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아리아나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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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일 잔치에 방문하신 내빈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무대 위에서 잠시 홀을 둘러보았습니다. 무대의 바로 앞에는 어머님과 아버님이 계시고, 제이스는 그 옆에 두 분과 함께 서있네요.
그리고 작년에도 저를 축하해주러 방문하셨던 아버님의 지인분들도 보입니다. 히에로 자작 가문의 다니엘 히에로 자작님, 메르쿠리 남작 가문의 힐라스 메르쿠리 남작님과 실케 메르쿠리 남작 부인, 솔론 남작 가문의 빅토르 솔론 남작님입니다. 이분들은 작년에도 제 탄생일에 찾아오셨던 것이 기억이 나네요.
특이사항으로는 빅토르 솔론 남작님께서 처음 보는 영애와 같이 방문하셨다는 것 정도일까요. 아마 따님이 슬슬 사교계 데뷔를 할 나이라서 데리고 나오신 거겠죠.
참고로 방금 말한 귀족분들은 전부 『사랑과 운명 ~아스토리아~』의 주요 인물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와 가장 연관이 깊게 될 예정인 가문은 빅토르 솔론 남작님의 가문이겠죠.
빅토르 솔론 남작님이 오늘 데려오신 저 영애가, 일 년 뒤 제이스의 약혼자가 됩니다.
물론 아직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확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이스의 약혼자가 정해지는 과정은 원작과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고 예상하니까요.
원작에서도 아그네스는 니콜라스 왕자와 약혼을 했습니다. 제가 약혼한 이유와는 매우 다르지만요. 어쨌든 그 과정에서 앙겔로풀로스 가문이 왕가와의 연줄이 생기면서, 새로이 앙겔로풀로스 가문과 연을 맺으려는 귀족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렇기에 이후 앙겔로풀로스 가문을 잇게 될 제이스에게도 많은 혼담이 오갔습니다.
그 와중에 원작에서의 부모님은 아주 현명한 판단을 내립니다. 왕족과의 연줄을 바라고 다가오는 귀족들하고 혼담을 맺을 바에야, 조금 낮은 가문이라도 이전부터 교류를 해왔던 가문과의 혼담을 진행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신 거죠.
이렇게 하면 새롭게 연이 생긴 귀족 중 하나와 혼담을 진행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 중 하나인, 선정 과정에서 차별이나 거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니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또, 오랫동안 교류한 세력이라면 힘이 조금 약하더라도 확실하게 챙기는 가문이라는 인상도 줄 수 있고요.
그래서 히에로 자작 가문, 메르쿠리 남작 가문, 솔론 남작 가문 중 한 가문의 영애와 제이스의 혼담을 진행하려고 했는데, 다니엘 히에로 자작에게는 딸이 없었고, 메르쿠리 남작 가문의 영애는 특수한 사정으로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은 솔론 남작 가문의 영애와 제이스가 약혼을 진행하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일년 뒤 남동생의 약혼자가 될 솔론 남작 가문의 영애와 인사를 나누려고 찾아다니던 중, 언제나 듣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그네스 님! 여덟 번째 생일을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아리아나. 그리고…….”
아리아나가 제 아버님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귀족분과 함께 제게 다가왔습니다. 풍기는 분위기가 아리아나와 비슷한 것을 보니, 세이타리디스 가문의 사람이겠죠.
“처음 뵙겠습니다, 세이타리디스 후작님. 아리아나 세이타리디스 양과 자주 교류하고 있는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입니다.”
“여덟 번째 탄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공작 영애. 세이타리디스 후작 가문의 당주인 에드워드 세이타리디스입니다.”
원작 게임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네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프리퀄 이미지나 초기 설정화로도, 목소리나 텍스트 출현으로도, 하다못해 배경에 같이 그려진 엑스트라 등장인물로도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으니까요. 상업 귀족이라서 항상 먼 지방을 교류하러 다니시느라 굉장히 바쁜 인물이라는 설정이 붙어 있고, 그래서 유일한 자식인 아리아나의 입학식이나 졸업식에도 다른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우고 화면에 나오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제작진이 바빠서 캐릭터 디자인을 못 하고 적당한 이유를 붙여서 일부러 등장시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지만요.
그래도 이렇게 만나 보니까 아리아나와 닮은 점이 많네요. 머리카락의 색은 은발로 아리아나의 하늘색 머리와는 다르지만, 눈매가 닮았고 특히 사파이어색 눈동자가 똑같습니다.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는 귀족답게 호감형 외모를 가진 미중년이시네요.
“아리아나에게 듣기로는 굉장히 바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여덟 번째 탄생일을 축하하러 방문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괜찮습니다. 마침 일정도 비어 있었고, 안 그래도 아그네스 영애를 꼭 만나 뵙고 싶었으니까요.”
“저를요?”
원래대로면 살면서 한평생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일 텐데, 저와 만나서 나눌 이야기가 있을까요?
“아리아나, 아그네스 영애와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자리를 비워줄 수 있겠니?”
“네. 단, 아그네스 님에게 이상한 얘기는 하면 안 돼요.”
