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부모님을 설득했습니다
* * *
“아그네스. 제이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해 주겠어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혼내실 때의 목소리로 바뀌었습니다. 먼저 제 드레스룸이 제이스의 연구실로 바뀌게 된 경위부터 설명해야겠죠.
제이스가 빈방을 연구실로 개조하고 싶다고 했던 것, 제가 화재나 환기 등의 이유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던 것, 제 드레스룸을 빈방으로 옮기고 그곳에 연구실을 만든 것, 제이스가 연구실을 사용하게 두고 내려온 것에 관해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러고 제이스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올라왔고, 기름에 붙은 화재를 발견해서 양배추로 진화했습니다.”
“그러면 여기는 이제 아그네스의 드레스룸이 아닌 거니?”
“네, 그렇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 많은 옷이 타버렸으면 다시 마련하는 데 고생했겠어요.”
“기름에 붙은 불인데도 잘 대처했구나. 잘못해서 물을 부었으면 더 크게 번질 수도 있었으니.”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닙니다. 충분히 예상했던 화재인데도 막지 못했으니까요.
“제이스. 아그네스 누나가 나가고 불이 붙기까지의 경위를 설명해 주시겠어요?”
“…네.”
제이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연구실이 완성된 후 저는 들떠 있었습니다. 우선 가져온 짐 중 루바스 가문에서 가져온 재료들을 가져왔습니다. 허밍씨슬에서 직접 뽑아낸 기름이 가득 든 병과, 5.5cm*5.5cm로 재단한 티리아 잎 묶음, 얌 추출물 등의 타기 쉬운 재료들이 많았습니다.
루바스 가문에서 만들었던 ‘두근거림의 묘약’을 재현하기 위해 우선 허밍씨슬 기름에 재단한 티리아 잎을 담그고 끓여야 했습니다. 끓이기 위해 램프에 불을 붙이는 순간 제가 이전에 사용했던 램프보다 불길이 거세서 그만 놀라 뒤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허밍씨슬 기름이 든 병을 엎질러 버렸고, 그 기름에 불이 붙어 작업대 전체로 번지고 말았습니다.
불길이 순식간에 치솟아서 출입구로 나갈 수 없게 됐을 때, 아그네스 누나가 들어오셨습니다. 이후는 아그네스 누나가 말씀하신 대로 사용인들과 함께 양배추를 던져서 불길이 소화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어머님이 사건의 경위를 듣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심각한 표정을 하고 계신 것을 보니, 잘못하면 이 사건 때문에 제이스의 연구실이 폐쇄될지도 모릅니다.
원작 게임에서는 이렇게까지 크게 번진 불도 아니었고, 마침 부모님이 집을 비운 날에 발생했던 화재였기에 제이스가 혼자서 화재를 무마했던 게 가능했지만, 상식적으로 이 정도 규모의 큰 화재를 일으키면 저희 부모님이 처벌하지 않으실 리가 없죠.
“이번 화마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아그네스 누나는 소중한 공간을 양보하면서까지 제 연구실을 만들어 주셨고, 화기에 대한 주의도 몇 번이나 주셨는데도 제 부주의로 인해 큰 불길을 일으켰고, 큰 피해가 생겼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제이스가 개인 연구실을 가진다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아직 너무 어리고, 실제로 사고가 발생했기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요.”
“연구실은 그대로 두고, 제이스가 열 살이 되었을 때부터 다시 사용하는 것은 어떠니. 그때쯤이라면 화기를 사용해도 될 것 같구나.”
“맞는 말씀입니다.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흘러가면 곤란한데요. 열 살부터면 아스토리아에 입학하기까지 5년 정도밖에 연구할 시간이 없습니다. 니콜라스 왕자를 공략하는 데 필요한 물약이 개발되지 않을 수도……대책이 필요하겠네요.
“아버님, 어머님. 감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보렴.”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이스는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벌써 허밍씨슬에서 기름을 뽑아내고, 얌에서 추출물을 골라낼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미 ‘두근거림의 묘약’이라는 성과도 낼 정도의 재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리한 동생이 열 살까지 연구하지 못하는 것은 장래를 보면 큰 손실입니다.”
“아그네스의 부탁이라도, 아무런 제약 없이 제이스에게 연구실을 사용하게 할 순 없어요.”
“지식보다는 안전이 먼저다.”
이번에는 사랑하는 딸의 부탁으로도 쉽게 넘어가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좋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제이스, 물약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 불이 필요하지는 않죠?”
“네……재료를 수집하고 선별하거나, 재단하고 보관하거나, 말려서 가루를 내는 등 대부분 작업은 가열 없이 진행합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지 제안하겠습니다. 연구실은 그대로 사용하되, 일주일 중 6일은 화기를 사용하지 않는 작업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가열 등의 화기가 필요한 작업은 일주일에 하루만 합니다. 제가 매주 넷째 요일에 마리와 함께 제이스의 연구에 동석해서 감시하고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예방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제이스의 연구도 지장이 생기지 않고, 덤으로 제가 연구의 진척상황을 보면서 세부적인 계획을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걱정은 많이 줄겠다만…….”
