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제이스 루바스 : 앙겔로풀로스에서의 첫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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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한 뒤의 연구실 제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그네스가 집사장에게 드레스룸의 물건을 빈방으로 옮기고, 드레스룸은 연구실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달라고 말하고, 식사하고 나오니 정말로 넓고 완벽한 연구실이 완성되어 있었다.
“정말로 이곳이 제 작업실입니까. 믿기지 않습니다.”
연구실을 처음 보자마자 너무 완벽한 시설에 감탄이 나왔다. 루바스 가문에서 적당히 있는 것들을 모아서 스스로 만들었던 연구실과는 차원이 달랐다.
“램프, 유리관, 돋보기, 절단기 등 일단 필요하시리라 생각되는 물건은 대부분 갖추어 놓았습니다.”
“부족한 물건이 있으면 더 말해도 괜찮아요. 창고에서 가져오거나, 필요하다면 사줄게요.”
이 말을 들은 시점에서 확신했다. 단시간에 완벽하게 만들어진 연구실, 무언가를 원하는 듯이 계속해서 준비하려고 하는 아그네스. 분명 내가 ‘두근거림의 묘약’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져온 짐에도 챙겨온 것이 많습니다.”
그래도 좋다. ‘두근거림의 묘약’을 어느 정도 만들어 주는 대가로 이 정도의 시설을 사용할 수 있다면 만족한다. 적어도 루바스의 좁고 어두운 연구실과 비교하면 훨씬 낫다.
“연구실도 완성됐으니 이제 제이스가 쓰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사용하세요. 지금부터 사용할 건가요?”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하루는 제 방에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니까, 일이 생기면 제 방문을 두드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그네스 누나. 이렇게까지 도움을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뭐, 방문을 두드릴 일은 없겠지만. 아그네스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우선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새로운 약을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두근거림의 묘약’을 먼저 만들어 놓는 편이 좋겠다. 내가 ‘두근거림의 묘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이 연구실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우선 방으로 내려가서 가져온 짐들을 풀었다. 허밍씨슬의 씨앗과 기름, 티리아 잎, 얌과 그 추출물, 말린 포르티아, 석이버섯 가루……가져왔던 것이 많았기에 꺼내서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많이 소모됐다.
꺼내서 진열해 놓은 짐 가운데 허밍씨슬에서 직접 뽑아낸 기름이 가득 든 병, 5.5cm*5.5cm로 재단한 티리아 잎 묶음, 얌 추출물, 그리고 약간의 광물 가루를 챙겼다. ‘두근거림의 묘약’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재료들이었다.
가져온 재료들을 3층의 연구실로 옮긴 뒤 작업대 위에 진열했다. 그리고 ‘두근거림의 물약’을 만드는 법을 다시 정리했다. 이미 수십 번은 사용한 제조법이라서 머릿속에 금방 떠올랐다.
‘두근거림의 묘약’을 만들기 위해 우선 재단한 티리아 잎을 한 장 꺼냈다. 티리아 잎을 적정량의 허밍씨슬 기름에 담그고, 그것을 끓이기 위한 램프를 준비했다. 루바스에서 사용하던 램프의 화력을 생각하며 램프에 불을 붙이는 순간, 예상보다 너무 강한 화력에 놀라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면서 작업대에 발을 강하게 부딪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발에 남은 아픔을 채 느끼기도 전에 정신을 차리고 작업대 위를 보니, 허밍씨슬 기름이 든 병이 넘어지고 있었다. 손을 뻗어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허밍씨슬 기름은 불이 붙은 램프 위로 쏟아졌고, 병에 든 기름이 작업대 전체로 퍼지면서 불길이 치솟았다.
‘아무리 조심해서 다룬다고 해도 실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어요.’
순간적으로 아그네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당당하게 조심하겠다고 말하자마자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화재를 일으켜 버렸다. 아그네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고민이었지만 가장 급한 것은 눈앞의 불을 진화시키는 것이다.
작업대의 수도에서는 물이 나오지만, 하필 기름에 붙은 불이라 물을 부어서는 끌 수 없다. 밖에 도움을 요청하러 나가야 하지만 작업대 전체에 퍼진 불길이 출입문을 향한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불길이 더 커지기 전에 화상을 입을 것을 감수하고 넘어가서 문으로 향하려고 할 때, 문이 열렸다.
