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격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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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왕자에게 프레타리아어 교육을 받기 시작한 이후로, 제 일주일 일정은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습니다. 니콜라스 왕자와 약혼한 이후로 주간 일정이 하나씩 늘어나더니, 어느새 매일 매일 새로운 사람을 상대하게 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우선 매주 첫째 요일과 셋째 요일, 다섯째 요일은 니콜라스 왕자가 방문합니다. 그중에서도 매주 셋째 요일은 제 부탁으로 프레타리아어 수업을 해주시고요.
“아그네스 영애, 오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프레타리아어로 어떻게 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에이사이’, ‘사랑’이 ‘아가포’, 관사 ‘세’를 넣어서 ‘세 아가포 에이사이’ 아닌가요? 지금까지 알려주신 표현으로 만들어 봤어요.”
“역시 아그네스 영애는 대단하십니다. ……한 번만 다시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세 아가포 에이사이.”
“감사……좋은 발음입니다. 그렇다면 ‘처음 만난 그날부터 사랑하고 있습니다’의 표현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우선 ‘처음부터’를 프레타리아어로 ‘아포 틴 프로티’라고 합니다. ‘프로가티를처음우렸는데,튄찻방울이 뜨거워서아포’라고 외우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쓰는 방법은…….”
“조금 더 일상적인 표현은 안 가르쳐주실 건가요?”
니콜라스 왕자는 프레타리아어 강의는 어째선지 ‘죄송합니다’나 ‘감사합니다’ 같은 말보다도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나 ‘저를 약혼자로 인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표현을 먼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니콜라스 왕자의 교육법이 묘하게 이해가 잘 되는 데다가, 다른 프레타리아어를 배울 사람이나 서적도 없어서 일단은 쓸데없는 표현도 포함해서 배워 나가는 중입니다.
한편, 매주 둘째 요일은 아리아나가 방문하고 있습니다.
“아그네스 님, 오늘은 아그네스 님에게 드릴 선물로 이런 걸 가져왔습니다.”
“아리아나, 매번 미안하게 선물을 가져오지 않아도……”
“딸기 퓌레로 만든 크림을 넣은 프레타리아의 자차링이란 이름의 과자에요.”
“이건 마카롱…말린 딸기 같은 게 부드러우면서도 끈적한 식감에…딸기 퓌레 크림은 단맛과 상큼한 맛의 협동 공격…살짝 짠맛이 단맛을 극대화해서 혀에 불꽃놀이 같은 자극을…아! 미, 미안해요. 또 제가 넋을 놓고 그만…….”
“아니에요. 오늘도 아그네스 님의 행복한 표정을 볼 수 있어서 저도 기쁜걸요. 마음에 드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다음에도 아그네스 님이 좋아하실만한 것을 가져올게요.”
방문할 때마다 제가 전생에서 좋아했던 간식과 똑 닮은 음식을 선물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자제하려고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리아나 앞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어버렸던 적이 벌써 한두 번이 아니네요, 그래도 언제나 자애로운 미소로 바라봐 주는 아리아나에게는 늘 고맙습니다.
그리고 매주 넷째 요일은 제이스의 연구를 도와주는 날입니다.
“제이스, 오늘은 어떤 작업을 할 건가요?”
“우선은 하임프 열매를 가열해서 녹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열매가 조금 성질이 좋지 않아서 110℃ 이상이면 타 버리고, 90℃ 이하면 녹지를 않아서 조금 까다롭습니다.”
“그렇다면 중탕으로 녹여도 되나요?”
“중탕 말입니까.”
“물은 100℃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으니까요. 물을 먼저 큰 그릇에 넣고 끓인 다음에, 그 끓는 물에 작은 냄비를 담고 그 안에서 하임프 열매를 녹이면 안정적으로 녹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역시 아그네스 누나는 총명하십니다. 더욱 존경하게 됐습니다.”
“빈말이라도 고마워요.”
인간불신이 사라진 제이스는 원작 게임에서와는 다르게 눈에 띄게 붙임성이 좋아졌습니다. 식사 시간에도 부모님과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고, 넷째 요일이 아닌 날에도 종종 제 방에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질문을 하기도 하고요.
원작과 다른 캐릭터가 되어버린 게 줄거리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귀여운 남동생이 건강하다면 원작 내용이랑 조금 틀어진다고 해도 플러스마이너스로 상쇄되겠죠.
그렇게 평일이 지나고 주말인 여섯째 요일과 일곱째 요일에는 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거의 매주 파노스 제2 왕자에게서 편지가 오기 때문이죠.
「붉은 장미보다 빛나는 아그네스 영애에게
아그네스 영애를 뵀던 날로부터 벌써 두 달이나 지났습니다.