아리아나까지 퇴장을 시키고 이야기를 시작할 정도면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를 전달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아그네스 영애는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약혼자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지만요.”
“저희 아리아나에게도 약혼자를 붙여주려고 몇 번 말을 해봤습니다만, 자꾸 ‘저는 아그네스 님과 결혼할 거니까 약혼자는 필요 없어요’라고 말하니 곤란해서 말입니다.”
……네?
어……무슨 이야기죠? 아리아나가 저랑 결혼한다고요?
아리아나는 분명 니콜라스 왕자를 좋아하고 있을 텐데……머릿속이 혼란스럽습니다.
한번 다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리아나가 어째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아마실제로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고,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
……
…….
30초 정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결과, 이해가 갈 만한 시나리오가 하나 도출되었습니다.
일단, 아리아나는 여전히 니콜라스 왕자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맞겠죠. 하지만 니콜라스 왕자는 현재 제 약혼자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절대로 이어질 수 없는, 밤하늘의 별과도 같은 존재로 보이겠죠.
하지만 제가 아리아나에게 니콜라스 왕자를 양보하겠다고 확답을 드렸으니, 아리아나에게는 믿는 구석이 생긴 겁니다. 즉, 저를 믿고 확실하게 니콜라스 왕자를 노리기 위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약혼자를 만들지 않은 것이죠.
하지만 명망 높은 후작 가문의 유일한 영애가 약혼자를 아무 이유 없이 만들지 않을 수는 없고, 그 과정에서 제 이름을 사용한 겁니다. 제가 아버지를 잘 설득해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진 거겠죠. 원작에서는 이런 사정을 이야기할 수 없었으니, 파노스 왕자의 약혼자가 되었을 테고요.
둘도 없는 친구인 아리아나가 저를 믿어준다면, 그 믿음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리아나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아리아나에게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지금 아리아나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약혼자로는 부적합한 상태인 겁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사람을 자신의 약혼자로 만들 확신이 있는 거겠죠.”
“확실히, 아리아나가 몇 개월 전부터 사랑하는 여자아이 같은 행동을 부쩍 많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라면서 고민을 하거나, 거울을 보고 고백하는 연습을 한다고 사용인들이 종종 이야기했습니다.”
여전히 니콜라스 왕자에 대한 아리아나의 애정이 식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한달 전 두 사람이 싸웠을 때는 정말로 아리아나가 니콜라스 왕자에게 미련을 버린 줄 알았으니까요.
“아리아나와 아리아나가 사모하는 사람 간의 약혼이 준비되었을 때, 아버님에게도 진실을 밝히고 약혼자를 아버님에게 보여드릴 겁니다. 그때까지 기다려주시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안심은 되지만, 아그네스 영애는 괜찮습니까? 제 딸이 약혼하지 않는 이유로 아그네스 영애의 이름을 대면 아그네스 영애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지는 않겠습니까?”
“제 소중한 친구를 위해서라면 제 이름 정도는 얼마든지 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여드리니, 에드워드 세이타리디스 후작의 얼굴에 있던 근심도 사라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가 제 딸을 과소평가했나 봅니다.”
“아리아나는 정말 착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입니다.”
“저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라와서인지 다소 오만하고 건방진 감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첫 만남 때는 그런 성격이 확실했었네요. 원작 게임에서도 오만하고 건방진 성격이었던 걸로 아는데, 어째선지 최근의 아리아나에게는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오히려 굉장히 겸손하고 자애롭지 않나요?
“그래서 사교계에서도 실례를 저지르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자신보다 높은 가문의 영애에게 시비를 건다거나, 왕족에게 실례를 저지른다거나 하는 일들 말입니다. 제가 따라다니면서 지켜보면 좋겠지만 바빠서 그럴 여유가 전혀 생기지 않으니까요.”
“걱정하시는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아리아나는 예쁘고 마음도 착하니까요. 제멋대로 반해버린 다른 사람들 때문에, 어디선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 수라장이 발생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아그네스 영애 같은 훌륭한 귀빈을 친구로 삼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비로소 안심됩니다. 저희 막무가내인 딸도, 아그네스 영애가 옆에 계신다면 문제가 될 일을 일으키지는 않겠죠.”
“저야말로 아리아나에게 항상 도움을 받는걸요.”
“앞으로도 제 딸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에드워드 후작이 아리아나에게 이야기가 끝났다고 손짓하자, 아리아나가 다시 제 쪽을 다가왔습니다.
“아그네스 님, 혹시 저희 아버지가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나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하신가요?”
“알고 싶지만……아그네스 님이 비밀로 하시겠다면 참을게요.”
“후후, 앞으로도 아리아나를 잘 부탁드린다고 하셨어요.”
“네, 그, 그 얘기는…….”
아리아나의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바빠서 관심을 많이 못 준 아버지가 자신을 생각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그렇겠죠.
에드워드 세이타리디스 후작의 고민도, 아리아나가 약혼을 하지 않는 문제에 대한 설명도 잘 해결된 것 같습니다. 저는 못 보겠지만, 언젠가 아리아나가 니콜라스 왕자를 결혼 상대로 데려갔을 때, 에드워드 세이타리디스 후작의 놀랄 표정이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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