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인색의 마왕
* * *
"인간 따위가…!"
인색의 얼굴이 괴기할 정도로 구겨졌다.
고작 인간에게 팔을 베였다는 사실.
그것은 베로니카에게 패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치욕적이었다.
인색은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고작 팔 하나다.
어차피 재생되는 팔 하나 때문에 흥분할 필요는 없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이기는 했으나, 자신에게 위협적인 것은 아니다.
만들어낸 마신은 이쪽으로 불러들이지 않는다.
마신은 어둠과 공포, 죽음 등에서 힘을 얻는 말 그대로 악 그 자체다.
뼈대만 있는 마신을 강화해줄 피와 살을 덧붙이려면 전장에 최대한 공포를 불러와야만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장인 카펠라의 목을 베면 될 뿐이다.
그것이 안 된다면 핵심적인 인물, 마왕을 죽이러 향하는 용사를 죽이면 된다.
둘 다 안 된다면 성녀, 대마법사를 죽일 뿐이다.
아직도 더 많은 힘을 모으기에 급급한 인색함이 리처드에게는 그저 오만과 방심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성녀의 신성 마법으로 강화한 자신을 앞두고도 저 소환수를 불러들이지 않다니.
그 오만함이 제 목을 조여올 것이라고.
"고작 팔 한번 베었다고 건방 떨지 마라."
인색이 손짓하자 눈동자 하나가 터져서 물이 튀었다.
콰드드드득!!
전장에 퍼져있던 뼈가 한곳으로 모인다.
뼈들이 캠프파이어를 하는 것처럼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금세 사각의 탑을 이뤘고 흉측한 모습을 자랑했다.
흑마법의 기본인 제물과 공양.
바치는 것이 마기가 뒤섞인 것이라면 더더욱 효과가 좋다.
실험용 쥐들을 이용해서 수십, 수백, 수천을 넘는 횟수를 반복한 실험을 통해 익숙해진 마법을 사용한다.
그것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으면서 정확했다.
저주.
음습한 기운이 리처드에게 스며들었다.
그것은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해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 돌아가 성녀에게 치료를 받는다면 죽음은 면하겠지만,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인색의 목을 베기 위해 온 리처드에게 후퇴는 없었다.
"내 부하들이 희생하면서 열어낸 길로 도망칠 생각은 없다."
리처드가 대검을 휘두른다.
공기마저 베어버리며 바람이 일었고 탁한 마기를 흩날리게 했다.
하지만 인색에게는 닿지 않았다.
"멍청한 것. 정면에서 내 마법을 받아내고도 멀쩡할 줄 알았더냐."
인색의 손짓에 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날카로운 뼛조각들이 날아와 리처드를 노렸다.
방어를 위해서 대검을 휘둘렀지만.
푸푸푹.
왠지는 모르겠지만 대검을 뚫고 자신의 몸을 꿰뚫은 것처럼 느껴졌다.
거리감이 이상하다.
호흡이 힘들다. 온몸에 피를 공급해야 할 심장으로 자꾸만 피가 모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리처드는 계속해서 대검을 휘둘렀다.
땅에 나는 흔적이 거리감을 되찾게 하고, 호흡이 힘든 것은 늙으면서 언제부턴가 당연해진 것이었다.
그 이상은 필요 없다.
인색이 날리는 뼛조각이 이미 몸을 몇 번 꿰뚫었지만, 몸은 움직이니 상관없다.
콰득!
이제는 날아오는 뼛조각을 베어낼 수 있다.
"왜 죽지 않는 거지."
인색은 쓰러지지 않는 리처드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몇백 년을 살아오면서 연구했던 저주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효율적으로 바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저 늙은 사자는 쓰러지지 않는 것인가.
"성녀의 마법 덕인가."
그렇지 않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한낱 인간이 비록 베로니카에게 패해 자신을 마왕이라 칭하지는 못하지만, 마왕이었던 자신의 마법을 견딜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의 실패를 외부 요인에서 찾는 인색은 그리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용의 심장을 움직였다.
용이 브레스를 뿜는 것처럼 가슴이 붉게 달아오르지만, 나오는 것은 한없이 차가운 숨결이다.
후우….
세상을 얼어붙게 하는 눈보라가 리처드를 덮쳤다.
그러나.
"왜 멈추지 않는 것이냐."
죽음을 각오하고 마나를 두른 리처드는 쉽게 얼어붙지 않았다.
"고작… 조금 차가운 바람 정도로 사자를 죽일 수 있을 성싶더냐."
리처드는 정신을 차리고 방어를 버리고 모든 마나를 공격을 위한 것으로 전환했다.
거리감과 호흡은 이상하지만, 이미 시간이 흐르며 완벽히 적응했다.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몸을 조금 내어주기는 했지만, 이후를 신경 쓰지 않았으니 상관없다.
