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영애는 왕자님을 양보하겠습니다-14화 (14/86)

〈 14화 〉 연구실을 만들었습니다

* * *

“아그네스 아가씨의 드레스룸을 옆에 빈방으로 옮기고, 드레스룸 자리는 제이스 도련님의 연구실로 사용하시겠다고요?”

휴게실에 방문하여 집사장에게 제 드레스룸 위치를 옮기겠다고 말하니,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네. 혹시 시간이 오래 걸릴까요?”

“아닙니다. 마침 곧 점심시간이니 식사하고 나오신 후에는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다행이네요, 제이스.”

“네. 감사합니다. 아그네스 누나. 라이언 씨.”

제이스는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기쁨을 감추지 못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다만, 아가씨. 남동생이 생기셨다고 너무 들뜨셔서 응석을 너무 받아주시는 건 아닙니까?”

“하지만 연구실을 만들려면 환기가 잘 되고 출입문이 복수인 방이 좋지 않나요?”

“제 말씀은 제이스 도련님의 연구실을 만드는 것 자체에 대한 말씀입니다만.”

리…라이언은 아직 여섯 살인 제이스가 미심쩍은 눈치네요. 하지만 이 아이는 아스토리아에 입학하기까지 9년 동안 십여 가지의 유용한 아이템을 발명합니다. 제게 마땅히 필요한 것들이기도 하고요.

“최근의 아그네스 아가씨께서는 성격도 많이 좋아지셨고,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님의 영향을 받으셔서인지 현명하시므로 이것도 아마 중요한 뜻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이스 도련님. 화기와 날붙이를 다루는 일은 항상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네. 그것은 아그네스 누나에게도 주의받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저는 다른 시종들과 함께 정리를 시작할 테니, 두 분께서는 식사를 마치고 오십시오.”

“잘 부탁드릴게요, 리…라이언.”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제이스와 함께 식당을 나와 3층으로 향했습니다.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요리는 제이스의 입맛에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아그네스 누나. 감사합니다.”

계단을 오르는 중에, 제이스가 말했습니다.

“만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저를 위해서 연구실을 만들어 주시고, 드레스룸의 공간도 양보해 주시고, 직접 사용인에게 부탁까지 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귀여운 남동생의 부탁이니까요.”

“그건 제가 정말로 아그네스 누나의 남동생이 되어서입니까.”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요?”

“일단 그렇게 알겠습니다.”

제이스는 이번에도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제가 뭔가 나쁜 스위치를 건드린 걸까요.

“오셨습니까, 아그네스 아가씨. 제이스 도련님.”

“제이스의 연구실은 완성됐나요? 잠깐 봐도 될까요?”

“방금 막 정리를 끝낸 참입니다.”

연구실(전 드레스룸)을 열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크고 넓은 작업대, 벽의 한쪽에는 서적이나 도구를 진열할 수 있는 책장이 몇 개, 반대쪽 벽에는 벽의 절반 정도 크기를 메운 칠판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천으로 되어 있던 커튼은 나무로 된 블라인드로 바뀌어 있었고, 가장 놀라운 것은

“물이……나오네요?”

작업대 한쪽 끝에 설치된 상수도와 배수구였습니다. 드레스룸으로 사용했을 때는 이런 건 없었는데요. 무슨 원리로 몇 시간 만에 3층으로 상수도를 설치한 거죠?

“젊었을 때는 배관공으로 일한 적도 있었죠.”

라이언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한편 제이스의 반응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니 제이스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이곳이 제 작업실입니까. 믿기지 않습니다.”

“램프, 유리관, 돋보기, 절단기 등 일단 필요하시리라 생각되는 물건은 대부분 갖추어 놓았습니다.”

“부족한 물건이 있으면 더 말해도 괜찮아요. 창고에서 가져오거나, 필요하다면 사줄게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져온 짐에도 챙겨온 것이 많습니다.”

벌써 설레는지 표정에 금방이라도 뛰어놀고 싶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 가득합니다.

