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머리카락을 염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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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을 느낍니다. 아마 생활이 정형화가 된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니콜라스 왕자의 상대를 하고, 파노스 왕자에게 답장을 쓰고, 아리아나와 휴식을 취하고, 제이스의 연구를 도와주다 보면 정말 일주일 정도의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느껴지네요.
그렇게 정신없이 일주일이 지나가고 다시 여섯 번째 요일이 되었을 때, 에리자 양과 에리나 양을 위해 준비한 물건을 가지고 솔론 남작 영지에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도 시종은 마리만 데리고요.
“아그네스 님,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오는 것을 준비하고 계셨던 빅토르 남작의 안내를 받아 저번에 방문한 응접실로 들어갔습니다. 안에서는 이미 디아나 부인과 에리나 양, 에리자 양이 기다리고 계시네요.
“아그네스 님, 어느 아이를 시종으로 들이실지 결정하셨습니까.”
빅토르 남작이 제게 물었습니다. 이미 제가 시종으로 들이는 것은 결정됐고, 어느 아이를 고를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고 생각하셨던 걸까요?
“지금 사교계에서 빅토르 님의 아이라고 알려진 쪽은, 에리자 양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교 활동은 에리자를 데리고 다녔으며, 에리나는 아그네스 님의 탄생일 때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사교계에 참가한 적이 없습니다.”
마침 좋네요. 색깔도 에리나 양으로 하는 편이 색이 더 어울리겠죠.
“에리나,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네, 아그네스 언니.”
이름을 불린 에리나가 제게 다가왔습니다. 빅토르 남작은 아마 시종으로 제가 에리나를 선택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사교계에 얼굴이 더 알려지지 않았기에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아그네스 님, 그렇다면 시종으로 에리나를 삼으시겠습니까?”
저는 그 대답에 고개를 저었습니다.
“우선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에리나 양도 에리자 양도 시종으로 삼지 않겠습니다.”
제 말에 빅토르 남작도 에리나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리를 두고 시종이 더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에리자 양이나 에리나 양을 시종으로 삼아버리면, 제이스를 포함한 세 사람의 ‘해피 엔딩’을 방해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리자 양과 에리나 양에게는 제 시종으로서가 아닌, 다른 일을 부탁드리고 싶으니까요.
“제가 준비해 온 계획이 하나 있는데, 이 계획대로라면 신의 실수라고 불리는 에리나 양과 에리자 양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를 믿어주신다면, 지금부터 여섯 시간 정도 빈방과 에리나 양을 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빅토르 남작에게 양해를 구한 뒤 저와 마리, 그리고 에리나 양은 응접실이 아닌 다른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평소 에리나 양과 에리자 양이 사용하는 침실인 듯하네요.
“아그네스 언니, 저와 에리자를 도와준다는 게 어떤 말이에요?”
“우선 시작하기 전에 물어보려고 하는데, 에리나 양은 에리자 양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죠?”
“네! 에리자랑 같이 있으면 즐거워요!”
“그렇다면, 에리자 양과 에리나 양이 다른 사람의 눈앞에서도 같이 있을 방법이 있다면, 할 생각이 있어요?”
“그런 방법이 있어요?”
“네. 조금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지만, 에리나 양이 조금만 힘내주시면 가능해요.”
에리나 양은 고민하는 기색도 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할래요!”
“좋은 생각이에요.”
에리나 양의 허락도 받았으니, ‘머리카락 염색’을 시작하도록 하죠.
에리나 양과 에리자 양이 신의 실수라는 것을 감추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머리카락 색을 염색해서 첫인상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것이죠.
머리카락 염색이라는 지식이 많이 퍼지지 않는 이 세계관에서는, 머리카락 색이 완전히 다르면 외모가 닮았다고 해도 신의 실수라는 발상을 쉽게 떠올리지 못할 테니까요.
“지금부터 에리나 양의 머리카락을 붉은 계열로 염색할게요.”
게다가 두 사람은 쌍둥이인데도 의외로 성격이나 분위기가 전혀 달라서, 다른 사람임을 구분하기가 정말 쉽습니다. 머리카락 색은 오히려 부가적인 요소에 가깝겠죠. 아마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닮았다는 것까지는 눈치채더라도, 충분히 자매나 친척이라고 생각하게 되겠죠.
우선, 염색을 시작하기 전에 마리가 에리나 양의 머리를 감겨 주었습니다. 미리 받아온 따뜻한 물로 마리가 에리나 양의 머리카락을 구석구석 정성스럽게 감겨 주네요.
“핫, 하으으…….”
에리나 양이 기분이 좋은 건지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마리가 머리를 감겨 주는 것은 정말 기분이 좋으니까요. 무릉도원에 두둥실 떠 있는 느낌입니다.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충분히 물기를 닦어 주었습니다. 이제 시작해도 괜찮겠죠. 먼저, 제이스가 만들어 준 헤나 염료 가루를 따뜻한 물과 적당량 섞어줍니다.
“에리나 양. 혹시 불편하거나 간지러우면 얼마든지 말해 주세요.”
“네, 언니.”
