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영애는 왕자님을 양보하겠습니다-18화 (18/86)

〈 18화 〉 제이스 루바스 : 앙겔로풀로스에서의 첫날 ­3­

* * *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루바스 가문에서 비열한 첫째 형, 나를 믿지 않는 다른 가족들을 경험했기에, 나도 새로 만나는 사람들을 전부 처음부터 믿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 왔던 사람들과 사회는 루바스 가문의 가족들과 사용인밖에 없는 좁은 공간뿐이었는데, 그 공간 안의 사람들이 모든 사람의 대표인 것처럼 판단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비겁하거나 의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며 거리를 벌렸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내가 배신당할까 봐 처음부터 벽을 지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실망하고 배신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기대하거나 믿음을 갖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만난 앙겔로풀로스의 새 가족들을 만나고, 한 번만 다시 누군가를 계산하지 않고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렇다면 연구실을 사용하는 대신, 제이스에게는 새로운 벌을 내리도록 할게요.’

연구실의 폐쇄는 번복됐지만, 어머니는 새로운 처벌을 내게 내리셨다. ‘사용인의 도움 없이 연구실을 원래대로 청소하세요. 완벽하게 돌려놓는 것’ 그것이 내게 내려진 새로운 처벌이었다.

원래의 처벌에 비해서는 훨씬 다행인 이야기다.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내가 정리한다는 점에서도 합리적인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사용인들에게 청소 도구만 빌려서 바로 청소를 시작했다.

우선 타버린 물건들을 정리했다. 기름이 든 유리병은 다행히 깨지지는 않아서 깨끗이 씻어서 말렸다. 다른 재료들은 대부분 타버렸고,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더라도 화재 속에서 재나 열에 의한 손상이 생겼을 수 있으니 과감하게 처분했다. 재료나 도구를 새로 구하는 것이 이제는 어렵지 않으니까.

타지 않은 물건과 타버린 쓰레기를 정리하고, 빗자루로 작업대 위와 바닥의 먼지들을 청소했다. 그 후에는 걸레를 사용해서 다시 작업대 위와 바닥을 닦았다. 작업대의 윗부분이 목재가 아닌 석재였기에 닦기만 하면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걸레질을 적당히 끝내고 나니 어느새 잠자리에 들 시간이 다가왔다. 램프의 불빛에 의존해서 청소를 거의 끝냈으나, 아직 마지막 과정이 남아 있었다. 바로 바닥과 작업대에 남은 그을린 자국을 닦아내는 것이다.

그을린 자국은 걸레질로는 좀처럼 닦이지 않았다. 걸레질을 강하게 수십 번을 문질러야 겨우 조금씩 그을린 흔적이 줄어드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 기세로 하면 몇 날 며칠이 걸려야 전부 다 닦아낼 수 있을지 막막했다.

‘완벽하게 돌려놓는 것’이 처벌이므로 그을린 곳을 남겨놓을 수는 없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없앨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닦고 있는 도중,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제이스? 슬슬 자는 게 어때요?”

연구실의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잠옷 차림의 아그네스 누나였다.

“아, 아그네스 누나.”

아마 늦게까지 자고 있지 않은 내가 걱정돼서 올라온 것 같았다. 아그네스 누나의 말이라면 따라야 하지만, 이 현장을 그대로 두고 일어나기에는 기분이 찝찝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하면 안 되겠습니까.”

“후후,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저도 도와드릴게요.”

왠지 아그네스 누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기대해버렸다. 실제로도 도와주겠다고 한 것은 고마웠지만,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기에 곧이곧대로 호의를 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혼자서 정리하라고…….”

“정확히는 ‘사용인의 도움 없이’ 정리하라고 하셨죠. 전 사용인이 아니니까 해당하지 않잖아요? 청소를 끝낼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가져왔어요.”

확실히 아그네스 누나는 사용인이 아니니까 어머니가 말씀하신 사람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도 도움을 받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아그네스 누나가 말한 ‘비장의 무기’가 궁금해서 끝까지 거절하지 못했다.

아그네스 누나는 비장의 무기라고 말하며 등 뒤에서 머그잔을 하나 꺼냈다. 김이 나오고 있는 것을 봐선 따뜻한 무언가가 든 상태로 보였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따뜻한 우유에요. 아, 마시라고 가져온 건 아니고요. 이 우유를 그을린 자국에 붓고 3분 정도만 기다려 볼래요?”

그렇게 말한 아그네스 누나는 탄 자국에 우유를 붓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업대를 지켜보는 아그네스 누나의 옆모습을 보면서, 지금까지 했던 무례한 생각에 대해서 고백했다.

