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함께 잠들었습니다
* * *
“돌아오셨습니까, 아그네스 누나……같이 오신 분은 에리자 영애와……누구입니까.”
“에리자 양의 자매인 에리나 솔론 양이에요. 이 아이들에게 화상 치료의 물약에 대해 가르치고, 앞으로 솔론 가문의 공방에서 제작하여 판매하기로 했어요.”
“제이스, 오랜……! 만나서 반갑……아, 아니! ……처음 뵙겠어요. 에리나 솔론이에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제이스 님.”
“마리. 주방장에게 오늘 저녁 식사는 2인분 더 준비해 달라고 부탁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저희 집안 식사가 두 사람 입에 맞으면 좋겠네요.
“아그네스 누나……식사 이후에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에리나 양, 에리자 양, 식사는 입에 맞았나요?”
“정말 맛있었어요, 아그네스 언니!”
“정성과 섬세함이 느껴지는 식사였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일찍 자고 내일 아침에 물약의 제조법을 알려줄게요. 잠들기 전에 욕실에서 몸을 씻고 오도록 할까요.”
“네, 아그네스 언니!”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잠시 할 일이 있어서 다녀올 테니, 마리와 함께 가서 몸을 씻고 아까 짐을 가져다 놓은 제 침실로 와주세요. 피곤하면 먼저 자도 괜찮아요. 마리, 에리나 양과 에리자 양이 씻는 것을 도와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마리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앞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던 제이스의 방으로 향했습니다. 제이스와는 대부분 연구실에서 만나다 보니 제이스의 방으로 들어가는 건 오랜만이네요.
“제이스,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셔도 됩니다, 아그네스 누나.”
제이스의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랜만에 들어온 제이스의 방은 처음 만들었을 때와는 다르게 풍부해진 느낌이네요. 책장에는 꽤 많은 약학 관련 책이 꽂혀 있고, 책상에 놓인 노트에는 연구에 사용된 약초와 물약의 반응에 대해서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나요, 제이스?”
“아그네스 누나,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겠습니다. 에리나 영애와 에리자 영애는 혹시……신의 실수라고 불리는 존재입니까?”
역시 예리하네요. 제이스라면 눈치챌 것 같았지만, 첫 만남인데도 눈치챈 것은 감이 좋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네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뭔가요?”
“우선, 에리자 영애가 이전과는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물론 1개월의 시간이 지났으니 성격이나 예의가 달라졌다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반대로 ‘에리나 양의 성격이 이전에 만난 에리자 영애와의 성격과 매우 비슷하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그렇습니다. 그리고 추측입니다만, 그 붉은 계열의 머리카락은 혹시 누나가 얼마 전 만든 헤나 염료로 염색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시도해 본 적은 없지만, 양모의 염색에도 사용되는 염료이니 머리카락의 염색에도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저번에 제 탄생일에 방문한 아이는 사실 에리자 양이 아닌 에리나 양이었어요. 그리고 오늘 만난 얌전한 쪽의 아이가 진짜 에리자 양이에요. 이전에 만든 헤나 염료로 염색한 머리인 것도 맞고요.”
“역시 그렇습니까…….”
제이스의 반응이 별로 좋지 못한 것 같습니다. 원작에서의 제이스는 신의 실수라고 두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요.
“제이스, 혹시 에리나 양과 에리자 양이 신의 실수인 것 때문에 마음에 걸리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 저는 신의 실수는 잘못된 속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연의 일치로 탄생한 경험적 미신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 건가요? 혹시 에리나 양과 에리자 양이 화상 치료의 물약을 제조할 능력이 없을 것으로 생각해서인가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그네스 누나는 항상 현명한 판단을 하시고, 사람을 보는 눈도 탁월하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아그네스 누나의 믿음 덕분에 구원받았는데, 어떻게 의심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대체 왜 그렇게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거예요?”
“……무언가 설명해 드리기는 힘들지만……하…….”
제이스가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모습은 처음 보네요. 확실히 제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것 같긴 한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네요. 솔직히 말해주면 좋을 텐데요.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리나 영애와 에리자 영애와 너무 긴밀한 사이가 되는 것은 주의하셨으면 합니다.”
에리나 양과 에리자 양과 너무 긴밀해지지 말라니……무슨 말인가요? 사업 동료로 삼을 생각이었던 두 사람과 제가 긴밀해지면 제이스가 곤란한 일이 있는 걸까요?
…….
…….
……아!
“후훗, 알았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제이스가 염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할게요.”
“……아그네스 누나의 반응을 보니 오히려 더 걱정됩니다. 정말로 이해하신 게 맞으십니까.”
“당연하죠.”
어린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제이스도 확실히 남자네요.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남자라면 당연히 느끼는 감정이니까요. 저만 믿어요. 제가 최대한 도와줄게요.”
