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고민했습니다
* * *
왕궁에 도착한 이후로는 거친 파도에 몸이 휩쓸려 나가는 것처럼,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왕궁 사용인들의 안내를 받아 욕실에서 몸을 씻고, 평소보다 크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방금 대화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니콜라스 왕자의……진심인가요.
‘지금의 저는 어떻습니까. 아그네스 영애가 말씀하신, ‘당당하고 일곱 살 다운 뻔뻔함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까?’
‘제 여덟 살 생일이 다가오기 전까지 아그네스 영애의 이상형이 되지 못한다면, 미련을 갖지 않고 당신을 놓아드리기로 말입니다.’
‘저에 대해서 솔직하게 평가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 말들이 전부 니콜라스 왕자의 진심이라고 한다면…… 설마, 지금까지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요?
니콜라스 왕자는 분명 미래의 사디스트 고문 기술자가 될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 사람을 신랑으로 삼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니콜라스 왕자를 상대로는 처음부터 약혼 파기에 대해서만 고민했었죠.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라도 니콜라스 왕자가 지금까지 저에 대해서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던 거라면…….
저는 어떤 대답을 드려야 할까요.
사실, 니콜라스 왕자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저 결혼한 뒤에 저를 묶어서 채찍으로 때리거나,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거나, 못이 박힌 침대에 눕힌다거나……그런 미래에 당하게 될 가학적인 행동에 몸서리치게 되는 거죠.
그것만 제외하면 니콜라스 왕자는 제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일단 외모가 제 취향이고, 목소리도 좋고, 지적이고, 미소가 아름답고, (겉으로 보여주는) 성격도 자상하고……유일한 단점이 그 장점을 전부 상쇄하고도 한참을 마이너스로 만드는 게 문제지만요.
하지만 그런 가학적인 니콜라스 왕자도 한 가지 결말에서는 사디스트적 면모를 보이지 않고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순수한 애정이 가득한 이야기로 끝나기도 합니다.
바로 니콜라스 왕자가 주인공과 이어지는 경우입니다.
만약 저도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가 아닌 주인공 캐릭터였다면, 니콜라스 왕자의 적극적인 어프로치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죠.
하지만 그런 식으로 제가 주인공이면 받아들이고,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라서 거부하는 것이, 과연 옳은 판단일까요. 저라는 사람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저인데, 니콜라스 왕자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해서 주인공에게는 해피 엔딩으로, 아그네스에게는 단죄 엔딩으로 전개하는 사람일까요.
적어도 게임에서 보았던 니콜라스 왕자는, 아니, 최근까지 만나본 니콜라스 왕자도 전혀 그런 식의 사고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도망치고 있던 것은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에 집착해서, 니콜라스 왕자를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던 제가 아닐까요.
그리고 10년 후에 사디스트 왕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어쩌면 그렇게 될 운명은 진작에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게임과는 다르게 흘러간 사건도 많이 있었으니까요. 소심한 성격의 파노스 왕자는 니콜라스 왕자에게 시비를 걸 정도로 익살스럽게 성장했고, 아그네스와는 앙숙이었을 아리아나는 저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고, 인간불신이라서 관계에서 고립되어 있었던 제이스는 완벽하게 화목한 앙겔로풀로스 공작 가문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니콜라스 왕자도, 무언가 바뀐 게 있지 않을까요. 설령 아직 바뀌지 않았다고 해도, 제가 앞으로 10년 동안 곁에 있으면 충분히 바꿀 수 있을 지도 모르고요.
저는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지만,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가 아닙니다. 니콜라스 왕자와 거의 만나지도 못했던 원작 게임의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조차도 니콜라스 왕자의 성격 변화에 기여하는데, 그렇다면 일주일에 절반 가까이 만나고 있는 지금의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인 저도 니콜라스 왕자의 성격을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직 마음을 확정하지는 못했지만, 혹시 잃어버릴 수 있으니 니콜라스 왕자에게 줄 ‘선물’을 준비해 둬야겠네요.
제 방 테이블 위에 포장해 놨던 니콜라스 왕자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
…….
…….
…….
안 가지고 왔잖아요!
결국, 니콜라스 왕자에게 줘야 하는 선물에 대해 고민하다가, 잠을 잔 듯 못 잔듯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습니다.
내용물은 부끄러워서 비밀로 하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 혹시라도 제이스나 마리가 가져다줄 거라는 기대도 하기 힘들겠죠. 지금부터 다시 앙겔로풀로스에 다녀온다는 것도 말도 안 되고, 애초에 니콜라스 왕자의 마차를 타고 왔으니 제이스나 마리가 데리러 오지 않으면 돌아갈 수도 없잖아요.
……어떡하죠, 정말로.
이게 다 니콜라스 왕자 때문이에요. 저한테 사전 상의도 없이 그렇게 납치하듯이 데려오니까, 제가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거라고요.
이렇게 된 거 하늘의 뜻으로 여기고 그냥 편지만 쓰는 건 어떨까요. 어쩌다 보니 선물을 가지고 오지 못하게 된 건, 사실 이번 사건이 니콜라스 왕자와 파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에 하늘이 제게 계시를 내린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편지를 쓰고, 니콜라스 왕자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
…….
