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사디스트 왕자는 양보하겠습니다
* * *
전야제 무도회가 있던 메인 홀에서, 네 사람과 같이 제가 왕궁에서 머무는 침실에 도착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즐거우셨습니까, 아그네스 님.”
“저를 대체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여기 네 사람이 제 몰골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다고 난리를 피웠다고요.”
“후후, 그렇습니까.”
“네 사람이 마리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니까 나가서 얘기하시는 게 어때요? 화장은 제가 직접 지우고 머리도 제가 알아서 풀 테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화장을 지워야 하는데, 어두워서 초를 켤까 하다가 번거로워서 그만두었습니다. 조금 어둡지만 안 보여도 얼굴을 씻는 데는 별문제가 없으니까요.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아그네스 영애를 저렇게 아름답게 만들어 놓으시다니요!”
“영애님을 이런 자리에서 화려하게 꾸미면 온갖 벌레가 꼬일 게 당연하잖습니까.”
“안 그래도 아름다운 아그네스 님이 너무 눈에 띄어서 감추느라 고생했다고요!”
“다음에는 이렇게까지 아그네스 누나의 잠재력을 꺼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문밖에서 네 사람이 마리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네요. 내용은 잘 들리지 않지만, 목소리가 화를 내는 것 같이 들립니다. 저를 위해서 화를 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조금 기쁘네요.
“여러분이야말로 아그네스 님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마십시오. 이번 일은 아그네스 님이 과열되시기 직전에 제가 해소에 도움을 드린 것뿐이니까요.”
마리도 무언가 말하고 있지만 잘 안 들리네요. 뭐, 서로 어떻게 이야기를 별로 궁금하지는 않으니까요.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까 그냥 자고 싶은 기분이기도 하고요. 어제도 제대로 못 잤으니까요.
…….
선물은……어쩔 수 없겠네요.
결국,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당일 아침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간도 없고, 인제 와서는 정말로 선물로 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어제 밤 잠들기 직전에 마음먹은 행동을 실천하기로 했습니다.
“마리, 혹시 밖에 있나요?”
“네, 아그네스 님. 몸단장을 도와드릴까요?”
“그것도 부탁드리겠지만……먼저 해야 할 게 있는데 도와주겠어요?”
“말씀하세요, 아그네스 님.”
“편지봉투와 종이, 펜, 그리고 인주를 빌려와 주세요.”
“……이상으로 국왕님의 축언을 마칩니다.”
장내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지금 저는,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제1 왕자의 탄생일 축제의 한가운데에 와있습니다.
방금까지는 국왕님, 즉 니콜라스 왕자의 아버지께서 니콜라스 왕자에게 선물을 전하고, 탄생일 축언을 하셨습니다.
긴장 때문에 심장 고동이 빨라졌습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 앞에서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요.
“……이상으로 왕비님의 축언을 마칩니다.”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왕비님의 차례도 끝났습니다. 이제 다음은 파노스 왕자가 니콜라스 왕자에게 선물을 전할 차례고, 그다음이 제 차례입니다.
니콜라스 왕자에게 전할 것을 양손에 꼭 쥔 채, 심호흡을 했습니다.
“……다음으로,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제1 왕자님의 약혼자이신,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공작 영애의 차례가 있겠습니다.”
진행자의 말이 끝났을 때, 모래주머니라도 달린 듯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도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니콜라스 왕자의 앞에 섰습니다.
“여덟 번째 탄생일을 축하드립니다,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왕자님.”
“제 탄생일을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영애.”
니콜라스 왕자의 회답이 끝나고, 이번에는 제가 니콜라스 왕자에게대답을 드릴 차례입니다.
“이것이, 제가 드리는 마음입니다.”
양손에 꼭 쥐고 있던, 편지봉투를 건네드렸습니다.
“…….”
니콜라스 왕자가 그것을 보고 잠깐 굳으셨다가, 이내 제 손에서 그 편지봉투를 가져가셨습니다.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영애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니콜라스 왕자는,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가슴 안주머니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니콜라스 왕자.”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당황한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니콜라스 왕자를 불렀습니다.
“넘겨짚지 마시고, 편지봉투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니콜라스 왕자가 하던 행동을 멈추었습니다. 다행히 제 말이 들린 것 같네요. 니콜라스 왕자는 넣으려고 했던 편지봉투를 다시 꺼냈고,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습니다.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1일 사용권?”
니콜라스 왕자의 말이 들리자마자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겨우 참았습니다.
사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제 몸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가장 처음에 생각났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전생에 부모님에게 어버이날 선물로 드렸던 ‘뭐든지 들어주는 권’ 같아서 가능하면 다른 물건으로 준비하려고 노력했는데……결국 이런 유치한 물건을 선물로 건네버렸네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 인장을 항상 소지하고 다녔기에, 마지막에 인장으로 그럴싸한 구색이라도 보이게끔 만든 것입니다. 그런 것도 없었으면 진짜 급조한 티가 나는 선물 느낌이 났을 테니까요. 도저히 제1 왕자의 탄생일에 줄 만한 품질의 물건이 아니었을 거예요.