보름달은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지만, 아그네스 영애를 향한 제 마음은 여전히 제 심장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이슬처럼 맑은 아그네스 영애의 눈동자에 대한 기억은 흐려지기는커녕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제가 당신을 향한 사랑이 저희 형의 약혼자인 당신에게는 부담스러우시리란 것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당신을 그저 형보다 늦게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아그네스 영애가 저를 바꿔주신 덕에 제가 보는 세계는 넓어졌고, 제 인간관계는 깊어졌습니다. 제가 살아가는 한순간 한순간이 아그네스 영애가 저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셨기에 만들어진 시간입니다.
다음에 만났을 때 당신 덕분에 완전히 달라진 제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날을 기대하며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파노스 알렉산드로스」
머릿속으로 편지를 쓰며 말하라고 가르쳐드렸더니, 정말 편지 쓰는 실력은 매번 수준급이네요. 어떻게 매번 이렇게 다양한 미사여구가 가득한 편지를 보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상대가 파노스 제2 왕자가 아니었으면 저도 마음껏 로맨틱한 표현에 취할 수 있었겠지만……제가 아는 파노스 알렉산드로스는 미래에 아내에게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로 변모하니까요. 이전에도 말했지만 제가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정성스러운 편지를 받고 무시할 수도 없고, 매번 같은 내용의 답신을 보낼 수도 없어서 결국 저도 다양한 표현을 섞은, 그러면서도 내용은 무심한 답장을 쓰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서고의 책까지 뒤적여가며 편지를 쓰다 보면 주말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 쉴 시간도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아리아나를 만나는 날은 휴식 같은 시간이라서 피곤이 쌓이지 않고, 제이스의 연구를 도와주는 날은 조금 피로하기는 하지만 즐겁기에 스트레스가 해소됩니다.
그리고 부모님도 제가 매일 바쁜 것을 보시고 ‘교육도 중요하지만, 인간관계를 쌓아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주 5회였던 교육을 3회로 줄이시기도 하셨고요. 그렇게 되니 제법 여유가 생겼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생활이 그렇게 길어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현재 일곱 살인 저는 여덟 번째 생일이 머지않았습니다. 열네 번째 생일이 지난 다음 해에는 바로 아스토리아 왕립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기숙사 생활을 하기에 이렇게 하루 단위로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는 일도 없어지게 되겠죠.
기숙사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니콜라스 왕자는 주인공이던 아리아나와던 이어질 테니 저와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 것이고, 파노스 왕자도 학교에서 만나게 되면 편지를 쓰는 일도 없어지겠죠. 제이스는 저보다 한 살 어려서 방학 동안이나 만날 수 있게 될 테고요.
애초에 제이스의 연구를 도와주는 것은 열 살까지입니다. 자신의 연구가 방해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제이스는, 열 살이 되었을 때 먼저 제 도움이 필요 없다 말하지 않을까요.
대한민국에서 초등학교 6학년부터 종합학원에 다니며 입시를 준비했던 제게 있어서 7년 정도의 세월은 금방입니다. 적어도 이 세계는 모의고사 기출문제집도, 야간 자율학습도 없으니까요.
그런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적인 일주일 중, 오늘은 두 번째 요일입니다. 즉, 아리아나가 방문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과연 어떤 간식……이 아니라 니콜라스 왕자와의 약혼을 파기하기 위한 어떤 작전을 세울지 생각하고 있었더니, 마리가 제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리아나가 왔나요? 금방 내려갈게요.”
“아닙니다, 아그네스 님.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네?”
무언가가 어긋나버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응접실에 들어가니 정말로 아리아나가 아닌 니콜라스 왕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아그네스 영애.”
“평안하신가요, 니콜라스 왕자.”
니콜라스 왕자에게 인사를 하고 맞은 편에 앉았습니다. 평소 오던 날이 아닌데 갑자기 방문한 것으로 봐선,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것이 아닐까요? 그게 가능하면 약혼 파기면 더욱더 좋겠네요.
“평소 오시던 날이 아니시네요. 혹시 급하게 전해야 하는 말씀이 있나요?”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사실 오늘은 정치학 수업이 있는 날인데, 강의해주시는 재상께서 국무회의로 수업을 하지 못하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마침 다른 일정도 없어서 사랑하는 약혼자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려고 왔습니다.”
사랑하는 약혼자라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어쩌면 저렇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할 수 있을까요. 아쉽게도 제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방문한 건 아닌 것 같네요.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아리아나가…….
“평안하신가요, 아그네스 님. 그리고……니콜라스 왕자?”
이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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