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 * *
방으로 돌아왔더니, 어느새 마리가 제가 잤던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셨습니까, 아그네스 님.”
“네, 그래요……. 전야제 무도회에 참가해야 하니까 몸단장을 부탁드릴게요…….”
준비한 선물은 못 가져오고, 쿠키 만들기는 실패하고, 이제는 시간도 없고……어떻게 해결할 가망이 없어서 기운이 빠지네요.
“알겠습니다. 의상은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마리가 알아서 해 주세요…….”
“화장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도 마리가 적당히 해 주세요…….”
“아그네스 님, 혹시 염려되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역시 마리는 제 기분 파악하는 게 빠르네요. ……하지만 이 고민을 마리에게 말해 봤자 해결될 리도 없고, 그냥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죠.
“딱히 없어요. 신경 써주지 않아도 돼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제가 제 마음대로아그네스 님의 몸단장을 하면 되겠습니까.”
“네, 그렇게 해주세요.”
마리에게 옷이 갈아입혀 지고, 얼굴에 분칠을 당하고, 머리를 다시 묶이는 동안에도 제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선물, 어떡하죠.
마리와 함께 전야제 무도회가 열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저번에 왕궁 무도회 때 갔던 장소와 같은 곳입니다.
“그러면 저는 아그네스 님의 침소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수고했어요, 마리.”
왕궁 메인 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잔잔한 곡이 흐르는 것을 보니 아직 초반부인 모양이네요.
니콜라스 왕자는 이미 와있겠죠, 어디에 있는 걸까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니콜라스 왕자일까요?
시선이 보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전혀 모르는 귀족 영식이 계셨습니다. 제가 잘못 느꼈던 것 같네요.
이번에는 다시 반대편에서 저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시 고개를 돌렸는데 만나 뵌 적 없는 영애분이 있으시네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누군가가 저를 쳐다보는 착각이 드는 걸까요.
피곤해서 그런 걸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확실하게 니콜라스 왕자의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이번에는 니콜라스 왕자가 맞네요. 니콜라스 왕자는 저와 눈이 마주치고 3초 정도 정지했다가, 갑자기 뛰어서 제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아, 아그네스 영애!”
“평안하신가요, 니콜라스 왕자님.”
“그, 그 모습은 대체……!”
제 모습이 이상한가요? 딱히 드레스는 이상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거울은 딱히 안 보고 나왔지만, 화장 정도로 얼마나 다르겠어요.
“음……혹시 제가 옷차림을 잘못 선택했나요?”
“아, 아닙니다. 옷은 정말 아름답고, 얼굴도 정말 예쁘고, 머리 모양도 굉장히 어울리십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그렇게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흥분하실 일인가요? 라고 말하려는 하는 도중, 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그네스 영애님!”
“아그네스 님!”
“아그네스 누님!”
파노스 왕자와 아리아나, 제이스네요. 역시 세 사람도 전야제부터 참석한 모양입니다.
“영애님!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시면 어떡합니까!”
“맞아요! 곤란해요!”
“지금 누님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면 안 됩니다.”
세 사람도 니콜라스 왕자 못지않게 얼굴을 붉히면서 당황하고 있네요.
“그래요? 그럴 정도로 제 모습이 추한가요?”
“아, 아닙니다, 영애님!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아그네스 님은 너무 아름다우세요! 너무 아름다우셔서 문제라고요!”
“아그네스 누님의 지금 이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생각할 게 많아서 마리에게 적당히 옷이랑 화장을 맡겼는데, 아마 제가 모르는 사이 장난을 쳐둔 것 같네요. 세 사람은 그걸 위로하려고 애써 돌려 말하고 있는 것 같고요.
“어쨌든, 오늘은 가능하면 친분이 없는 영식과 대화를 하거나 춤을 추는 것은 삼가셔야 합니다.”
“모르는 영애하고 말해도 안 돼요!”
“아그네스 누님께서 다과나 음료가 필요하면,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확실히 제 꼴이 말이 아닌 모양이네요. 나중에 마리에게 한마디 해야겠어요.
“아그네스 영애, 오늘은 저희가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릴 테니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말고…….”
“싫어요.”
“네?”
니콜라스 왕자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습니다.
“싫어요. 춤추고 싶다고요.”
요즘 들어 점점 쌓이는 스트레스 때문에 못 버티겠어요. 파노스 왕자는 이상한 선물을 하지를 않나, 니콜라스 왕자는 절 납치해서 계획대로 준비한 선물도 못 가져오게 하고,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쿠키 만들기도 실패……춤이라도 마음껏 추며 기분을 떨쳐내지 않으면 폭발해 버릴 지경이라고요.
“니콜라스 왕자님, 제게 춤 권유는 안 하실 건가요? 그러면 전 다른 분에게 부탁을 드리러…….”
“아닙니다! 아그네스 영애, 부디 저와 첫 번째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셔야죠. 니콜라스 왕자의 손을 잡고 무대의 중앙으로 나왔습니다. 순식간에 주변에서 저희 둘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어수선하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번에 개국 기념일 무도회에는 이 정도 반응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마리는 대체 절 어떤 꼴로 만들어 놓은 거죠?
