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마리가 없습니다
* * *
“정말로 제가 없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첫 번째 요일의 오후, 앙겔로풀로스의 저택 앞에서 마리가 제게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물론 마리가 없으면 조금 불편하겠지만,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할 정도의 어린아이는 아니니까요.”
“혼자서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마리가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에리나와 에리자를 솔론 가문으로 데려다주고 와야 하기 때문이죠.
그저께 저녁, 에리나와 에리자를 갑작스럽게 데려왔기 때문에 일찍 퇴근한 솔론 가문의 운전사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이 마리가 운전하는 저희 마차를 타고 왔고, 돌아갈 수단이 없는 에리자와 에리나를 오늘 마리가 다시 데려다주는 것입니다.
마차 운전사는 마리를 제외하고도 몇 명이 더 있지만, 에리나와 에리자의 비밀을 아는 마차 운전사는 마리뿐이니까요. 만약을 위해서라도 마리가 다녀오는 편이 좋겠죠.
“다녀오겠습니다, 아그네스 누나.”
참고로 마리와 함께 제이스도 다녀옵니다. 원래는 마중을 겸해서 공방이 설계도대로 지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제가 같이 다녀오려고 했지만…….
“솔론 남작 가문에 다녀오신다는 말입니까.”
“네, 맞아요. 에리나와 에리자의 마중과 공방이 설계도대로 지어져 있는지 확인하려고요.”
“그 말은……에리나 양과 에리자 양과 함께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되겠죠.”
“같은 마차를 타고 말입니까.”
“그렇게 되겠죠.”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제이스가요? 제이스는 솔론 가문에 방문한 적이 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공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제가 직접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연구나 다른 일정은 괜찮겠어요?”
“하루 정도 쉰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제도 별로……아, 아니에요. 그렇네요. 제이스가 다녀오는 편이 좋겠네요.”
“……아그네스 누나?”
“죄송해요.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느긋하게 와도 괜찮다고 마리에게 말해 둘게요.”
“어떤 상상을 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아그네스 누나의 추측은 아닐 겁니다.”
에리자와 에리나와 한시라도 더 오래 있고 싶은 제이스가 저 대신 다녀오겠다고 먼저 말을 꺼낸 것입니다.
제이스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려고 할 줄은 몰랐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몇 개월 동안 물약 연구에만 집중해서 반년 만에 화상 치료의 물약을 개발할 정도로 완전히 연구에 빠져 살았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어제도 제이스의 연구실을 빌려서 에리나와 에리자에게 화상 치료의 물약 기술을 전수했는데, 제이스는 저희 쪽을 흘긋흘긋 보느라 통 연구에 집중하지 못했었죠. 급기야 나중에는 자기 연구도 내버려 두고 저와 두 사람 사이에서 저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화상 치료의 물약 기술을 가르쳐주었고요.
역시 사랑의 힘이란 대단하네요.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는 제이스가 먼저 움직이게 하다니요.
어쨌든, 제이스가 두 사람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데 제가 방해하는 것은 말도 안 되죠. 제이스와 솔론 자매는 원작대로 이어지는 편이 서로에게 가장 행복한 결말이니까요.
“아그네스 언니! 다음 주에 올게요!”
“저도 다음 주 여섯 번째 요일에 뵙겠습니다.”
마차 안에서 인사를 하는 에리나와 에리자에게 인사를 하고, 마차가 시야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습니다.
참고로 다음 주에 온다는 말은 화상 치료의 물약 판매 대금 정산 때문입니다. 에리나와 에리자에게는 화상 치료의 물약을 생산했을 때 판매해야 하는 사람의 리스트를 정리해서 건네주었습니다. 몇 주 동안 제게 저돌적인 편지를 보내서 잠을 못 자게 만든 사람들의 리스트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솔론 영지에서 생산한 물약을 앙겔로풀로스로 운송하고, 제가 다시 그 물약을 여러 곳으로 보내는 것도 번거로우니까, 솔론 영지에서 생산하는 대로 즉시 판매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저도 리스트에 적힌 사람들에게 순서대로 솔론 가문에서 생산하여 보내드릴 테니, 대금을 그쪽으로 보내주시라는 답장을 적었고요.
판매 수익은 우선 예약 물량을 소모할 때까지는 매출의 70%를 솔론 가문 측에서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제작 원가율은 약 10% 정도니 솔론 가문 측에서 약 2배 정도를 더 가져간다고 볼 수 있겠네요.