“아그네스 누나, 죄송합니다.”

“네? 아, 연구실을 태운 건 죄송할 것 없어요. 오히려 제가 좀 더 지켜봤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그것도 죄송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어째서 이 사람은 항상 미안하고 괜찮다고만 말하는 걸까.

“처음에 앙겔로풀로스에 도착했을 때, 저는 루바스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만든 ‘두근거림의 묘약’을 가로챈 첫째 형이 가문 정치로 저를 밀어냈다고 느꼈습니다.

백작 3남인 제가 어째서 공작의 양자로 입양되었는지 저는 처음에 의아했습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루바스 백작의 ‘두근거림의 묘약’은 유명하니까, 3남인 제가 제조법을 알고 있을 것으로 여기고 그 제조법을 훔치려고 하는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아그네스 누나가 저를 위해 드레스룸을 옮기면서까지 연구실을 만드시는 모습을 보고 그 추측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두근거림의 묘약’을 어느 정도 만들어 건네주고, 제가 새롭게 진행하는 연구 성과는 혼자만 가지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연구실이 불탔을 때, 저를 구해주시고 화내기는커녕 저를 걱정해 주신 아그네스 누나와 제 연구보다 안전을 먼저 생각하시는 새 부모님들을 보고 처음부터 ‘두근거림의 묘약’은 관심도 없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혼자 청소를 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세상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 지식은 작은 책장에 갇혀있을 뿐이었고, 제가 만난 사람은 루바스 가문의 가족들이 전부였습니다.

아마 앙겔로풀로스에 오지 않았다면 평생 사람을 믿지 못하고 몇 평짜리 연구실을 제 세상의 전부로 알고 살았을 겁니다. 저를 깨워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그 이전까지 좋지 않은 마음을 가졌던 것이 죄송합니다.”

이야기를 다 하고 나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다행히 어두워서 참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모든 사람이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아, 슬슬 3분이 지났겠어요.”

확실히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그네스 누나 정도뿐일 것이다. 그렇게 말한 아그네스 누나는 걸레로 작업대 윗부분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을음이 너무나도 쉽게 벗겨지는 모습에 놀랐다.

이렇게 지혜롭고 해박한 지식을 가진 데다가, 그 지식을 적재적소에 완벽하게 활용할 줄도 아는 아그네스 누나조차 전혀 자만을 부리지 않고 겸손한데, 약재를 다루는 것에 대해 조금 많이 배웠다고 오만했던 과거의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어때요? 정말 쉽죠? 나머지 부분도 이렇게 끝내버리도록 하죠.”

아그네스 누나가 말할 때 무심코 걸레를 든 오른손으로 눈이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발견했다. 아그네스 누나의 오른손에 난 화상 자국을.

“아그네스 누나, 그 손은…….”

아그네스 누나도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봤다. 아그네스 누나는 의아해하며 자신의 오른손을 보다가, 표정이 잠깐 굳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 눈치를 보니 화상을 입었다는 것을 아그네스 누나도 지금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그네스 누나는 놀라거나 하지 않고, 잠시 생각하더니 침착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 이 상처는 제가 작년에 몰래 주방에 들어갔다가 입은 상처에요. 그래서 제이스에게도 이런 상처가 생길까 봐 불을 사용할 때는 조심하라고 말했던 거랍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들켰네요.”

그 말을 듣자마자 더는 눈물이 새 나오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말이 내게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기 위해 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잡았던 아그네스 누나의 손은 화상 자국 같은 건 전혀 없는 부드러운 손이었으니까.

“그렇……습니까.”

아그네스 누나는 오늘 나를 처음 만나자마자, 막무가내였던 내 어리광을 들어주고,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도와주고, 내 심정을 대신해서 부모님을 설득해주고, 마지막에는 나 때문에 입은 상처까지도 감추었다. 심지어 뻔한 거짓말이면 내가 믿지 않을까 싶어 일부러 자신의 치부를 섞은 이야기를 만들어서까지.

“그, 그럼 따뜻한 우유는 여기에 둘게요. 나머지 부분은 스스로 닦아보세요.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잘 자고 내일 아침에 봐요, 제이스.”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당황한 아그네스 누나는 서둘러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덕분에 아그네스 누나의 눈치 없이 실컷 울 수 있었다. 흘릴 만큼 눈물을 흘리고 나서 결심했다.

아그네스 누나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연구할 것이다. 내가 아그네스 누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니까.

우선은 ‘화상 치료의 물약’부터 시작하자.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