, 아리아나!”
그렇게 말한 저는 아리아나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 응……그래, 아그네스…….”
“아리아나가 추천하는 곳은 어디야?”
“여러 곳이 있는데 점심 식사하기에 괜찮은 곳은, 조금 특별한 샌드위치를 파는 가게가 있으니까, 거기로 갈 생각인데……어때?”
“좋아, 아리아나가 가자는 곳으로 갈게!”
그렇게 아리아나의 손에 이끌려 들어온 가게에서 나온 음식은, 거의 햄버거와 흡사하게 생긴 음식이었습니다. 참깨빵 위에 쇠고기 패티, 특별한 소스에 양상추, 치즈, 피클, 적양파까지 구성이 완전 햄버거네요.
“아그네스, 이건 팜포우커라는 건데, 이렇게 두 손으로 빵 부분을 잡고 한 입씩 베어서 먹으면 돼. 조금 예의에 어긋나 보일 수도 있지만…….”
아리아나의 말을 듣고, 햄버거를 들어 크게 한 입 베어 물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가 아니라 프레타리아에 가면 프레타리아의 법을 따라야죠.
이건……상당히 맛있네요. 쇠고기 패티에는 육즙이 살아 있으면서도, 빵을 적셔서 망치지는 않을 정도이고, 적양파의 단맛과 소스의 감칠맛도 적절히 배합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치즈의 휘감기는 식감까지……굉장히 잘 만들어진 수제버거를 먹는 느낌이네요.
“아그네스, 칠칠하지 못하게 입 주변에 묻었잖아요.”
마리가 자연스럽게 제 엄마를 연기하며 제 입 주변에 묻은 소스를 손수건으로 닦았습니다.
“네. 고마워요, 엄마!”
“…….”
마리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맞춰서 딸을 연기했는데, 마리가 어째선지 가만히 멈춰 버렸습니다.
“아……엄마? 가, 아니라, 마리……?”
“……!!”
잠시 굳어 있었던 마리는 제가 이름을 부르자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반응했습니다.
“……아그네스, 엄마라고 부르는 건 하지 마세요.”
원래대로 돌아온 마리가 정색하고 제 연기를 지적하네요. ……그렇게 제 연기가 별로였나요?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할 정도라니……물론 마리가 실제 어머니는 아니지만요.
“고마워, 아리아나. 굉장히 맛있는 식사였네.”
“아그네스의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햄버거로 점심을 마치고 아리아나와 사용인들과 함께 여전히 평민 자매를 연기하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햄버거까지야 그렇다 했는데 설마 사이드 메뉴로 감자튀김까지 나올 줄은…….
“찾았다, 아그네스.”
아리아나와 이야기를 하며 걷는 도중,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돌아보니 그곳에 서 있던 사람은 놀랍게도,
“파노스 왕…….”
“쉿. 난 지금 그저 평민 아이 파노스일 뿐이니까.”
제가 파노스 왕자라고 말하기 직전, 파노스 왕자가 두 번째 손가락으로 서둘러 제 입을 막았습니다. 파노스 왕자도 평소의 화려한 의복이 아닌, 멜빵바지를 입고 빵모자를 써서 완벽하게 평민으로 분장하고 있네요.
“……파노스? 왜 여기 있어?”
“우연이야, 우연. 프레타리아의 새해맞이에 참석하려고 왔을 뿐이야.”
“굳이 프레타리아에? 너라면 알렉산드로스 왕국에서 참가해야 하는 거 아냐?”
“알렉산드로스 왕국의 새해맞이 행사는 형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내가 프레타리아의 새해맞이 대명절 참석하는 게 외교적으로도 이점이 많고.”
아리아나도 파노스 왕자를 알아보았네요. 그런데 분명 저와 아리아나가 귀족인 것을 숨기려고 했던 말투가, 어느새 아리아나와 파노스 왕자 간의 야자타임으로…….
“뭐, 우연히 아리아나 네 탄생일이 내일이라는 걸 얼마 전에 알게 되긴 했지. 아그네스가 기꺼이 네 탄생일을 축하하러 프레타리아까지 올 확률은 반반이었지만.”
“내 탄생일을 네가 어떻게 알았는데.”
“그냥. 사교계 활동에 많이 참여하다 보니 프레타리아 쪽 지인도 많이 생겼다, 그 정도만 말해줄게.”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파노스 왕자가 여기 있는 것은 아마 아리아나의 탄생일과 연관이 있는 것 같네요. 굳이 아리아나의 탄생일에 맞춰서 외국인 프레타리아까지 방문했다는 것은 다른 뜻이 있지 않을까요?