실제로 기술의 적정 기술특허사용료는 약 25%라고 하니까요. 그리고 솔론 가문 영지에는 희토류가 자체 생산이 되니까 원가율을 더 줄일 수 있겠죠. 예약 판매 분량이 다 끝나면 세이타리디스 상회와 다시 계약 배분을 해야겠지만, 일단 지금은 이렇게 진행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솔론 자매와 제이스를 보내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저택으로 들어가려던 도중 마차 한 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솔론 영지와는 반대 방향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으니까……왕도 쪽이겠네요.
오솔길 너머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마차는, 아주 눈에 익어 있는 마차였습니다. 그야 적어도 매주 세 번씩은 보고 있으니까요.
“아그네스 영애, 문 앞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제가 오는 걸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화려하게 생긴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니콜라스 왕자였습니다.
“설마 제가 방문하는 것을 일찌감치 마중을 나와 주시다니, 조금 감동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문 앞에서 만난 니콜라스 왕자를 제가 응접실로 데리고 와버렸습니다.
“산책하다가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그런 것으로 알겠습니다.”
완전히 잊고 있었네요. 오늘은 첫 번째 요일이라서 니콜라스 왕자가 방문하는 날이었죠.
“마리, 차와 다과를…….”
……아.
그러고 보니 마리는 방금 솔론 영지로 심부름을 보냈잖아요. 여기 있을 리가 없죠. 솔론 저택과 앙겔로풀로스 저택은 왕복하는 데 적어도 3시간은 걸리니까요.
잠깐 그 말은 즉…….
“아그네스 영애, 평소 동석하던 사용인이 없는 것 같은데요.”
이 응접실 안에, 니콜라스 왕자 측 사람밖에 없다는 거잖아요!
‘혼자서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설마 그 말이 이 상황을 의미하는 거였느냐고요!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해 달라고요! 저도 오늘 니콜라스 왕자가 방문하는 날이란 걸 알았으면 당연히 안 보냈죠!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역시 괜찮지 않아요! 좀 더 걱정해줘요, 마리!
“아그네스 영애,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괜찮으십니까?”
마리가 아니라 되려 니콜라스 왕자에게 걱정을 시켰습니다. 물론 이것도 연기고, 속으로는 제가 약해진 순간 드러낸 약점을 호시탐탐 노리고 계시겠죠. 그 날 마차 안에서 했던 것이 연기였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니콜라스 왕자의 모든 행동은 전부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마, 마리는 자, 잠깐 시, 심부름을 보냈어요. 죄, 죄송합니다. 다른 시, 시종을 부, 부, 불러올 테니…….”
일단 지금 이 상태는 위험해요. 아무나 좋으니까 일단 시종을 데려와야 해요. 그나마 믿을만한 사람으로는 리처……, 라이언이라던가…….
“응접 준비 때문이라면 괜찮습니다. 잭, 그걸 꺼내줘.”
“알겠습니다.”
나가서 다른 사람을 불러오려던 저를 니콜라스 왕자가 불러세우고, 사용인인 잭에게 무언가를 꺼내라고 시켰습니다.
역시 저 음험한 왕자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죠! 그거가 대체 뭐죠! 대체 자기 사용인에게 뭘 가지고 다니게 시키는 거냐고요!
채찍인가요? 양초인가요? ……제발 바늘만은 아니라고 해줘요.
여긴 앙겔로풀로스의 응접실인데……. 굳이 따지자면 니콜라스 왕자가 아닌 제 홈그라운드인데 왜 제가 위험해진 상황이 된 거냐고요…….
불안에 떨고 있는 제 눈앞에서 잭이 꺼낸 물건은……찻잎과 쿠키였습니다.
“가끔은 아그네스 영애에게 왕궁의 다과를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매번 올 때마다 이미 준비가 되어 있어서 꺼낼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겼군요.”
다행히 니콜라스 왕자는 생각보다는 상식인인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제정신이라면 자기 약혼자 저택의 응접실에서 고문용 도구를 꺼낼 리가 없잖아요. 제가 비명이라도 지르는 순간 저희 가문의 사용인이 죄다 모일 텐데요.
요즘 피곤해서인지, 냉정한 판단을 잘 못 하네요.
“그럼 저는 다과용 그릇들과 따뜻한 물을 빌려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잭은 응접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잭이 나가자마자 니콜라스 왕자는 제 맞은편 자리에서 일어나고…….
“……왜 이쪽으로 오신 거죠, 니콜라스 왕자?”
제 오른쪽에 앉았습니다.
“조금 더 아그네스 영애와 가까이 있고 싶으니까요. 그 위압감 있는 여자……마리 양이 계실 때는 눈치가 보이니까요.”