"고작? 세계를 얼어붙게 하는 내 숨결이 고작 차가운 바람이라고?"
후우….
인색이 한 번 더 숨결을 뿌렸다.
세상이 새하얘지며 가시거리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리처드의 온몸에는 눈과 얼음이 가득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마기가 담긴 뼛조각을 날려 보낸다.
허벅지, 옆구리, 어깨를 꿰뚫으며 구멍이 생기고 담긴 마기 때문에 순식간에 몸이 썩어들어간다.
"인간이면서 쓰러지지 않는 것이지."
모든 마나를 검에 담은 리처드의 검이 허공을 베었다.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치며 거리를 벌리는 탓에 전혀 가까워지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봐왔던 용사의 검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모든 것을 베어내는 검이었다.
그것을 동경하고 따라 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 쉬지 않고 자신을 단련해왔던 리처드의 참격.
대기에 생겨났던 얼음들이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애런처럼 공간마저 베어내지는 못한 것이었다.
"하, 죽을 때가 되어서도 그분을 쫓아가는 건 여전히 어렵군."
자신의 마지막 검을 바라보는 리처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마왕을 베는 것은 성공했군."
콰지직.
인색의 몸이 양단되며 비스듬히 베어진 상반신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단면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에 땅이 썩어갔다.
그처럼 인색의 표정도 썩어가고 있었다.
"인간 따위가!"
용사도 성녀도 대마법사도 아닌, 고작 오래 살아왔을 뿐인 인간에게 베어져 땅에 엎드려진 모습.
이것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인색은 내버려 둬도 죽을 리처드를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뼈를 모아 거대한 손을 만들어냈다.
"죽어라."
쾅!
손은 꽉 쥔 주먹이 되어 리처드를 내려쳤다.
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두 번, 세 번… 이미 땅이 으스러져 뻥 뚫렸음에도 인색은 주먹을 내리쳤다.
"... 하아, 고작 인간 따위가…."
인색이 마기로 몸을 들어 올려 상반신을 붙이려는 순간.
촤르르르!
금빛 사슬들이 날아와 그러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건."
성녀가 신성력을 옭아매 만들어낸 사슬.
"어느새 이곳까지."
뿌연 먼지가 일어난 곳에서 이자벨라가 걸어오고 있었다.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렸던 것이냐."
"네, 뭐 그런 셈이죠."
무모했던 리처드의 돌진도, 자신을 도발해서 숨결을 뿜어내게 한 것도, 모두 시야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던 것인가.
인색은 고작 인간 따위의 생각대로 자신이 놀아났다는 생각에 얼굴을 콱 구겼다.
그러나 사슬에 묶여있다고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인색은 마기를 담은 뼛조각을 날려 보냈고, 이자벨라의 머리를 관통했다.
"고작 몸을 속박했다고 우쭐하기는."
"제가 할 말이네요. 고작 머리에 구멍 좀 냈다고 우쭐대기는 이른 것 아닌가요?"
떨어진 살점이 꿈틀거리며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는 기이한 모습.
"불사의 축복을 받은 성녀인가."
죽지 않는다면 제압하는 수밖에 없다.
성가신 일이 되겠지만, 이런 상대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당장 같이 마왕이었던 분노의 마왕도 죽지 않는 자였지 않은가.
그 때문에 불사자를 상정한 전투도 이미 머릿속에는 들어있었다.
"저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고 생각하는데요."
이자벨라가 히죽 웃으며 심상 기도를 마쳤다.
금빛 사슬들이 나타나 몇 번이고 인색의 몸을 꿰뚫었지만, 온몸에 퍼진 용의 피가 신체를 몇 번이고 재생했다.
마찬가지로 인색이 쏘아낸 뼛조각이 이자벨라의 몸에 구멍을 내었다.
불사자의 전투는 죽음에 대한 긴장감 따위는 없었고, 쌍방의 피와 살점이 계속해서 튀는 그런 시시한 전투였다.
그리고 그 끝은 생각보다 쉽게 다가왔다.
인색이 쏘아낸 뼛조각이 이자벨라가 재생하지 못하도록 머리가 있어야 할 곳을 차지하고 있으니, 심상 기도를 하지 못하는 이자벨라의 끝이 다가왔다.
"하찮은 것들이."
하지만 인색은 그것마저도 눈을 가리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기에, 방심했다.
그 순간.
푸욱.
아직 재생되지 않는 가슴 구멍에 손이 들어왔다.
"뭐…."
방금 자신이 제압한 성녀와 똑같은 얼굴.
하지만 6장의 날개를 펼치고 느껴지는 분위기는 조금이나마 다른 성녀.
도로시가 용의 심장을 쥔 채로 능력을 발동했다.