“도와주신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아그네스 누나, 역시 뭔가 잘못 이해하고 계신 것…….”
“이제 목욕해야 하니까 가볼게요. 너무 늦으면 마리도 피곤할 테니까요. 잘 자요, 제이스.”
부끄러워하는 제이스를 방에 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좀처럼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제이스가 저렇게 쑥스러워할 줄도 알았네요.
설마 벌써 자신의 미래 약혼자에게 반해서 감정을 품을 줄은 몰랐네요.
제이스의 맘에 든 사람은 에리나 양일까요, 에리자 양일까요. 어쩌면 두 사람 다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제가 두 사람 모두와 이어질 수 있도록 사이에서 앞으로 조율을 잘 해주도록 하죠.
목욕을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뒤, 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침실에서는 아직 잠들지 않은 에리나 양과 에리자 양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늦었는데 먼저 자고 있지 그랬어요.”
참고로 에리나 양과 에리자 양은 오늘 제 방에서 같이 잘 예정입니다. 손님용 숙소로 사용할 만한 방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오늘과 내일은 제 방에서 임시로 재우기로 했습니다.
조금 좁을 수도 있으니 침대를 두 사람에게 양보하고 저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도록 할 생각입니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자면 돼요. 저는 바닥에 펴놓은 이불에서 잘 테니까요.”
이쪽 세계에서 바닥에서 자는 것은 거의 처음이지만, 전생에서의 저는 학교 책상 위에서도 누워서 잘 수 있을 정도로 아무 곳에서나 잘 자니까 괜찮겠죠.
“아그네스 언니도 침대에서 같이 자요!”
바닥에 깔린 잠자리에 누우려는 순간, 에리나 양이 말했습니다.
“저도 아그네스 님이 침대에서 주무시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에리자 양까지 같은 말을 하네요.
“두 사람이 좋다고 하니, 그렇게 할까요.”
결국, 미안하지만 마리가 바닥에 깔아 준 이불은 그대로 둔 채, 두 사람이 있는 침대에 누웠습니다.
“괜찮아요? 너무 좁지는 않은가요?”
“네!”
“저도 좋아요.”
어째선지 제가 두 사람을 양쪽에 끼고 자는 모습이 되었지만, 괜찮다고 하니 상관없겠죠. 침대가 적당히 넓어서 몸집이 작은 두 사람 정도는 같이 누워도 미끄러져 떨어질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아그네스 언니. 잠들기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또 궁금한 게 있어요? 제가 아는 것이라면 대답해 드릴게요.”
역시 학구열이 뛰어난 에리나 양답네요.
“아그네스 언니는 왜 저희가 신의 실수인데도, 이상하게 보지 않으시는 거예요?”
지식에 관한 질문을 하는 줄 알았는데, 에리나 양의 입에서는 의외의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건……제가 두 사람을 신의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님과 어머님께서는, 저희가 신의 실수라고 말씀하셨는데…….”
“신의 실수라는 것은, 완전히 똑같은 두 사람이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인걸요.”
“우리가…….”
“……다른 사람이요?”
“오늘 바꾼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더라도,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에요. 이름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잘하는 것도 다르고, 좋아하는 색도 다르고, 생각하는 방법도 다르고, 알고 있는 것도 다르고,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이 다르잖아요. 그렇게나 다른 두 사람인데, 어떻게 신의 실수일 수 있겠어요.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것은, 외모 하나가 아니에요. 겉모습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의 1할도 파악했다고 말할 수 없어요. 제 생각은 그렇답니다.”
니콜라스 왕자도 겉모습은 잘생기고 미소가 아름다운 황태자이지만, 내용물은 매일 밤 반려자의 비명을 들으며 잠이 드는 사이코패스고, 파노스 왕자도 겉으로는 색기 넘치는 듬직한 남자이지만, 그 실체는 아내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의처증 집착남이니까요. ~아스토리아~의 세계에서는 절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아그네스 언니, 마지막으로 소원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돼요?”
“어떤 소원인지 말해주겠어요?”
“저를 에리나라고……진짜 언니처럼 편하게 불러 주세요.”
“알겠어요, 에리나.”
“아그네스 언니!”
에리나가 강아지처럼 제 품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저, 저도……에리자라고 불러 주시면……안 될까요, 아그네스 님?”
이번에는 에리자 양도 같은 말을 하네요.
“에리자 양은, 조건이 있어요.”
“어, 어떤 조건인가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먼저 저를 ‘아그네스 언니’라고 불러 주어야 해요.”
“아, 아그네스……언니…….”
“잘 했어요, 에리자.”
“아그네스 언니…….”
이번에는 에리자가 반대편 품속으로 고양이처럼 차분하게 숨어 들어왔습니다.
“이제 진짜로 자는 거예요. 내일은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네, 아그네스 언니.””
그렇게 그날은, 두 사람의 체온과 함께 잠이 들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