“연구실도 완성됐으니 이제 제이스가 쓰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사용하세요. 지금부터 사용할 건가요?”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하루는 제 방에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니까, 일이 생기면 제 방문을 두드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그네스 누나. 이렇게까지 도움을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제이스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저는 제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제이스의 작업실도 완성됐고, 이제 오늘 하루는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면 되겠죠. 제 방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앉아, 마리가 타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서고에서 가져온 ‘프레타리아어 교본’을 펼쳤습니다.

……예상대로 쉽지는 않네요. 스타렌스어는 전생의 영어와 비슷해서 이치를 깨닫고 난 후에는 제법 배우기가 어렵지는 않았는데, 프레타리아어는 지금까지 배웠던 언어들과는 어순도 다르고, 글자도 다릅니다. 게다가 한 문장에서 모든 글자가 이어지듯이 써지기 때문에 구분하기도 해석하기도 힘들고, 띄어쓰기도 없습니다.

3페이지밖에 못 읽었는데 벌써 뇌가 과부하 상태입니다. 오늘은 일단 쉬도록 하죠. 제이스가 오는 날이라 아침부터 많은 일이 있었고, 방금까지도 이것저것 진행하느라 피곤한 상태니까요.

프레타리아어를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요. 아리아나에게 배우는 것을 부탁하기에는 만나는 빈도가 일정하지 않을 것 같고, 마리도 외국어는 약하다고 하니 일단은 독학으로 부딪쳐야겠죠.

복잡한 언어를 보고 지친 뇌에 휴식을 줄 겸, 앞으로 생길 주요 이벤트를 정리해 봤습니다.

우선 제이스의 연구실을 만드는 이벤트는 끝났습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제이스가 입양된 후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만드느라 일주일의 시간이 걸리지만, 모두의 도움 덕에 오늘 중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면 주요 물약들의 개발도 일주일 정도 앞당길 수 있겠지요.

그리고 바로 일주일 뒤 화재 이벤트가 있습니다. 제이스가 연구실에서 실수로 넘어뜨린 램프로 인해 발생하는 화재이고, 이 사건에서 제이스가 오른쪽 팔에 큰 화상을 입습니다.

일주일이라면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괜찮겠죠. 만일을 대비해서 일주일 후의 앞뒤 날까지는 제가 혹시라도 발생할 화재를 대비해 둘 거고요. 팔에 화상을 입지 않으면 물약 개발이 더 빨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오늘은 마음을 내려놓고 공부보다는 즐거운 독서를 하죠.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프레타리아어 교본과 같이 들고 온 ‘사랑과 마음’이라는 제목의 소설책을 펼쳤습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이 세계의 소설이라는 것도 제법 재미있네요. 자신의 약혼자를 사랑하고 있는 왕자님과 그런 왕자님의 마음을 모른 채 자신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며 파혼하려고 하는 영애의 밀고 당기는 연애 소설이었습니다. 서로의 시점을 바꿔가면서 오해가 쌓이는 과정이 익살스럽고 서로의 감정에 대한 묘사가 다채로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요.

책을 다 읽고 나니 문득 제이스의 연구가 잘 되는지 궁금해지네요. 인간에 대한 의심이 많은 아이라서 아마 훔쳐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몰래 올라가서 살짝만 보고 오기로 하죠.

그렇게 생각하며 3층으로 올라오니 무언가 타는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약초를 태워서 재를 내는 건지, 기름을 태우고 있는 건지 문을 살짝 열어보니, 문 앞에서 바로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문 너머에 있는 광경은,

넓은 작업대 위에 퍼져서 타오르고 있는 불길이었습니다.

“어어?!”

어째서죠? 분명 제이스의 화재 이벤트는 앙겔로풀로스에 입양된 후 일주일 후일 텐데요? 제이스가 일주일 동안 열심히 만든 연구실을 처음 사용한 날에 발생할……아.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불이 나는 것은 ‘앙겔로풀로스에 입양된 후 일주일’이 아니라, ‘연구실을 처음 사용한 날’이었습니다.

