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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92화 (9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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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화 〉 교만의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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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셀러스 저택에서 파이몬에 대해 알게 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믿어야 할지 의심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눈앞에 있으니 대화 정도는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런은 자신을 천사로부터 구해줬다거나 나중에 만났을 때 자신과 뜻이 같았으면 좋겠다는 등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떠올렸다.

"대체 마왕이라는 놈이 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지 모르겠네."

"응? 무슨 소리냐?"

등에 매달려있던 미호가 애런의 혼잣말을 듣고 물었다.

아직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것을 보니, 옛 제자가 어지간히도 떠올랐던 모양이다.

"너는 왜 마왕을 보고 제자를 떠올리냐?"

애런은 미호를 아기를 안아 들듯이 자세를 바꾸고 계속해서 코를 훌쩍이고 있었던 미호의 눈을 닦아주었다.

"뭐… 그놈이 내 제자였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지금에 와서는 제자도, 사람도, 살아있지도 않다만."

"마왕이 제자라고… 아, 생각해보면 아리아나 님도 원래는 인간이었지."

애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인색의 마왕은 몸을 포기한 리치였지만, 아리아나는 성녀인 채로 마왕이 되었으니 영 불가능한 얘기도 아닌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면 마왕이라는 존재가 대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의 칠죄종에서 태어난 강한 악마가 마왕이라고 언젠가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악마가 아니어도 마왕이 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악마란 무엇인가?

대체 왜 인간도 마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모르겠네."

생각해봤자 의문만 더 생길 뿐이었다.

"오빠, 이제 마테오가 길을 뚫을 준비가 되었대."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아일라가 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눈앞에 보이는 파이몬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끝없이 덤벼드는 마물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카펠라는 그 역할을 마테오에게 시켰고, 애런이 일 대 일로 파이몬과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애런과 계약한 미호는 동행이 허락되었다.

"근데 괜찮겠어?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파이몬이라는 마왕이 오빠와 협력하고 싶다고 했다지만, 여전히 못 믿겠는데."

아일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애런도 못 믿는 건 똑같았기에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걱정하는 아일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안심시킬 뿐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모르니까 만나봐야지. 적이라고 생각되면 죽일 뿐이고, 협력이 가능할 것 같다면 협력을 할 뿐이야."

마왕이 가진 지식과 힘은 인간들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이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힘이 필요했다.

그것이 마왕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들이고 싶은 전력이다.

"뭐, 미호도 만전인 것 같고, 나도 있으니까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방심하지는 마?"

아일라는 팔짱을 끼고 여러 말을 늘어놓았다.

마왕이 공격하면 어떻게 알려라, 도움이 필요하면 미호가 수정 구슬로 알려라, 무리는 하지 말라는 등.

마치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는 어머니처럼 신신당부를 했다.

"알겠어, 알겠어.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그런 걱정이나 하다가 너나 당하지 말고."

애런은 미호를 다시 등으로 돌려놓고 아일라의 코를 두 손가락으로 집게를 만들어 꾸욱 누르며 말했다.

"하여간, 진지하게 걱정을 해줘도 장난이나 쳐대고."

아일라는 코를 잡고 있는 손을 탁 쳐내고 빨갛게 변한 코를 만지작거렸다.

"긴장 좀 풀라고 하는 거야. 너 벌써 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보이거든."

"아니거든. 완전 멀쩡하거든."

몸이 안 굳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쭉 펴면서 항변을 해보지만.

"악, 하으…."

긴장으로 굳어있던 몸을 갑자기 움직이니 쥐가 생겼다.

호언장담을 하고 바로 쥐가 생겨버린 것이 창피했는지 아일라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소리를 참으며 조용히 종아리와 허벅지를 주물렀다.

"아휴, 이래서 진짜 용사고 뭐고 불안하다니까."

"멀쩡하거든?!"

그러면서도 다리는 계속해서 주무르고 있었다.

결국 애런이 한숨을 쉬고 쥐가 생긴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놀란 근육들을 풀어주는 걸 도와주려고 했다.

아일라는 이 나이 먹고 그러기는 싫다고, 창피하다며 저항했지만 그럴 때마다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에 윽 소리를 내며 순순히 몸을 내어주었다.

"제2 사도가 있어서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이렇게 여유롭게 있지도 못할 텐데 말이야."

애런은 전장의 선두에서 불로 마물들을 정화하고 벌하고 있는 마테오를 보았다.

마테오 덕분에 이 전장은 평온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거기다가 그를 지원하는 다른 사도들도 그에 못지않을 만큼 든든한 것이었다.

적일 때는 상당히 거슬리는 자들이었지만, 아군이 되니 이리도 믿음직스러웠다.

"다리 말고는 괜찮아?"

"... 응."

애런은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아일라의 허리를 잡아 균형을 잡아주었다.

"자, 다리 벌리고 허리 숙여봐."

"으그극…."

괴상한 소리를 내며 스트레칭을 하는 아일라를 보니 옛날에 모노크롬에서 몸 푸는 걸 도와줬던 생각이 들기도 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왜 웃어."

"옛날에 네가 어렸을 적이 떠올라서. 자, 이제 괜찮은 것 같네."

다 됐다는 듯 등을 찰싹 때리고 아일라의 몸을 일으켜 세워줬다.

"이 씨… 쪽팔리게 진짜."

"창피한 건 괜찮다고 큰소리치고 바로 쥐가 난 게 창피한 것 아니겠느냐."

"미호 주제에 건방지네."

아일라는 화를 풀듯이 미호의 볼때기를 주욱 잡아당겼다.