헤나 염료가 따뜻한 물과 섞이는 동안, 에리나 양의 머리를 뒤로 젖히고 헤어라인에 코코넛 기름을 발라주었습니다. 잘못해서 머리카락이 아닌 이마 부분까지 염색해버리는 것은 방지해야 하니까요.
“마리, 에리나 양의 머리를 양쪽으로 빗질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본격적인 염색을 시작하기 전 마리에게 에리나 양의 빗질을 부탁했습니다. 제가 직접 할 수도 있지만, 전문가인 마리에게 맡기는 편이 더 좋겠죠. 그리고 마리는 빗질도 굉장히 기분이 좋으니까요.
빗질이 끝난 뒤 염색을 시작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커다란 수건으로 에리나 양의 몸을 덮어주었습니다. 에리나 양의 머리카락은 기니까, 잘못하면 목이나 옷에 헤나 염료가 묻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하면 드디어 본격적인 준비가 끝났습니다.
가장 바깥에 있는 머리카락부터 넉넉하게, 헤나를 솔에 묻혀서 발라줍니다. 다 바른 머리카락은 꼬아서 정수리에 얹어주고, 그다음 머리카락에 헤나 염료를 발라줍니다. 다시 꼬아서 얹어주고, 바르고, 얹고, 바르고, 얹고……30분 가까이 걸쳐서 모든 머리카락에 헤나 염료를 충분히 바른 뒤 헤어라인까지 헤나를 추가로 발라 주면 드디어 완성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 따뜻하게 보온해 주면 됩니다. 이제 4시간 정도 유지하고 착색 후에 머리카락을 씻어주기만 하면 끝나겠네요.
“혹시 가렵거나 불편하지는 않나요?”
“그런 건 없는데, 조금……심심할지도…….”
확실히 주의가 산만한 에리나 양을 4시간이나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은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재밌는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네!”
지금이야말로 매주 3번씩 방문하는 니콜라스 왕자의 온갖 잡지식 이야기를 활용할 때가 온 것 같네요.
“에리자 양은 다이아몬드가 뭔지 아시나요?”
“네! 예쁘고 엄청나게 예쁘고 세상에서 제일 단단한 보석이요!”
“잘 알고 있네요. 그럼,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를 어떻게 가공하는지 아시나요?”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왕궁에서 다이아몬드를 가공할 때는…….”
…….
…….
…….
“……그래서 왕궁 메이드들은 긴 치마를 입는 것이랍니다.”
“와아……아그네스 언니는 진짜 아는 게 많네요…….”
“저도 여기저기서 들은 여러 가지 잡학일 뿐이니까요.”
“아그네스 님, 네 시간이 지났습니다.”
벌써요? 똘망똘망한 눈으로 제 얘기를 경청하는 에리나 양에게 홀려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했네요.
“에리나 양, 이제 머리를 씻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러 가죠.”
“네!”
머리카락 염색이 끝난 에리나 양을 데리고 다시 응접실로 향했습니다. 응접실의 안에서는 빅토르 님과 디아나 부인, 그리고 에리자 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에리나 양을 데려왔습니다.”
에리나 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안에 계시던 빅토르 님과 디아나 부인이 놀라셨습니다. 에리나 양이 기존의 연두색 머리카락이 아닌, 헤나 염료로 염색한 자주색 머리카락이 되었기 때문이죠.
“아그네스 님, 이 아이가 정말로 에리나입니까?”
빅토르 남작의 이 반응도 충분히 예상했습니다. 이 세계관에서는 옷이나 직물 등을 염색하는 것은 흔하지만, 머리카락을 염색한다는 개념은 흔하지 않으니까요. 머리카락을 다른 색으로 바꾸고 나니 에리자 양과는 확연히 첫인상이 달라졌습니다.
“헤나를 사용해서 머리카락을 염색했습니다. 에리자 양, 잠시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에리자 양을 에리나 양의 옆에 나란히 서게 했습니다. 나란히 놓고 보니 그 차이가 더욱 극명해졌네요. 원래부터 두 사람이 가진 분위기는 제법 달랐으니까요. 머리카락 색이 바뀌자마자 확연하게 특징이 도드라져서 쌍둥이라고는 한눈에 알아채기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빅토르 님? 이 정도면 처음 보는 사람은 두 사람을 신의 실수라고 생각할 수 없지 않을까요?”
“확실히……정말 다른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친아버지에게도 인정받았으니 성공이네요.
“빅토르 님은 이제부터 에리나 양을 에리자 양과 같이 사교계에 소개하시면 됩니다. 친척 가문의 아이를 입양했다고 하면 다른 귀족분들도 충분히 이해하시지 않을까요?”
“확실히……이 정도의 변화라면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이것으로 두 사람이 신의 실수가 아니라고 만드는 것은 끝났네요. 물론, 나중에 빅토르 님과 솔론 가문의 사용인에게 헤나 염색 방법을 알려드려야 겠지만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그네스 님.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실은, 받고 싶은 보답으로 생각한 게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말씀하십시오. 저의 힘이 닿는 한에서 들어드리겠습니다.”
에리나 양과 에리자 양의 문제는 끝났으니, 이제는 제 문제를 해결할 차례입니다.
“저는 에리나 양과 에리자 양에게 ‘화상 치료의 물약’ 제조를 의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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