마왕인 인색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의 힘을 끌어내고 있는 용의 심장은 그렇지 않았다.
사르르… 심장이 입자가 되어 흩날려 사라지자, 인색의 몸을 지탱하던 근육도, 몸에 마기를 공급하던 피도 서서히 사라지며, 평범한 리치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안… 된다!"
자신의 힘을 강화하던 용의 심장이 사라진다면… 그 힘을 토대로 유지하고 있던 마신도 사라진다.
쿠르르릉!
마신의 뼈대는 더 이상 힘을 공급받지 못하자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와르르르 뼈를 쏟아내었다.
겨우 닿은 진리의 편린이 어디에나 널린 무가치한 뼈다귀가 되었다.
카펠라와 미호를 죽이고 자신이 가장 뛰어난 마법사임을 알릴 마신이 쓰러졌다.
"아니, 아직 복구할 수 있다. 용의 심장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다시 끼워 넣으면 될 뿐이다."
"어딜…."
도로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인색은 마기를 둘러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장에서 이탈했다.
전쟁의 승리 여부는 상관없다.
더 높은 경지만이 중요하다.
"저기 있는가."
인색은 검은 마기를 방출해 더더욱 가속해서 날아갔다.
향하는 곳은 인간계의 전력이 가장 몰려있는, 현재까지는 마족을 압도하고 있는 제2 사도와 용사가 있는 전장.
멀리서도 용의 심장과 맞먹는 것이 있다는 게 느껴진다.
하늘을 날고 있는 인색은 빠르게 전장을 훑어봤다.
그리고 발견했다.
흑발 소년의 등에 매달려있는 금발금안에 여우 귀가 돋아난 소녀를.
그것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것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힘을 쌓은 저 구미호의 심장이 용의 심장을 대체할 수 있을 거란 걸.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군…"
인색은 무언가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이내 저 구미호의 심장을 노리는 것에만 집중하며 잊어버렸다.
조금 전 도로시에게 당해 뻥 뚫린 가슴 구멍을 통해서 마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성녀의 신성력에 당한 상처는 마왕이라고 할지라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지체할 시간은 없다.
인색은 하늘에서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틈을 보려고 했으나, 이미 그들의 눈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시간은 없다."
그리고 미호를 노리며 하강했다.
*
"마왕이다."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애런이었다.
전장을 가로질러 거대한 힘이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금방 전장에 도착한 마왕의 시선은 노골적으로 미호를 향하고 있었다.
여유를 잃은 것인지, 살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마왕은 금방 다른 이들도 포착할 수 있었다.
"미호, 왠지는 몰라도 너를 노리는 것 같다."
"... 그런 모양이구나."
아직 살점이 붙어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인색을 보고 미호는 울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그래?"
"별거 아니다… 그저 옛날에 있었던 배은망덕한 제자 녀석이 떠올라서 그런 것이니라."
끈기는 있었지만, 은혜를 갚을 줄은 몰랐던 녀석.
그 정도였으면 괜찮았다.
그러나 마법사로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리며 자신의 믿음마저 배신한 제자.
그때 받았던 마음의 상처 때문에 미호는 남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을 꺼려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더 인내심 있고, 인간적이며, 선을 넘지 않는 자를 찾기 위해서 악독한 마탑주가 되었건만.
지금 그 제자가 인색의 마왕이 되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미호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네 심장을 내놔라. 구미호!"
이제는 자신의 얼굴과 이름도 잊어버린 배은망덕한 제자가 악의를 드러내며 날아오기 시작했다.
"미호, 준비를…."
미호는 차마 영창을 하지 못하고 눈물이 맺힌 눈을 질끈 감았다.
애런은 미호에게서 공유받은 감정을 이해하고, 검에 손을 올렸다.
"아르카나."
검은 뿔이 돋아나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마왕을 애런의 마기가 집어삼켰다.
시체조차 없다.
모든 것은 마기에 녹아들어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잊을 수 있겠구나…."
미호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옛 제자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와 다르게 포기하지 않고, 인간적이며, 마왕에게도 집어 삼켜지지 않은 애런을 바라봤다.
"으이구, 뭘 그렇게 사색에 잠겨있어?"
애런은 인색을 마무리 짓고 피식 웃으면서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괜찮다."
미호는 애런의 등에 머리를 박고 비벼서 눈물을 닦아내었다.
"야, 눈물 콧물 다 묻겠다."
"콧물은 안 흘렸느니라!"
미호는 코를 훌쩍이면서 불기둥이 솟구치는 전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머리에는 양 뿔이 있는 마왕, 파이몬이 서 있었다.
"이제서야 다시 얼굴을 보는구만."
애런은 그 모습을 보니 떠올랐다.
전생의 자신이 죽기 전에 수작을 부렸던 악마를.
그것은 분명 파이몬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