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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영애는 왕자님을 양보하겠습니다-38화 (38/86)

〈 38화 〉 에리나 솔론, 에리자 솔론 : 잠들기 직전까지

* * *

에리자, 에리자!

무슨 일인가요, 에리나?

아그네스 언니를 처음 만난 날 기억나?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저희가 신의 실수라는 걸 단번에 알아채셨잖아요.

역시 아그네스 언니는 대단해! 뭐든지 알고 있어!

저는 절대 들키면 안 되는 사실을 들켜버렸다는 사실에, 조마조마했지만요.

아그네스 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만!

저도 처음에는 놀랐어요. 신의 실수라는 것을 알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아빠가 시종으로 나나 에리자를 아그네스 언니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었잖아. 에리자와 떨어지는 건 아쉽지만, 아그네스 언니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신의 실수인 저희를 보고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아그네스 언니시라면, 시종으로 데려가셔도 저희를 차별하지는 않으셨겠죠.

그래서 아그네스 언니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조금 불안했어.

자리를 피하기 위한 핑계를 대고 다시 오지 않으시는 것은 아닐까……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죠.

그런데 아그네스 언니는 약속대로 일주일 뒤 다시 왔어.

그래서 에리나와 헤어질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시종으로 데려가시려고 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다시 오실 이유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니까요.

나도 아그네스 언니가 나를 불렀을 때, 내가 앙겔로풀로스에 간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그네스 언니께서는 에리나를 데리고 여섯 시간 동안 무언가를 준비하셨죠.

시작하기 전에 아그네스 언니가 그러더라고. 다른 사람의 눈앞에서도 에리자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방법이 있다고. 그래서 한다고 했어!

그 방법이 에리나의 머리카락을 자주색으로 염색하는 것이었죠.

신기했어! 무언가 가루 같은 것을 아그네스 언니가 열심히 발랐거든. 조금 간지럽고 불편했지만, 에리자와 함께 있는 방법이라고 해서 참았어.

그래도 네 시간이나 가만히 기다리는 것은, 에리나에게는 힘들 수도 있었겠죠.

그래서 아그네스 언니는 내가 심심해하니까 네 시간이나 재밌는 이야기를 계속했어. 왕궁에서는 제비가 낮게 나는지로 비가 오는지 예측하는데, 그건 먹이인 벌레가 작은 물방울을 맞고 날개가 무거워져서 낮게 날기 때문이래! 그리고 운석으로 만든 검이 단단한 이유는, 운석은 철보다 훨씬 단단한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그런 거래! 또, 왕가에서 내려지는 비밀의 파란 장미를 만드는 방법은…….

알겠어요, 에리나. 그 지식 얘기는 저번에도 들었잖아요.

아그네스 언니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네 시간은 엄청나게 빨리 지나갔어. 그리고 말았던 머리를 풀고 머리를 감았더니, 아주 예쁜 자주색 머리카락이 되어 있었어!

아버님도 처음에는 못 알아볼 뻔하셨으니까요.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닮은 연두색 머리카락이 사라진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아그네스 언니와 닮은 붉은색 머리카락이 된 것 같아서 그것도 기뻤어!

저도 사실, 조금 질투하고 있었어요.

게다가 아그네스 언니가 준비했던 계획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어!

저와 에리나에게 ‘화상 치료의 물약’의 제조를 의뢰한다고 하셨죠.

‘화상 치료의 물약’은 아그네스 언니의 생일에 봤는데, 엄청 대단한 물약이야. 아그네스 언니의 손등에 있던 화상 상처가 비누 거품처럼 씻겨졌다니까!

저도 직접 봤으면 놀랐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대단한 물약을 우리가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 불안했어.

부담스러운 업무니까요. 아그네스 언니가 하신 말이니까 어떻게든 했겠지만요.

아빠도 우리가 못할 줄 알고 반대했잖아.

못할 줄 알고 반대하셨다기보단 걱정돼서 하신 말씀이겠죠.

그런데 아그네스 언니는, 내가 미래에 명석하게 자랄 거라고 말했어. 게다가 나도 몰랐던 내 능력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어!

저도 에리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몰랐어요.

그리고 에리자의 참을성 있고 남을 배려하는 착한 성격도 알고 있었어.

당연히 그렇게 교육을 받아온 것이었는데, 저는 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아그네스 언니의 그런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어.

저도 저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칭찬해주신 분은 처음이었기에, 그 순간부터 기대에 부응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나와 에리자에게 맡기려고 하는 이유가 다섯 개나 더 있었어!

그렇게나 많은 이유를 갖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먼저, 아그네스 언니는 ‘화상 치료의 물약’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여러 새로운 물약들을 우리한테 맡길 생각이래!

지속적인 교류에 있어서, 에리나의 능력은 정말로 적합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 영지에는 희토류라는 흙이 많은데, 이것들이 물약의 재료가 되니까 오히려 좋대!

단 두 번밖에 방문하지 않으셨는데도, 저희 가문의 영지의 특수성을 정확하게 알고 계실 정도로 관찰력이 좋으셨어요.