…….
…….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적지 않은 시간을 니콜라스 왕자와 만나면서, 게임에서 보았던 완전무결한 완벽주의자 니콜라스 왕자가 아닌, 제멋대로인 7살 아그네스 영애의 약혼자 니콜라스 왕자의 여러 모습을 바로 옆에서 봐왔습니다.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하던 니콜라스 왕자, 무도회에서 질리지도 않고 대단원까지 같이 춤을 춘 니콜라스 왕자, 제 화상을 걱정해 준 니콜라스 왕자, 프레타리아어를 정성스럽게 가르쳐 준 니콜라스 왕자, 아리아나와 말싸움을 하던 니콜라스 왕자, 제 탄생일 선물로 약혼반지를 준 니콜라스 왕자,
본인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약혼을 파기해도 좋다고 말한 니콜라스 왕자.
몇 개월간 만나온 다양한 표정의 니콜라스 왕자와 이런 식으로 이별하는 것은 제가 원하는 결말이 아닙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니콜라스 왕자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하듯 이별을 해버리는 것이 유일한 약혼 파기의 방법이라면, 차라리 제가 고문을 받는 아그네스 엔딩이 되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잘 부탁하면 손톱 밑을 바늘로 파는 고문은 빼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직 정한 건 아니에요. 니콜라스 왕자에게 ‘선물’을 줄지 ‘편지’를 줄지 아직 정한 건 아니라고요.
그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바뀌더라도 전혀 지장이 없게 준비를 해 놓을 필요는 있잖아요?
그렇지만 어떻게 하죠. 여기는 왕궁이고, 왕궁에 있는 물건을 선물로 줄 수도 없고, 급하게 왔던 거라서 자금 같은 것도 들고나오지 않았고, 가진 것이라고는 제 몸과 전생의 지식 정도밖에 없는데…….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님, 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
……일단 밥은 먹고 생각할까요.
왕궁에서 먹는 식사는 정말 맛있네요. 궁중요리라서 그런지 평소에 먹었던 음식이 아닌 생소한 음식들이라서 먹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생선 요리, 왕도는 바닷가에서 그렇게 가깝지도 않을 텐데 정말 신선합니다. 스테이크도 집에서 먹는 식사와는 고기의 빛깔이 다릅니다. 게다가 제가 좋아하는 미디움 레어로 알맞게 구워졌어요.
요리는 맛있지만……분위기는,
“…….”
“…….”
어색하다고요! 어제 마지막으로 그런 비장한 얘기를 하고 헤어져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요! 대체 누구예요! 식사 자리를 저와 니콜라스 왕자 단둘이서 하게 만든 사람은!
“……니콜라스 왕자.”
“……부르셨습니까.”
“니콜라스 왕자는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시나요?”
“식사 이후에는 전야제 준비로 바빠질 것 같습니다. 전야제는 다과를 곁들인 무도회 형식으로 할 예정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후 전야제까지는 만날 수 없겠네요.”
“예정대로라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니콜라스 왕자에게 들키지 않고 선물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은, 약 9시간 정도일까요. 내일이 되면 저도 아침부터 니콜라스 왕자의 약혼자 신분으로 여러 행사에 참여하게 될 테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게다가 몰래 왕궁에서 나갔다 오는 것을 성공해도, 선물을 살 비용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니까 곤란하네요.
왕궁에서 나갈 수 없고, 나간다고 해도 선물을 살 자금도 없고, 9시간 안에 구할 수 있는 선물……그런 게 있나요?
선물에 대해서는 결국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한 채, 대화가 없는 니콜라스 왕자와의 어색한 식사가 끝났습니다.
식사 이후 목적 없이 왕궁 내부를 산책을 겸하며 걸어 다녔습니다. 산책이라도 하다 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도 모르니까요. 분위기 전환이에요, 분위기 전환.
수많은 사용인이 니콜라스 왕자의 탄생일 축제 준비로 왕궁 내에서 바쁘게 움직이는데, 딱 한 명의 사용인만 비교적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네요.
“잭, 맞죠?”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그네스 님.”
뒷모습을 보고 말을 걸었더니, 예상대로 니콜라스 왕자의 전속 사용인인 잭이었습니다.
“니콜라스 왕자의 탄생일 축제 준비로 바쁘지 않으신가요?”
원래대로라면 가장 바빠야 할 사람이 아닐까 싶은데요.
“제 업무는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님의 시종과 경호입니다. 오늘은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님의 곁에 다른 시종과 경호원들이 많이 붙어 있기에, 제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가요.”
그런 이유였군요. 그건 그렇고 정말로 니콜라스 왕자에게 줄 선물은 어떡하죠.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무언가 만들어서 줄 만한 것이라도……아!
“잭, 당신 입 무겁죠?”
“그렇습니다.”
“한가하면, 잠깐 저 좀 도와주세요.”
생각났습니다. 왕궁에서 나가지 않고 준비할 수 있는, 니콜라스 왕자에게 줄 선물 말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