“어어?!”
문을 열고 등장한 것은 아그네스였다. 아그네스는 잠시 당황하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제이스! 제이스, 어디 있나요!”
“아그네스 누나!”
아그네스에게 대답해서 내가 있는 위치를 말했다. 정황을 모르는 아그네스는 물을 이용해서 불을 끄라고 말했다.
“물을 뿌려요! 상수도가 있잖아요!”
“허밍씨슬 기름에 붙은 불입니다! 물로 꺼지지 않습니다!”
기름에 붙은 불이라는 말을 듣더니, 아그네스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이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불을 끌 물건을 가지고 올게요! 위험한 행동은 하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한 아그네스는 다시 문을 열고 사라졌다.
불을 끌 도구를 가져온다고 했는데, 무엇을 가져오려고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작은 불이라면 이불을 덮어서 끄면 되지만 이 정도 크기의 불을 끄려고 어떤 도구를 가져오겠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좀처럼 믿음이 가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불길이 작을 때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 아니에요. ‘일어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미 한 번 아그네스는 불이 날 것을 예상했고, 나는 그것을 부정했다가 불을 내버렸다. 여기에서 다시 아그네스를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콜록, 콜록!”
불길은 점점 커져서 이제는 넘어가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번졌다. 검은 연기 때문에 눈이 맵고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1분, 2분, 3분…… 아래층이나 창고를 다녀오는 거라면 진작에 다녀왔을 시간이다. 역시 믿지 말았어야 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아그네스가 다시 나타났다.
십여 명의 사용인들과 양손에 양배추를 들고서.
“제이스! 아직 무사한가요!”
“아직은, 콜록, 콜록, 무사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움직일 힘도 없다. 그저 아그네스가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는 수밖에.
“여러분! 양배추를 한 장씩 뜯어서 불길에 던져주세요!”
그렇게 아그네스가 말하고, 사용인들은 손에 든 양배추를 뜯어서 불길을 향해 던졌다. 검붉은 불길이 하얀 수증기로 바뀌면서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한순간의 엄청났던 불길이 무색하게 양배추 몇십 포기로 화재는 진압됐다.
“제이스!”
아그네스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분명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불조심하라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당연하다.
“죄송합니다, 아그네스 누나. 저를 믿고 공간을 만들어 주셨는데 하루도 안 돼서 약속을 어기고……”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당연히 혼낼 것으로 생각했던 아그네스는, 갑자기 나를 꽉 안았다. 왜 화내거나 혼내지 않는 것인지 의아해서 물었다.
“혼내지 않으시나요.”
“괜찮아요. 불이 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기름에 붙은 불에 물을 붓지도 않았고, 불이 꺼질 때까지 무서웠을 텐데 잘 버텨주었어요.”
아그네스는 내 부주의로 생긴 화재인데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위로했고, 오히려 물을 붓거나 하지도 않고 잘 기다렸다는 것을 칭찬했다.
……처음으로 아그네스……누나가 가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죠. 방을 청소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아그네스 누나의 손에 이끌려 연구실의 밖으로 나오니, 심각한 표정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셨다.
엄한 표정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불이 났던 경위를 설명했다. 우선 아그네스 누나가 먼저 드레스룸을 연구실로 개조한 것과 잠시 후 들어왔더니 기름에 불이 붙어서 양배추로 진화한 사실을 말했다.
그 뒤로는 내가 부주의하게 연구실을 사용하다가 실수로 허밍씨슬 기름에 불을 붙여서 화재를 일으켰고, 그것을 아그네스 누나가 발견하고 진화했다는 것을 말했다. 어머니는 아그네스 누나와 내 이야기를 전부 듣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내 연구실이 화마로 인해 엉망이 되었지만, 그것보다도 아그네스 누나가 나 때문에 혼나는 것이 아닐까 걱정됐다. 그래서 이번 사건은 온전히 내 잘못이라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이번 화마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아그네스 누나는 소중한 공간을 양보하면서까지 제 연구실을 만들어 주셨고, 화기에 대한 주의도 몇 번이나 주셨는데도 제 부주의로 인해 큰 불길을 일으켰고, 큰 피해가 생겼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제이스가 개인 연구실을 가진다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아직 너무 어리고, 실제로 사고가 발생했기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요.”
