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소년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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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아리아나 세이타리디스로 소개한 영애가 니콜라스 왕자에게 인사를 하며 등장했습니다. 하늘색 긴 생머리와 사파이어 빛 눈동자가 아직 일곱 살인데도 어른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네요. 역시 니콜라스 왕자 루트에서 두 번째 라이벌로 등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네요.
세이타리디스 가문은 후작 집안입니다. 이웃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영지가 상당히 번영하였기에, 부족함 없이 자라온 아리아나 세이타리디스 영애는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드레스와 보석으로 자신을 한껏 치장하고 있습니다.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아리아나 세이타리디스 후작 영애. 오늘 무도회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은 제 약혼자인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공작 영애입니다.”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입니다, 아리아나 세이타리디스 영애.”
“아리아나 세이타리디스입니다,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영애.”
아리아나 후작 영애가 인사를 끝내자마자 제게 시선을 옮겼습니다. 확실하게 제 겉모습을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지고 있네요. 저를 뜯어보던 시선이 끝나자, 아리아나 영애는 다시 니콜라스 왕자에게 말을 걸어 줍니다.
“니콜라스 제1 왕자님께서는 혹시 괜찮으시면 이후 무도회에서 파트너가 없다면 저와 춤춰주실 수 있으신가요?”
역시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내요. 공작 영애가 이렇게 수수하게 꾸민 모습을 보면 누구든지 몰락 귀족이라고 생각하겠죠. 혹여나 몰락 귀족이더라도 왕자의 마음에 들었다면 화려한 드레스를 선물 받아서 참석했을테고요.
즉, 아리아나 후작 영애는 지금 제 옷차림을 보고 가문은 기울고 있으며, 약혼 또한 왕자의 마음에 없다고 생각하여 약혼자인 저를 앞에 두고도 대담하게 왕자에게 작업을 걸 수 있는 겁니다.
“아리아나 후작 영애, 마음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 파트너와 시간을 보내고 있으므로······.”
물론 니콜라스 왕자의 입장으로는 약혼자인 저를 두고 다른 영애와 춤을 춘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죠. 마음이 가는 것을 떠나서 약혼자를 두고 다른 영애와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 평가가 떨어질 테니까요. 그렇기에 여기선 제가 일부러 물러나 줄 필요가 있습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니콜라스 왕자님의 상대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리아나 영애?”
이렇게 얘기를 해 두면 니콜라스 왕자가 막기가 힘들어집니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영애를 멈추거나 따라갈 수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제 정식 요청으로 아리아나 영애에게 떠넘겼으니 거절하면 당연히 제게 수치를 주게 되기도 하고요.
“물론이에요, 아그네스 영애.”
“알겠습니다. 늦지 않게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아그네스 영애.”
무도회의 음악이 시작되고, 두 사람이 춤을 추러 가는 모습을 보고 난 뒤 조용히 홀을 나왔습니다. 고마워요, 아리아나 영애. 저는 니콜라스 왕자를 감당할 수 없어요.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말하긴 하였지만, 실제로는 점심부터 먹은 것이라고는 입술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마신 소량의 물뿐입니다. 당연히 신호가 올 리는 없고, 화장실에 가는 대신 잠시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야겠죠.
아마 메인 홀만 아니면 대부분은 인적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긴 합니다만······.
그러고 보니 니콜라스 왕자가 이전에 정원에 붉은 장미가 아름답게 피었다고 얘기했었죠. 모처럼의 기회이니 한 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왕궁 정원에 들어가니, 한 소년이 정원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선객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와, 왓!”
제 기척을 알아챘을 것이라 예상하고 어쩔 수 없이 인사를 건넸지만, 저쪽은 아예 제 존재를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네요. 소년은 놀라서 벤치에서 앞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저, 저야말로, 죄, 죄, 죄송······.”
니콜라스 왕자보다는 조금 진한 색의 금발에 청금석과 비슷한 파란 눈을 가진 소년이 제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니콜라스 왕자가 떠올랐지만, 그보다 훨씬 더 눈치를 보고 낯을 가리며 당황하고 있는 것 같네요.
“왕가의 정원인가요? 붉은 장미가 아름답네요.”
“그, 그렇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왜 혼자 계셨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제 말에 소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습니다.
“저, 저는 형이 있는데, 저, 정말로 대단하고 멋진 형입니다. 그, 그에 비해 전 보, 보잘것없고 하, 하찮아서……여, 여성분이 말을 거, 걸어도 대답할 자신이 어, 어, 없으니까……이곳이라면 누,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아서······.”
형제의 능력을 비교당해서 자격지심에 빠지는 것은 흔한 일이죠. 하지만 제법 아름답고 귀여운 얼굴인데 이런 생각을 하느라 자신감이 없는 모습은 안타깝네요.
“기, 기분 나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장소는 비, 비워 드릴 테니······.”
“잠시만요.”
급하게 장소를 벗어나려고 하는 소년을 불러세웠습니다. 사실 내버려도 좋았겠지만, 저는 전생부터 눈물에 많이 약했으니까요.
“왜, 왜 그러십니까? 호, 혹시 부, 불쾌하게 만든 것이 있다면······.”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잠시, 여성을 대하는 법을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그렇게 말한 저는 소년의 양손을 잡았습니다.
“허, 허억!”