“아름답고 지혜로운 앙겔로풀로스 공작 가문 영애의 24시간을 드리는 것이니, 탄생일 선물로 부족함은 없으시겠죠?”
괜히 양심에 찔려서 가치가 높은 물건을 드리는 척 허세를 부렸습니다. 제 스스로 저한테 '아름답고 지혜로운' 같은 수식어를 붙이니, 부끄러워서 도망치고 싶어졌습니다. 당연히 도망갈 수는 없겠지만요. 과연 머리 좋은 니콜라스 왕자가 속아 넘어가 줄까요.
“아그네스 영애, 그렇다면 이틀 전의 대답은…….”
“누가 봐도선물이잖아요. 제 입으로 말하게 하셔야겠어요?”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제가 니콜라스 왕자에게 드리는 것은 선물로 결정했습니다. 독이 든 성배가 될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10년 정도면 니콜라스 왕자의 사디스트 성격이 발현되지 않게 잘 유도할 수 있겠죠.
만약 아스토리아 왕립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고쳐질 기미가 안 보인다면, 그때 가서 주인공에게 양보해서 약혼 파기를 당하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아리아나에게는 미안하지만, 둘도 없는 친구니까 사정을 잘 말하면 이해해 줄 거에요.
“아그네스 영애.”
니콜라스 왕자가 갑자기 저를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장내에서는 지금까지 중 가장 큰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걸로 된 거겠죠. 마차에서 들었던 니콜라스 왕자의 진심은 제게 호의적인 것 같으니까요. 원래대로라면 악역 영애인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지만, 내용물이 다른 저라면 주인공이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라고 생각했을 때, 니콜라스 왕자가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절대 놓치지 않는다, 아그네스.”
…….
…….
……네?
오랜만에 들은 니콜라스 왕자의 싸늘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저는 공포심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것들이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 당했어요! 역시 니콜라스 왕자의 내용물은 사디스트 왕자가 맞았어요! 애정이 아니라 복수심으로 저를 붙잡고 있었던 게 맞았다고요! 마차 안에서의 그 모든 모습이 전부 연기였다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고요!
역시 마지막에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되는 거였는데! 드디어 니콜라스 왕자의 손아귀에서 탈출할 기회였는데! 바보같이 분위기를 타서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놓쳐버리다니,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다니요!
……다시 처음부터 노력해야 겠어요. 아리아나와 니콜라스 왕자를 자주 만나게 유도하고, 제이스의 물약 개발을 도와주고……주인공 캐릭터가 나타날 때까지 단죄 엔딩에 먼저 당하지 않도록 최대한 단둘이 있을 자리는 피해야겠어요.
사디스트 왕자는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거니까요. 절대로!
니콜라스 왕자에게 약혼을 유지할 것인지 파기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으로 선물을 드린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습니다.
사흘간의 강행군과도 같은 니콜라스 왕자의 탄생일 축제가 끝나고, 겨우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고생 많이 했다, 아그네스, 제이스.”
“사흘 동안 바빠서 두 사람 다 식사도 제대로 못 했죠? 시간은 조금 이르지만, 주방장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할까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친 저와 제이스를 맞이해 주셨습니다. 확실히 배는 고프지만, 그것보다도…….
“말씀은 감사하지만 피곤해서……먼저 조금만 쉬면 안 될까요?”
“……저도 아그네스 누나와 같은 의견입니다.”
“알겠어요. 그럼 두 사람 다 잠시 쉬도록 해요. 주방장에게는 두 시간 뒤에 식사를 준비하라고 할게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로 지쳐, 마리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침실에 도착했습니다. 옷을 실내복으로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몸을 던지듯이 눕혔습니다.
테이블에 놓아둔 니콜라스 왕자의 선물만 제대로 가져갔어도 이렇게 피곤할 일은 없었을 텐데요. ……어라?
“마리, 혹시 제 방 테이블 위에 있는 포장된 물건 못 보셨나요?”
분명 테이블 위에 놓았을 터인 니콜라스 왕자에게 줄 선물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 물건이라면, 여기 있습니다.”
제 질문에 마리는, 주머니에서 포장된 선물을 꺼내며 대답했습니다.
“그걸 마리가 왜 가지고 있죠?”
“아그네스 님이 니콜라스 왕자님에게 주실 선물이 아닐까 싶어서, 잊으신 물건인 줄 알고 챙겨서 가지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아그네스 님이 선물로 다른 물건을 전해주시는 것 같아서,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 설마, 왕궁에 왔을 때도 가지고 계셨어요?”
“그렇습니다.”
…….
…….
…….
“이 물건은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아그네스 님.”
“…….”
제 고민과 노력은, 대체 뭐였던 거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