“연구실은 그대로 두고, 제이스가 열 살이 되었을 때부터 다시 사용하는 것은 어떠니. 그때쯤이라면 화기를 사용해도 될 것 같구나.”
“맞는 말씀입니다.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새 부모님들은 사고가 발생했던 것을 걱정하며 크게 혼내지 않는 선에서 처벌로 열 살까지 연구실 금지령을 내렸다. 모처럼 만든 연구실을 몇 년 동안은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쉽지만, 내 잘못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님, 어머님. 감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했을 때, 아그네스 누나가 말했다.
“제이스는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벌써 허밍씨슬에서 기름을 뽑아내고, 얌에서 추출물을 골라낼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미 ‘두근거림의 물약’이라는 성과도 낼 정도의 재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리한 동생이 열 살까지 연구하지 못하는 것은 장래를 보면 큰 손실입니다.”
아그네스 누나는 갑자기 내 처지를 생각해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변했다. 아그네스가 내 심정을 대변해준 것도 고마웠지만, 허밍씨슬 기름을 내가 뽑고 얌에서 추출물을 내가 골라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기분이 좋았다.
루바스 가문에서는 내가 직접 ‘두근거림의 묘약’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도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내 성과를 누군가가 인정해 준 기분이 들었다.
“아그네스의 부탁이라도, 아무런 제약 없이 제이스에게 연구실을 사용하게 할 순 없어요.”
“지식보다는 안전이 먼저다.”
게다가 새 부모님들은 연구실의 금지를 순전히 내 안전 때문에 제약하고 계셨다. 내게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나를 입양한 것이 아닌, 그저 새로운 자식으로 대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이 나올 뻔했다.
“제이스, 물약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 불이 필요하지는 않죠?”
“네……재료를 수집하고 선별하거나, 재단하고 보관하거나, 말려서 가루를 내는 등 대부분 작업은 가열 없이 진행합니다.”
아그네스 누나는 내게 물약을 만드는 과정을 물었다. 물약을 만든다고 하면 하루 내내 끓이고 볶는 것만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재료의 선별이나 재단, 계량, 정제 등을 할 때는 불이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지 제안하겠습니다. 연구실은 그대로 사용하되, 일주일 중 6일은 화기를 사용하지 않는 작업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가열이나 등의 화기가 필요한 작업은 일주일에 하루만 합니다. 제가 매주 넷째 요일에 마리와 함께 제이스의 연구에 동석해서 감시하고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예방하겠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던 건지, 아그네스 누나는 어떻게든 내 연구실을 유지할 수 있도록 부모님께 이야기했다.
“그렇게 한다면 걱정은 많이 줄겠다만…….”
“아그네스는 괜찮겠어요? 지금도 매우 바쁘죠? 저번 주에도 일주일 중 하루밖에 못 쉬었잖아요.”
부모님은 아그네스 누나의 바쁜 일정을 걱정하고 계셨다. 처음 만났을 때의 느긋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굉장히 빠듯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듯하다.
아마 아그네스 누나 같은 사람이면 주변에서 다가오는 사람이 많을 테니, 쉴 틈이 없다는 것도 이제는 이해가 간다.
“괜찮아요. 별로 힘든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귀여운 남동생과 같이 지내는 시간은 휴식이나 마찬가지인걸요.”
하지만 아그네스 누나는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휴식이라면서 내 손을 잡았다. 아그네스 누나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부모님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아그네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어쩔 수 없네요.”
“제이스도 그걸로 괜찮겠니?”
“저에게는 정말로 감사한 제안입니다.”
“그렇다면 일주일 중 매주 네 번째 요일, 아그네스가 동석하는 때만 한정하여 화기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으로 연구실 사용을 허락할게요. 대신 아그네스가 뺄 수 없는 일정이 생겨서 동석하지 못하게 됐을 때는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요.”
“잘됐네요, 제이스!”
“네……정말 감사합니다, 아그네스 누나.”
결국, 다시 아그네스 누나에게 도움을 받아 연구실의 사용 허가를 다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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