“긴장하시지 마세요. 천천히 호흡하세요. 제가 하는 말에 맞춰서.”
“놔, 놔주세요! 소, 소, 손이!”
이 광경을 니콜라스 왕자에게 들키면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메인 홀에서는 아직 첫 번째 곡도 끝나지 않았으니 당분간은 안심해도 되겠죠.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제 말을 듣고 천천히 숨을 쉬어주세요.”
들이마시세요. 내쉬세요. 들이마시세요. 내쉬세요. 잠시 후, 소년은 안정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정되셨나요?”
“네, 네에······.”
일단 제대로 얘기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하죠.
“그렇다면 이번엔 저와 눈을 마주쳐주세요.”
“그, 그건 부, 부담스러워서······.”
“괜찮으니까 저와 눈을 마주치세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5초가 지나자 소년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다시 눈을 마주치세요. 적어도 10초는 마주하고 있어야죠.”
“하, 하지만 그건 너, 너무 부끄러우니······.”
“부끄러워하실 건 전혀 없어요. 아마 당신과 눈을 마주치는 영애가 당신보다 수십 배는 부끄러울 거니까요.”
“네? 그, 그렇습니까?”
“당연하죠. 당신처럼 잘생기고 귀여운 외모의 남자를 상대로는 무조건 반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예법을 차리고 있는 거예요. 그 기대를 저버리시는 것이 더 부끄럽지 않을까요?”
위로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고백 같은 말을 해버렸네요.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화, 확실히······.”
소년이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하나. 둘. 셋······아홉. 열. 10초가 지난 이후에도 소년은 눈을 피하지 않고 뚫어지라고 제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이렇게 단시간에 성장하는 속도가 놀랍네요.
······이거 제법 가르치는 보람이 있네요.
“이제 마지막으로, 말을 더듬지 않도록 해 보죠.”
“그, 그건 힘듭니다. 교, 교육자분들도 애, 애쓰셨지만······.”
“괜찮아요. 아주 쉽게 고칠 수 있어요.”
여기에선 전생에서 배운 지식을 살짝 사용하도록 하죠.
“우선, 말을 더듬는 것은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이에요. 생각이 많아서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입이 따라가기 힘들죠. 이해하시겠나요?”
“그, 그렇, 그렇습니까.”
“그렇기에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을 따로따로 하는 것이 좋아요. 사람의 머리는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으니까요. 우선, 말하고 싶은 내용으로 머릿속으로 편지를 쓴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완성된 편지를 그대로 읽듯이 말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이 왕가의 정원을 소개하는 말씀을 제게 해주시겠어요? 아주 늦게 말해도 괜찮으니, 말하기 전까지 머릿속에서 천천히 편지를 쓰고, 그것을 읽어주시기만 하면 돼요.”
소년은 그 말을 듣고 정원을 보며 생각에 빠졌습니다. 30초 정도 후, 소년이 입을 열었습니다.
“영애 분의 머리카락처럼 붉고 아름다운 장미가 핀 정원입니다. 하지만 정원 안에는 함부로 들어가시지 않길 바랍니다. 장미꽃 사이에서 미아가 되면 찾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더니 다소 느끼하지만 완벽한 문장을 순조롭게 내뱉었습니다. 소년 본인도 자기 자신에게 놀란 모습이네요.
“정원을 소개하면서 영애분과 비교하는 듯한 말을 해버렸습니다. 기분이 나빠지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 아름다운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할 영애가 어디 있겠어요.”
후훗. 귀여워서 미소를 지으니 소년이 살짝 놀랐습니다.
“말을 더듬지 않는 방법은 말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을 많이 하는 거예요. 말을 더듬는 것은 실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늦게 말하는 것과 천천히 말하는 것은 실례가 아니에요. 이것을 염두에 두면 좋으실 것 같네요.”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천만의 말씀이에요.”
그런 이야기를 나눌 무렵, 무도회의 두 번째 곡이 절반 정도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니콜라스 왕자가 이상하게 여기겠네요.
“저는 가보도록 하겠어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역시 당신같이 아름다운 분이라면 파트너가 있으시겠죠. 시간을 뺏어서 죄송했습니다. 아, 그리고…….”
다음에 할 말을 생각하고 있나 보네요. 배운 것을 곧바로 활용해주니 가르친 보람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는 여성을 부끄러워했기에 사교댄스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차마 모자란 제 실력으로는 영애분께 춤을 권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춤을 신청하면 받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다소 부끄러울 정도로 열렬하게 사랑을 고백하네요. 지금 니콜라스 왕자는 아리아나 영애와의 관계가 진행되고 있을 것이고, 확실하지는 않더라도 몇 년 정도만 지나면 파혼이 가까워지겠죠.
눈앞에 있는 영식이 어느 정도의 가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왕가 주최 무도회의 손님이라면 백작 정도의 지위는 있을 것입니다. 왕자와 파혼 후 다소 약한 가문에 시집을 가더라도 여생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면 나쁘지 않겠죠. 또, 그때 가서 새로운 혼인 상대를 구하려면 장애가 많을 테니, 위탁할 수 있는 상대도 필요하고요.
“기대하고 있겠어요. 소개가 늦었지만, 전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공작 영애입니다.”
“파노스 알렉산드로스 제2 왕자입니다.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자기소개를 듣자마자, 몸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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