“아그네스는 괜찮겠어요? 지금도 매우 바쁘죠? 저번 주에도 일주일 중 하루밖에 못 쉬었잖아요.”
확실히 요즘 제 일정은 일 단위로 거의 가득 차 있긴 합니다.주 3회씩 방문하는 니콜라스 왕자의 상대, 아리아나와는 다음 주에도 일정이 잡혀 있고, 여기서 매주 네 번째 요일마다 제이스의 연구를 도와주면 일주일 중 4~5일이 빠질 수 없는 일정으로 차게 되겠죠.
“괜찮아요. 별로 힘든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이 제이스의 물약 연구니까요.
“그리고 귀여운 남동생과 같이 지내는 시간은 휴식이나 마찬가지인걸요.”
이 정도로는 이해하시기에 조금 부족할 것 같아서 제이스의 손을 잡으며 부가적인 핑계까지 덧붙였습니다. 그렇게까지 하고 나니 비로소 부모님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아그네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어쩔 수 없네요.”
“제이스도 그걸로 괜찮겠니?”
“저에게는 정말로 감사한 제안입니다.”
“그렇다면 일주일 중 매주 네 번째 요일, 아그네스가 동석하는 때만 한정하여 화기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으로 연구실 사용을 허락할게요. 대신 아그네스가 뺄 수 없는 일정이 생겨서 동석하지 못하게 됐을 때는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요.”
“잘됐네요, 제이스!”
“네……정말 감사합니다, 아그네스 누나.”
일단 이걸로 해결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괜히 이벤트의 일정을 앞당겼다가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겠네요.
“그렇다면 연구실을 사용하는 대신, 제이스에게는 새로운 벌을 내리도록 할게요.”
잠자리에 눕기 전, 제이스의 연구실에 살짝 올라가 보았습니다. 연구실 안에서 제이스는 걸레를 사용해서 열심히 작업대의 그을음을 닦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연구실 사용을 중지하는 대신 내린 벌은 ‘사용인의 도움 없이 연구실을 원래대로 청소하세요. 완벽하게 돌려놓으면 다시 사용하는 것을 허락할게요.’ 였습니다. 제이스는 그 말을 듣고 오늘 저녁을 먹자마자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타버린 물건들은 대부분 정리가 끝난 것 같지만, 불길로 인해 그을린 흔적을 지우는 것은 역시나 애를 먹고 있었네요.
“제이스? 슬슬 자는 게 어때요?”
“아, 아그네스 누나.”
램프에 의존한 불빛으로 열심히 걸레질하던 제이스가 고개를 들고 말했습니다. 조금 졸려 보이는 눈빛이지만 아직 끝내고 싶지는 않은 표정이네요.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할 것 같아서 준비해 온 것이 있습니다.
“후후,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저도 도와드릴게요.”
“하지만 어머니께서 혼자서 정리하라고…….”
“정확히는 ‘사용인의 도움 없이’ 정리하라고 하셨죠. 전 사용인이 아니니까 해당하지 않잖아요? 청소를 끝낼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가져왔어요.”
제이스에 눈앞에 준비해 온 물건, 마리에게 잠이 안 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받은 따뜻한 우유를 꺼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따뜻한 우유에요. 아, 마시라고 가져온 건 아니고요. 이 우유를 그을린 자국에 붓고 3분 정도만 기다려 볼래요?”
전생에 라면 냄비를 받침 없이 내려놓았다가 탄 자국이 난 적이 있었으니까요. 그때 검색으로 알게 된 지식이, 따뜻한 우유를 부어서 충분히 기다린 후 문지르면 그을음이 사라진다는 지식입니다.
작업대의 위쪽은 석재라서 크게 피해가 없으니 다행이네요. 아마 목재였다면 이 정도로 수복하는 것은 힘들었겠죠. 우유를 붓고 충분히 스며들 때까지 잠시 경과를 지켜봤습니다.
“아그네스 누나, 죄송합니다.”
“네? 아, 연구실을 태운 건 죄송할 것 없어요. 오히려 제가 좀 더 지켜봤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그것도 죄송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제이스가 말을 이었습니다.
“처음에 앙겔로풀로스에 도착했을 때, 저는 루바스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만든 ‘두근거림의 묘약’을 가로챈 첫째 형이 가문 정치로 저를 밀어냈다고 느꼈습니다.