제 눈치는 신경이 안 쓰이고요? 하긴 니콜라스 왕자가 아그네스의 눈치를 볼 리가 없죠. 오히려 제가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더 즐기지 않겠어요?
“그런데 아그네스 영애, 조금 피로가 쌓인 것 아닙니까?”
“쌓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지난주 다섯 번째 요일까지도 계속 답장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오늘도 니콜라스 왕자가 가고 나면 주말 동안 밀린 답장을 써야 하고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어제부로 피로의 원인이 되는 일은 해결되었으니까요.”
“아그네스 영애, 잠시 이쪽을 봐주시겠습니까.”
니콜라스 왕자의 말에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습니다. 돌리자마자 니콜라스 왕자는 갑자기 한 손으로 제 뒤통수를 잡고……저와 이마를 맞대었습니다.
어? 어어?! 어어어?!?
자, 잠깐만요! 너무 가깝다고요!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던 니콜라스 왕자의 잘생긴 얼굴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면 이성적으로 억누를 수가 없어요!
게, 게다가 숨결도 닿고 있고, 향기도 느껴지고, 무엇보다 이마를 통해 느껴지는 니콜라스 왕자의 체, 체온이……!
방심했을 때 갑자기 너무 많이 섭취한 니콜라스 왕자의 성분 때문에 정신을 잃기 직전, 니콜라스 왕자가 잡았던 제 뒤통수를 놓아 주었습니다.
“확실히 열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피곤할 때는 제대로 쉬어주셨으면 합니다.”
“……네. 걱정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하마터면 이성을 잃어버리고 게임 속 아그네스처럼 니콜라스 왕자 폴 인 러브가 되어버릴 뻔했습니다. 니콜라스 왕자를 처음 만난 지 일 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게 놀랍네요. 앞으로는 더 긴장해야겠어요.
만약 한순간이라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이성을 잃는 순간, 다음에 이성을 되찾게 되는 곳은 못으로 만든 침대 위일 테니까요.
“기다리게 해드렸습니다.”
그릇들과 뜨거운 물이 든 다기를 들고 잭이 돌아왔습니다. ……근데 니콜라스 왕자는 잭이 돌아왔는데도 자기 원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 같네요.
잭이 찻잎을 찻주전자에 넣어 우리고, 포장되어 있던 쿠키를 그릇에 옮겨 담았습니다. 찻잎이 우러나는 시간 동안 니콜라스 왕자는 쿠키를 하나 손으로 집었습니다.
“아그네스 영애, ‘아’ 하세요.”
“니콜라스 왕자, 잭이 보고 있잖아요.”
“죄송합니다,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님. 당분간은 차를 우리는 데 집중하느라 다른 것은 보지도 듣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들었죠? ‘아’ 하세요.”
“……아, 아.”
……조금 부끄럽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제 편이 없으니 얌전히 따를 수밖에요. 입을 벌리고 니콜라스 왕자가 집어 준 쿠키를 새끼 새 마냥 받아먹었습니다.
“……맛있네요.”
그보다 이 쿠키, 어디서 먹어본 듯한 맛이 나는데요.
“사실 이 쿠키, 제 사용인인 잭이 직접 만든 겁니다.”
어디서 먹어봤나 했더니 니콜라스 왕자의 탄생일 축제 때 먹었던 쿠키였네요. 그때 분명 제가 만든 쿠키는 퍼석퍼석하기만 한데다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실패작이었고, 잭의 쿠키는 완벽했으니까요.
“니콜라스 왕자의 사용인은 다재다능하네요.”
물론 그날의 일은 저와 잭 두 사람만의 비밀이니까, 오늘 처음 먹어본 척해야겠죠.
“그렇습니까. 사실 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쿠키를 잘 못 만들었습니다.”
“어머, 그런가요?”
몇 주 전 니콜라스 왕자의 탄생일 전날 먹은 쿠키는 굉장히 맛있었는데요. 대체 얼마 전이 언제인 거죠?
“네. 실은 제 탄생일 직후에 잭이 남겨놓은 쿠키를 먹었었는데, 식감이 퍼석퍼석하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쿠키였습니다. 그런데 몇 주 만에 이 정도로 발전한 겁니다.”
니콜라스 왕자의 탄생일 다음 날이라고요? 탄생일 전날에 저와 둘이서 만들었을 때는 진짜 맛있는 쿠키를 만들었는데요?
제가 만든 쿠키는 마지막까지 도저히 선물로 줄 만한 상태가 아니어서, 잭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그대로 전야제 무도회를 준비하러…….
……설마.
“니콜라스 왕자.”
“네, 아그네스 영애.”
“퍼석퍼석하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쿠키를 먹여드려서, 굉장히 죄송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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