혹시, 파노스 왕자도 아리아나에게 마음을……?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맞아떨어지네요!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굳이 멀리 떨어진 프레타리아까지 찾아오겠어요! 원작 게임에서처럼 결국 파노스 왕자는 아리아나에게 집착하게 된 거예요!
앗, 하지만 아리아나는 이미 니콜라스 왕자랑 썸을 타고 있는데……설마 하던 삼각관계라니……게다가 그 상대가 알렉산드로스 왕국의 제1 왕자와 제2 왕자……그야말로 경국지색…….
처음에는 파노스 왕자가 제가 있는 곳까지 쫓아온 줄 알고, 부끄러운 착각을 해버렸네요.
“아그네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이 근처라도 산책하지 않을래? 프레타리아는 몇 번 방문해 봐서 산책하기 좋은 곳을 몇 군데 알고 있거든.”
파노스 왕자가 갑자기 같이 다니자는 제안을 하네요. 파노스 왕자는 아리아나와의 친분이 적으니까, 친분이 있는 저를 핑계로 아리아나와 같이 다니려는 목적이겠죠.
“아그네스는 나와 같이 지내려고 온 거거든! 아그네스, 프레타리아에 관해서는 내가 파노스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빨리 가자!”
아리아나는 아리아나대로 니콜라스 왕자와 썸을 타고 있으니, 파노스 왕자가 부담스럽게 붙는 것이 싫겠죠. 그래서 친구인 저를 사용해서 거절하는 것일 테고…….
“아리아나, 양보 좀 하지? 난 한 달 만에 겨우 만날 기회가 생긴 건데, 매주 아그네스를 만나고 있는 네가 욕심부리기야?”
“아그네스는 내 탄생일을 축하해주려고 온 거잖아! 일 년에 한 번뿐인 날인데 네가 양보해!”
“자, 잠깐 두 사람……팔이…….”
아리아나와 파노스 왕자가 제 팔을 잡고 양쪽으로 끌어당겼습니다. 힘이 더 강한 파노스 왕자 쪽으로 몸이 거의 끌려가는 도중,
‘탁. 탁.’
마리가 제 양팔을 잡고 있던 아리아나와 파노스 왕자의 손목을 때렸습니다.
“우왓!”
“아얏!”
힘을 주고 있던 여파로 파노스 왕자와 아리아나가 뒤로 넘어지고, 힘이 빠진 저도 넘어지다가 마리의 품속에 안겼습니다.
“지금 두 사람 다 뭘 하는 거죠?”
마리가 조금 화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아리아나가 아그네스를 독차지하려…….”
“파노스가 멋대로 고집을…….”
“지금 이 자리에는 두 사람의 의사밖에 없습니까? 아그네스의 의견은 들어보기나 했어요?”
“그, 그건…….”
“아니요…….”
“먼 타지까지 와서 아그네스에게 스트레스를 받게 하실 생각입니까? 두 사람이 계속 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후작 영애와 제2 왕자를 상대로 마리도 정말 단호하네요. 제 사용인이지만 이럴 때는 상당히 의지가 되네요.
“내일 있을 새해맞이 축제에서 아그네스를그 모습으로 치장하겠어요.”
마리가 그 모습을 말하자마자, 두 사람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그 모습이 대체 뭐죠?
“몇십 마일 떨어진 프레타리아에까지 아그네스가 유명 인사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절레절레절레절레’
‘도리도리도리도리’
두 사람 다 고개를 세차게 저었습니다. 뭔진 모르겠지만 마리는 두 사람이 싫어할 만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네요.
“그렇다면 두 사람 다 앞으로의 행동은 아그네스의 의견을 따라주겠어요?”
‘끄덕끄덕끄덕’
‘끄덕끄덕끄덕’
경위는 잘 모르겠지만 어째선지 갑자기 선택권이 저에게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아그네스, 어떻게 하겠어요?”
……마음 같아서는 파노스 왕자와 따로 말하면서 아리아나를 노리는 것은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아리아나가 외로워질 거고……그렇다고 아리아나를 선택하면 파노스 왕자의 집착이 더 강해질 수도 있고……선택하기가 힘드네요.
“세 사람이 다 같이 둘러본다……는 안 될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