새로운 곡이 시작되고, 니콜라스 왕자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번 무도회와 마찬가지로, 니콜라스 왕자가 선도하고, 제가 움직임을 맞춰가고…….
…….
“뭔가, 마음에 안 드네요.”
“무슨 말씀입니까, 아그네스 영애?”
니콜라스 왕자와 깍지를 끼고 있는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아, 아그네스 영애?!”
방심하고 있던 니콜라스 왕자는 제 쪽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순간적으로 동작을 바꿔서, '그런 동작'의 춤인 척 위장하셨습니다. 역시 능숙하시네요.
“갑자기 그러지 말아 주십시오. 위험합니다.”
“글쎄요. 니콜라스 왕자가 잘 따라오시면 해결되는 거 아닌가요?”
다시 한번 새로운 동작으로 니콜라스 왕자를 유도했습니다. 이번에는 당황하기는 하시지만, 잘 따라오셨네요.
이래 봬도 전생의 저는 저스트댄스를 올 클리어할 정도로 춤추는 데는 자신이 있거든요. 저번에는 눈에 띄지 않는 게 목적이었으니 조용히 따라가 드렸지만, 오늘은 마음껏 춤을 춰서 스트레스를 풀고 싶으니까 제 마음대로 출 거에요.
당기고, 밀고, 한 바퀴 돈 다음에 다시 당기고. 니콜라스 왕자도 초반에는 다시 자신의 박자로 유도하려고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제 동작에 맞춰주셨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셨어야죠.
한 곡이 끝나고 나니, 니콜라스 왕자가 눈에 띄게 지친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번에는 여덟 곡을 연속으로 춰도 괜찮으시더니, 체력이 떨어지셨나요?”
“아, 아그네스 영애. 잠시만 쉬는 게 어떠십니까.”
“아직 한 곡밖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저는 아직 만족을 못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차라리 다른 분에게 부탁을 드리러…….”
“아그네스 영애님, 저와 함께 춤을 추시겠습니까.”
니콜라스 왕자 대신 춤을 출 만한 사람을 찾아보고 있었는데, 파노스 왕자가 다가왔습니다.
“다음에 만났을 때 저와 춤을 춰 주시겠다는 약속, 설마 잊어버리지는 않으셨지요?”
그러고 보니 첫 만남 이후 헤어질 때 그런 이야기를 했었죠.
“좋아요. 그럼 지친 니콜라스 왕자 대신 상대해 주세요.”
파노스 왕자는 니콜라스 왕자보다 체력도 좋아 보이니까 금방 지치지 않으시겠죠. 다음 곡이 시작되고, 이번 곡에서는 파노스 왕자와 춤을 추었습니다.
이번에도 한창 춤을 추다가, 니콜라스 왕자와 마찬가지로 맞잡은 손을 당겼습……전혀 딸려오지 않잖아요.
“아그네스 영애님. 원하시는 동작을 '말씀'하시면 제가 맞춰 드리겠습니다.”
파노스 왕자는 완력이 니콜라스 왕자보다 강해서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가 없네요. 그렇다고 이대로 파노스 왕자의 페이스에 따라가는 것도 맘에 안 드는데요.
……좋은 생각이 났어요.
당길 수 없다면 밀어야죠. 맞잡은 손을 제 몸쪽으로 끌어당기는 대신, 제 몸을 파노스 왕자 쪽으로 밀착시켰습니다.
“아, 아그네스 영애님?!”
파노스 왕자의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붙어서 춤을 추었습니다. 파노스 왕자도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으려고 조금씩 거리를 벌리셨지만, 도망치는 것 보다 쫓아가는 게 훨씬 쉽거든요.
“아, 아그네스 영애님. 자제하여 주십시오. 심장에 좋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하고 싶네요. 그러고 보니 파노스 왕자는 어제 베개 선물을 해서 절 곤란하게 만든 장본인 아닌가요? 본인은 그렇게 마음대로 하고 저한테는 자제하라고요? 제 스트레스 지분율의 최소 3할의 지분이 있으시면서요?
다시 몸을 밀착시키니 황급히 제게서 거리를 벌렸습니다. 언제까지 계속 그렇게 도망만 치실 건지 볼까요. 이번엔 아예 몸에서 힘을 빼고 파노스 왕자의 반대 방향으로 넘어지는 척 몸을 뒤로 젖히니, 도망갈 준비를 하고 계시던 파노스 왕자가 이번에는 급하게 다가와서 제 허리를 다시 감아서 잡았습니다.
“아그네스 영애님, 제발…….”
그런 식으로 이번에도 제 마음대로 추다 보니 두 번째 곡이 끝났습니다.
“시,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5분 만이라도 쉬면 안 되겠습니까.”
5분이면 거의 한 곡 가까이 되는 시간이잖아요. 아직 만족하지 못한 제가 불만을 말하려고 했을 때, 제이스가 저를 불렀습니다.