백작 3남인 제가 어째서 공작의 양자로 입양되었는지 저는 처음에 의아했습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루바스 백작의 ‘두근거림의 묘약’은 유명하니까, 3남인 제가 제조법을 알고 있을 것으로 여기고 그 제조법을 훔치려고 하는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아그네스 누나가 저를 위해 드레스룸을 옮기면서까지 연구실을 만드시는 모습을 보고 그 추측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두근거림의 묘약’을 어느 정도 만들어 건네주고, 제가 새롭게 진행하는 연구 성과는 혼자만 가지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연구실이 불탔을 때, 저를 구해주시고 화내기는커녕 저를 걱정해 주신 아그네스 누나와 제 연구보다 안전을 먼저 생각하시는 새 부모님들을 보고 처음부터 ‘두근거림의 묘약’은 관심도 없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혼자 청소를 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세상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 지식은 작은 책장에 갇혀있을 뿐이었고, 제가 만난 사람은 루바스 가문의 가족들이 전부였습니다.
아마 앙겔로풀로스에 오지 않았다면 평생 사람을 믿지 못하고 몇 평짜리 연구실을 제 세상의 전부로 알고 살았을 겁니다. 저를 깨워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그 이전까지 좋지 않은 마음을 가졌던 것이 죄송합니다.”
이런 속마음을 듣게 될 거라곤 예상 못 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사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요.……그게 언제였을까요.
“괜찮아요. 모든 사람이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아, 슬슬 3분이 지났겠어요.”
아마 나중에 기억이 나겠죠. 그보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청소입니다. 걸레를 하나 들어 우유를 부었던 부분을 문지르고 나니, 그을음이 쉽게 벗겨졌습니다.
“어때요? 정말 쉽죠? 나머지 부분도 이렇게 끝내버리도록 하죠.”
“아그네스 누나, 그 손은…….”
제이스가 제 오른손을 가리키며 말하기에 저도 제 오른쪽 손을 보았더니……작지 않은 화상이 생겼다는 사실을 방금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아까 연구실 화재 진화과정에서 생긴 것이겠죠. 정신없어서 당시에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종래 화상 이벤트를 완전히 피해 가지는 못했네요.
그래도 연구해야 하는 제이스의 손에 화상이 생기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겠죠. 그것보다도 제이스가 이 상처를 신경을 쓰거나 하지 않으면 좋겠는데요.
“이, 이 상처는 제가 작년에 몰래 주방에 들어갔다가 입은 상처에요. 그래서 제이스에게도 이런 상처가 생길까 봐 불을 사용할 때는 조심하라고 말했던 거랍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들켰네요.”
사람을 속일 때는 다소 창피한 이야기를 섞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자기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이렇게 말했는데 갑자기 제이스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뭐죠, 갑자기?! 여섯 살 남자아이의 심리는 이해하기 어렵네요.
아, 혹시 제가 그을음을 너무 쉽게 지워버려서 분한 게 아닐까요? 지금까지 자신의 고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슬퍼진 것이겠죠. 이럴 때는 어쭙잖은 위로보다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는 게 상책입니다.
“그, 그럼 따뜻한 우유는 여기에 둘게요. 나머지 부분은 스스로 닦아보세요.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잘 자고 내일 아침에 봐요, 제이스.”
조금 죄책감이 들었지만 울고 있는 제이스를 두고 서둘러 연구실을 나왔습니다. 다른 그을음을 스스로 닦으면서 기분이 좀 풀리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네요. 저는 우는 아이 달래는 것은 재능이 없으니까요.
제이스에게 그을음 닦는 법을 알려주고, 침대에 누워서 아까 제이스가 했던 대사를 되새겼습니다. 전생에 했던 『사랑과 운명 ~아스토리아~』의 제이스 루트를 회상하면서요.
주인공이 제이스를 처음 만나고, 물약상인이 제이스임을 알게 되고, 인간불신이 된 제이스에게 다가가고, 위험한 순간에 희생해서 제이스를 구해주고, 제이스가 주인공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아! 이쯤에서 말했던 것 같네요.
‘저는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세상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 지식은 작은 책장에 갇혀있을 뿐이었고, 제가 만난 사람은 루바스와 앙겔로풀로스 가문의 사람이 전부였습니다.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사람을 믿지 못하고 두 평짜리 연구실을 제 세상의 전부로 알고 살았을 겁니다. 저를 깨워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그 이전까지 당신을 오해했던 것을 사과드립니다.’
이 대사에요, 이거. 오늘 제이스가 했던 대사와는 약간 다르지만 거의 맞다고 봐도 되겠죠. 그러니까 이 대사가 분명, 제이스가 주인공에게 공략된 직후 인간불신이 해소되는 장면에서 하는 대사였는데요.
근데 오늘 이 대사를 했다는 것은……설마.
…
……
…….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이스의 인간불신이 해소되었네요. 그렇다면 앞으로 제이스가 마음을 열어줘서 더 친해질 수도 있겠네요. 여러 가지 예기치 못한 변수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만 한가득합니다.
궁금증이 해소되고 나니 마음도 가벼워졌습니다. 오늘 밤은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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