그리고 우리 아빠가 옛날부터 아그네스 언니의 아빠랑 오랫동안 만나온 사이라고도 했어!

귀족 간에서는 교류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요. 아그네스 언니의 처지에서도 사소한 소문이 오르내리는 것을 방지하시려면 저희 솔론 남작 가문이 적절한 선택 중 하나였겠죠.

또, 몰랐는데 우리 집 근처에 아그네스 언니랑 친한 사람이 또 있대!

세이타리디스 후작 가문이죠. 저도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장사 수완이 좋아서 상업으로 엄청나게 많은 부를 쌓은 귀족 가문이라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아그네스 언니의 지인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죠.

마지막으로는, 아그네스 언니가 우리 집이 망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어.

저희 가문은 식료품이 자체 생산이 되지 않으니까요. 어떻게든 다른 사업으로 아버님께서 영지를 유지하려고 하셨지만, 선대 때부터 조금씩 쌓인 빚이 한계였다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아그네스 언니께서는 솔론 남작 가문의 영지에서 생산되는 예술품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셨죠. 그리고 저와 에리나가 급하게 약혼하는 것도 막으려고 하셨어요.

아그네스 언니가 그렇게 많은 생각을 가지고 우리에게 ‘화상 치료의 물약’ 만드는 일을 맡기려고 한 줄은 몰랐어.

미래 지향적인 이유, 경제적인 이유, 정치적인 이유, 그리고 저희 집안과 저희의 미래를 위한 이유까지……신의 실수인 저희를 동정해서가 아닌 합리적인 판단으로도 손색이 없으셨어요.

그래서 그날 밤 아그네스 언니가 바로 앙겔로풀로스에 간다고 할 때, 가슴이 엄청 두근두근했어!

저도……평소보다 훨씬 들떠 있었어요.

도착해서 오랜만에 만난 제이스한테, 순간적으로 친하게 인사할 뻔했지만.

그건 할뻔한 게 아니라 한 거예요. 에리나 덕에 제이스 님이 다음날 ‘두 사람이 신의 실수인 것은 알고 있으니까, 제 앞에서는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씀했잖아요.

그건 그렇고 앙겔로풀로스에서 먹은 밥은 엄청 맛있었지!

말 돌리기에요? ……하지만 저도 앙겔로풀로스에서 한 식사는 정말 좋았어요. 섬세하고 정성이 들어간 식사였다는 것도 물론 있었지만…….

오랜만에 에리자와 함께, 게다가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어서 더 좋았어!

신의 실수인 것을 시종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본가에서도 항상 번갈아서 식사했으니까요. 아버님과 어머님은 같이 안 계셨지만, 앙겔로풀로스의 가족분들과 함께 한 식사는 정말 화목하고 따뜻한 분위기였어요.

욕실도 되게 크고 넓었잖아! 신기한 것도 많았고!

에리나와 함께 목욕한 것도, 기억할 수 있는 과거에서부터는 처음이었죠.

목욕한 이후에는 조금 졸렸지만, 아그네스 언니를 기다리느라 참았어.

에리나가 잠들어 버리기 전에 오셔서 다행이었죠.

그래서 아그네스 언니랑 같이 잤어!

아그네스 언니께서 바닥에서 주무시려고 했을 때는 깜짝 놀랐어요. 에리나도 놀라서 침대에서 같이 자자고 말을 꺼낸 거죠?

나는 그냥 아그네스 언니하고 같이 자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렇게 말하면 저도……그런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요.

그렇게 같이 자려고 아그네스 언니의 옆에 누우니까, 갑자기 궁금해졌어.

왜 아그네스 언니께서는 저희를 신의 실수인데 이상하게 보지 않으시는가에 대해서 말이죠? 저도 궁금했어요.

그런데 아그네스 언니는, 우리가 신의 실수가 아니래!

아버님도 어머님도 저희에게 그런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으셨는데, 정말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어요.

우리가 이름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잘하는 것도 다르고, 좋아하는 색도 다르고, 생각하는 법도 다르고, 알고 있는 것도 다르고……다른 게 엄청 많으니까 우리는 신의 실수가 아니라는 거야!

에리나와 저는 외모가 똑같으니까 분명 신의 실수라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는데, 아그네스 언니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으셨던 거죠.

그렇게 말한 아그네스 언니가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서, 정말로 가족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저도 밤이 아니었다면 제가 헤실거리는 표정이 다 드러나서 부끄러워졌을 거예요.

그래서 진짜 가족처럼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어.

그리고 이름으로 불러 주셨죠.

아그네스 언니가 처음으로 이름으로 불러줬을 때,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이었어!

저도 아그네스 언니께서 이름으로 불러 주셨을 때, 그대로 영원히 아그네스 언니의 품속에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순간에 확신했어.

그 순간에 확신했어요.

““저희를 진정한 사랑으로 품어주실 수 있는 분은, 아그네스 언니뿐이라는 것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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