“아그네스 누나, 다음 곡은 저와 춰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이스, 사교댄스를 출 줄 알아요?”
“앙겔로풀로스에 온 이후로 열심히 배웠습니다. 아직 부족하겠지만, 그 부분은 아그네스 누나께서 가르쳐 주시면서 어울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뭐 나쁠 거 없죠. 저도 아직 더 추고 싶은 기분이고, 남동생의 부탁인데 기꺼이 들어주도록 하죠.
“좋아요. 그렇다면 꼼꼼히 가르쳐 드릴게요.”
세 번째 곡이 시작되고, 제이스가 제 몸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움직임은……못 추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조금 시원찮네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면 좋겠어요.
“제이스, 허리에 감은 손을 더 뻗으세요.”
“이, 이렇게 말입니까.”
“그렇게 새끼손톱만큼 조금 뻗는 건 티도 안 나요. 적어도 여기까지는 뻗으세요.”
제이스의 팔을 잡고 제 반대편 허리까지 감을 정도로 깊게 잡아당겼습니다.
“아, 아그네스 누나. 너무 며, 면적이 많이 닿습니다.”
“원래 이렇게 하는 거예요. 가족끼리인데 좀 많이 닿으면 어때요.”
그건 그렇고 아직도 좀 부족한데요.
“제이스, 조금 더 크고 빠르게 움직이세요.”
“이, 이렇게 하면 됩니까.”
“그런 거북이 기어가는 속도 만큼 빠르게 말고요. 적어도 이 정도로는 크고 빠르게요.”
맞잡은 손을 제이스 쪽 방향으로 신속하게 밀었습니다. 물론 조금 더 무대를 넓게 쓰는 것도 잊지 않고요.
“아, 아그네스 누나. 너,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해요.”
다시 팔을 당기고, 어깨를 밀고, 허리를 흔들면서 빠른 템포로 춤을 추었습니다. 제이스는 니콜라스 왕자나 파노스 왕자보다 가벼워서 제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은 좋네요.
세 번째 곡이 끝나니 제이스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지쳐 쓰러졌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움직임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일곱 살 아이네요. 딱 한 곡 정도만 더 추면 상쾌할 것 같은데, 니콜라스 왕자도 파노스 왕자도 아직 지치신 것 같고, 이번에야말로 다른 귀족 자제분과 친분을…….
“아그네스 님!”
이번에는 아리아나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저와도 한 곡 추실 수 있으신가요!”
아리아나와 춤인가요.
“괜찮겠어요? 저는 상관없지만요.”
“저는 아그네스 님과 춤을 출 수 있다면 영광이에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이런 일이 있을 것도 같아서 평소에 남자 파트도 공부…….”
“남자 파트를 한번 춰보고 싶었는데, 아리아나가 어울려 준다니 고맙네요.”
“……네?”
네 번째 곡이 시작되자마자, 아리아나의 허리에 손을 뻗고, 반대편 손으로는 손바닥을 깍지 껴서 잡았습니다.
“아, 아그네스 님?!”
“괜찮아요. 저는 남자 파트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아리아나는 평소처럼 여자 파트를 추시면 돼요.”
제가 아리아나를 선도하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입장으로 추는 것도 신선해서 좋네요. 하지만 팔이 남자보다는 짧다 보니 허리를 완전히 감아서 잡기가 어려운데요. ……같은 여자끼리고, 조금 더 붙어도 상관없겠죠.
아리아나의 허리를 조금 더 감싸기 위해, 몸을 바짝 붙였습니다.
“히약?!”
“아리아나, 조금 더 붙어요. 허리를 제대로 감쌀 수가 없잖아요.”
“네, 네헷!”
이후로는 아리아나가 잘 밀착해준 덕분에 순조롭게 출 수 있었습니다. 남자 파트로 추는 것도 재밌네요.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아리아나에게 부탁해보죠.
아리아나도 한 곡만에 금방 지쳐버렸네요. 여자아이니까 어쩔 수 없겠죠.
“……아그네스 영애, 혹시 더 추실 생각입니까?”
거의 회복이 끝난 듯한 니콜라스 왕자가 물었습니다. 체력적으로는 더 출 수 있을 것 같지만…….
“오늘은 이 정도면 만족했어요. 다들 어울려 줘서 고마워요.”
음식도 너무 배부르게 먹는 것은 오히려 만족도가 떨어진다고 하니까요. 처음의 목적인 스트레스 해소도 끝났고요.
“마, 만족하셨습니까.”
“현명한 판단입니다, 아그네스 누나.”
“끝난……건가요?”
“저는 내일 일정 때문에 오늘은 들어가서 일찍 쉬려고 하는데, 여러분은 더 계실 건가요?”
“침소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그네스 영애.”
“저도 영애님이 더 눈에 띄지 않으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그네스 누나가 침소로 들어가시는 걸 보고 쉬겠습니다.”
“아그네스 님의 사용인과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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