남매라서 그런지 하는 짓이 자신과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애런은 전장을 살폈다.

파이몬이 이끄는 마족들이 나서도 여전히 인간들이 밀어붙이는 형세였다.

거기다가 성직자들의 계속된 기도는 마테오에게서 찬란한 빛이 날 정도로 상당한 신성력을 가져다주었는데, 이제는 그것으로 길을 뚫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마테오가 마물들을 도끼로 찍어누르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무리여. 네놈들이 불지옥에 발을 들이지 않아 심판받기를 거부한다면, 심판자가 찾아가 신벌을 대행할 뿐이다."

화르륵­.

서커스에서나 볼법한 이글거리는 불의 고리가 마테오의 앞에 생겨났다.

그것은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주변에 불꽃을 휘날리며 점점 크기를 키워나갔다.

어느새 하늘에 닿을 듯처럼 커진 고리는 이제 고리라고 부르기도 애매모호한 것이었다.

태양에 구멍이 뚫린 듯한 느낌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았다.

"심판자가 걸을 길을."

고리는 회전을 멈추고 마치 터널을 만드는 것처럼 고리에 고리를 덧대어 길이를 늘여갔다.

길을 가로막는 마물들을 불살라 없애버리고, 사람이 지나갈 길을 열어내었다.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고리의 진격은 어느 순간 멈추었다.

그건 새하얀 머리카락, 양의 뿔을 가진 마왕의 퇴로를 막았을 때였다.

공기가 일렁이며 숨이 턱턱 막힐 열기를 뿜어내는 불꽃 속에서도 파이몬은 여유롭게 서 있었다.

역시 마왕이라면 마왕이라고 할 수 있는 강함을 멀리 있는 애런도 느낄 수 있었다.

그곳까지 이어진 길에는 작은 마물 하나 남지 않고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고, 남은 건 저 터널 너머 파이몬 하나뿐이다.

이 터널을 지나간다면 말 그대로 파이몬과 일 대 일인 상황.

대화를 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환경이다.

마테오는 그냥 마물들이 합류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겠지만, 어쩌다 보니 애런이 머릿속으로 원하던 상황이 되었다.

"가시지요."

마테오는 길을 비켜주며 애런에게 말했다.

카펠라가 교만의 마왕은 그에게 맡기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는 전력이 한 번에 덤비면 더 일이 수월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카펠라가 한 말이기도 하고, 그가 전생에 용사라고 하니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일 테지.

찝찝함이 남기는 하지만…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네. 그럼 갔다 올게. 아일라."

"응. 다시 말하는데, 위험한 것 같으면 수정 구슬로 바로 알려야 한다? 알겠지?"

"알겠다니까."

애런은 끝없이 걱정하는 아일라를 뒤로 하고 불의 터널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보이는 파이몬 역시 애런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파이몬의 주변에서는 마기가 나와 불꽃을 잠식하고, 잡아먹으며 불길한 느낌을 내고 있었다.

그걸 본 미호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고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애런, 저 녀석 싸울 생각인 것 아니느냐?"

"... 글쎄."

파이몬에게서 흘러나오는 마기는 불의 터널 내부를 감싸듯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햇빛이나 정화의 불꽃의 빛은 보이지 않게 되고 빛 한점 없는 검은 터널이 되었다.

이것이 싸우려는 의사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에 있는 것인지는 판단하기가 모호했기 때문에, 일단 애런은 어두컴컴한 터널을 걸었다.

"미호, 불 좀 켜줄 수 있어? 내가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그 정도야 쉬운 일이지."

화륵­.

미호가 주먹을 쥐었다가 손을 펴자 푸른 여우 불이 생겼다.

여우불은 애런 주위를 떠돌면서 발밑을 비추며 제대로 걸어갈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했다.

"수정 구슬은… 아직 작동이 되기는 한다. 역시 카펠라가 만들어낸 아티팩트구나."

미호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듯 수정 구슬을 꽉 쥐고 있었다.

꼬리 9개를 미리 다 꺼내놓고 언제 기습을 하더라도 대처할 수 있도록 긴장을 하고 파이몬이 보이기만을 기다렸다.

[이 익숙한 기운. 상당히 오랜만이로군.]

"너 되게 오랜만에 말하는 것 같다?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는 한마디도 안 하고 있더니."

[책을 읽는 느낌으로 네 안에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파이몬이 어떤 입장인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인간에게도, 마족에게도 도움을 주지 않기로 한 것이지.]

"파이몬이 인간의 편이라고 하면 너도 협력할 거냐?"

애런의 질문에 마왕은 머리가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아, 적당히 웃어야지."

애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목숨을 걸고 싸우던 너와 내가 협력이라.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것이기는 하군.]

"이미 가브리엘 때 협력하지 않았나?"

[그건 나도 살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고. 다만, 지금은 다른 상황이지.]

"그런가."

이미 전생의 일은 잊은 지 오래되었고, 이제와서는 꽤 친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꽤 섭섭한 태도였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애런에게 너랑 나랑 친해진 것 같으니 인간을 죽이는 것에 네 여동생도 같이하니 협력하라 하면 애런도 섣부르게 대답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저벅저벅.

터널 반대편에서 흙을 밟는 소리가 들려온다.

[왔군.]

"그러냐."

자신의 딸과 만날 생각에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마왕이 중얼거렸다.

"용사."

칠흑 속에서 새하얀 머리카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

애런이 죽기 전에 보았던 악마.

그리고 자신을 환생시키고 몸에 마왕을 봉인시키게끔 행동을 유도한 교만의 마왕.

파이몬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드디어 만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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