“제이스! 제이스, 어디 있나요!”

정신을 차리고, 제이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화재에 휘말려서 목숨이 위험해지면 문제가 생기니까요. 니콜라스 왕자와 파혼하는 데 필요한 것도 물론 있지만, 새롭게 생긴 남동생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큽니다.

“아그네스 누나!”

작업대의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작업대 전체에 퍼진 불길 때문에 문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이런 일이 발생할까 봐 일부러 출입문이 2개인 방을 연구실로 만들었는데, 결국 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길에 고립되어 버렸습니다.

“물을 뿌려요! 상수도가 있잖아요!”

“허밍씨슬 기름에 붙은 불입니다! 물로 꺼지지 않습니다!”

하필이면 기름에 붙은 불이라니요. 불을 어떻게 꺼야 할지 고민하다가, 전생의 지식이 떠올랐습니다.

“제이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불을 끌 물건을 가지고 올게요! 위험한 행동은 하면 안 돼요!”

제이스의 연구실을 등지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기름에 불이 붙으면 물을 부어서는 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크게 번지기만 하겠죠.

가장 좋은 방법은 양동이나 이불 등을 덮어서 공기를 차단하여 끄는 방법이지만, 연구대 전체를 덮을 정도로 큰 이불은 없습니다. 오히려 불쏘시개를 넣어 주는 게 될 테고요.

물에 흠뻑 적신 이불을 여러 개 덮으면 효과가 있겠지만, 지금부터 이불을 꺼내서 물을 적시기 시작하면 분명 시간이 늦을 겁니다. 게다가 이불은 2층과 3층에 있고, 수도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은 1층에 있는 욕실과 주방뿐이라서 동선도 번거로워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사용한다면 이미 수분이 있는 물건을 사용해야 합니다.

“마리! 마리!”

“무슨 일이십니까, 아그네스 님.”

서둘러 마리의 숙소에서 대기하고 있는 마리를 불렀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 주방에 가서 양배추를 갖고 와야 해요. 최대한 많이!”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져가야 합니까.”

“3층이요!”

주방으로 내려가면서 만나는 사용인들을 모두 데리고 주방으로 향했습니다. 주방에 도착하여 식자재 창고에서 최대한 많은 양배추를 들고, 다시 3층의 불붙은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제이스! 아직 무사한가요!”

“아직은, 콜록, 콜록, 무사합니다.”

불길은 잠깐 사이 더 커졌습니다. 이산화탄소로 인해 제이스도 위험한 상태인 것 같으니, 최대한 빨리 진압해야 합니다.

“여러분! 양배추를 한 장씩 뜯어서 불길에 던져주세요!”

마리와 저를 포함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양배추를 뜯어서 불길을 향해 던졌습니다. 검은 연기를 내뿜던 불길은 점차 하얀 연기로 바뀌다가,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습니다. 들고 온 양배추를 거의 다 소모하고 나니 그제서야 불길은 완전히 잠잠해졌습니다.

“제이스!”

제이스를 찾기 위해 불길이 사그라든 작업대 건너편으로 넘어가니, 한쪽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제이스를 발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그네스 누나. 저를 믿고 공간을 만들어 주셨는데 하루도 안 돼서 약속을 어기고……”

다행히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나지 않은 것 같네요. 안전을 확인하고 나니 안도감이 피어나서 제이스를 안았습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제이스가 제 품에 안긴 상태로 물었습니다.

“혼내지 않으시나요.”

“괜찮아요. 불이 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기름에 붙은 불에 물을 붓지도 않았고, 불이 꺼질 때까지 무서웠을 텐데 잘 버텨주었어요.”

우선 앉아 있는 제이스를 일으켰습니다.

“일단 밖으로 나가죠. 방을 청소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아버님과 어머님에게도 말씀드려야 하고…라고 생각하고 연구실 문을 열고 나오니, 아버님과 어머님이 서 계셨습니다. ……100% 혼내시기 전 표정이시네요.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