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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90화 (90/92)

〈 90화 〉 인색의 마왕

* * *

치직.

각 전장의 수정 구슬이 한번 떨리더니 빛이 나며 화면이 연결되었다.

대상은 연합군의 머리인 카펠라.

그녀가 연결을 시도했다는 것은 전장에 또 하나의 격변이 있다는 뜻.

"인색의 마왕이 나타났어."

카펠라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는 듯이.

너무 덤덤하게 말해서 그걸 듣고 있던 연합군은 별일 아니구나 생각하며 넘어갈 뻔했다.

"나타난 위치는 오르도 왕국과 성녀가 있는 전선. 가늠해보니 이쪽 전력으로 어찌어찌 상대는 될 것 같아."

사자왕 리처드 폰 오르도와 마탑주 한 명, 두 성녀가 있는 이 전선도 애런이 있는 곳보다는 아니지만, 마왕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전력이었다.

"뭐, 영 안 된다 싶으면 내가 도와줄 거야. 그냥 인지하고 있으라고 연락했어."

전초기지에 앉아서 인간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면서도 카펠라는 여유롭게 말했다.

아직 다른 마왕이 나타나지 않았기에, 손은 남아있었다.

"괜찮습니다. 카펠라 님은 추후에 두 마왕을 맡으실 분. 이곳은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인색의 마왕이 나타난 전선을 지휘하는 리처드였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카펠라의 힘을 온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냉정하게 분석하고 한 말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쪽끼리 알아서 잘해봐. 대신, 전선이 너무 밀려서는 안 돼. 그래서는 다른 전선에도 피해가 갈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리처드는 수정 구슬을 품속에 넣고, 눈앞까지 다가온 음습하고, 사악한 마기를 내뿜는 리치를 보았다.

확실히 마왕이라는 이름답게 강대하다.

하지만 그것이 물러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카펠라가 가늠했을 때 이쪽 전력만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뜻은, 제 한 몸 내던진다면 저 마왕을 쓰러뜨리는 게 가능하다는 것.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과의 전쟁을 치렀던 리처드는 실전의 감을 잃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눈빛은 리치를 향했고, 그의 목을 잡아 뜯을 수 있을 때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용사님과 대화가 해보고 싶었는데. 죽는 것에 여한이 있다면 그것뿐이겠군."

전초기지에서 보았던 현 용사와 비슷하게 생긴 흑발을 한 소년.

그에게서는 느껴지는 기운은 자신이 아는 용사와 다른 것이었지만, 잠깐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전생에 용사였다는 것을.

"그분이 있다면 인간들은 승리할 것이다.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모노크롬에 있는 아들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리처드는 수많은 인간을 베어왔던 대검을 뽑아 들었다.

무어라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기사들은 그 모습만을 보고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그의 뜻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미 오랜 세월 전장을 같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기사들은 리처드와 같이 검과 창, 방패를 들었다.

그리고 그가 검 끝을 저 멀리 있는 리치를 향했다.

그 행동은 목표는 저기 있는 리치이고, 그곳까지 갈 길을 뚫으라는 것이었다.

왕이 나선다.

적장의 목을 바라니, 그 길을 가로막는 잡졸들을 베어 넘기는 것은 자신들의 역할이었다.

뿌우우우­!!

거대한 코끼리처럼 생긴 마물이 진열을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기사들은 재주 좋게 쇄도하는 마물들을 피하고 그 거대한 몸집에 검과 창을 박았다.

수많은 검격이 코끼리의 몸을 난도질하고 쿠웅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하루가 지나지 않았지만, 기사들은 죽음이 가까운 전장에 익숙해졌다.

자신들을 노리는 마물들의 날카로운 이빨도, 모든 걸 집어삼키는 용의 브레스도, 동료의 죽음도 이미 정신이 마모되면서 익숙해진 것이다.

그들은 성녀의 마법으로 잘 죽지도 않는 상태였으므로, 광전사처럼 돌진하면서도 한껏 물오른 집중력으로 마물들의 공격을 피해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

인색은 전초 기지에서 자신을 향하던 시선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빠드득­.

이가 갈리며 새하얀 가루가 투툭 떨어졌다.

감히.

감히 자신을 보고도 직접 나서지 않는다니.

고작 이곳의 전력만으로 자신을 상대하게 내버려 두겠다는 것인가?

상대가 될만한 카펠라나 미호가 없는 전장.

이곳에서 누가 자신의 마법을 막겠다는 것인가?

이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일이었다.

자존심이 상한다.

베로니카처럼 자신을 부족한 머저리 취급을 하는 기분이다.

"네가 여기 나오지 않겠다면… 내가 그리로 가겠다."

인색은 전장을 살펴봤다.

이미 많은 마물과 기사들이 죽었다.

죽음의 기운이 항상 맴도는 이 전장은 흑마법을 행하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걸리는 것이 있다면… 저 멀리 보이는 두 성녀가 거슬리기는 했다.

감히 신성력으로 마기를 정화했다만, 그런 장난으로는 자신의 흑마법을 막을 수 없다는 자신감이 그가 나서도록 만들었다.

"자신들의 목숨마저 내놓는 모습… 인색함이 부족하기는 하다만, 내 어찌 마왕의 힘에 기대겠는가. 너희를 죽일 때는 마왕의 힘이 아닌, 흑마법으로 유린할 것이다."

인색이 손을 내밀었다.

뼈마디에서 뚜둑뚜둑 소리를 내며 한번 손짓했다.

세상을 떠나려는 망자의 혼을 붙잡아, 다시금 몸으로 집어넣는다.

동시에 무방비한 혼과 주종계약을 완료해서 자신의 말을 듣는 병사로 만들어낸다.

죽은 자의 혼마저 겁탈하고 이용하는 그야말로 비인륜적인 마법의 끝.

그것을 사용하는 사령술사.

이미 인간적인 면모를 잊어버린 인색은 누가 뭐라든 상관하지 않는 것이었다.

"일어나라."

그 한마디에 전장에 새하얀 꽃이 피어났다.

그것들은 뼈로 만들어진 꽃이었다.

밟히고 으스러지며 땅에 묻혔던 인간과 마물의 뼈가 서로 엉겨 붙으며, 땅에서 솟아올랐다.

딱딱딱딱딱….

뼈가 뼈와 부딪치는 소리.

뼈만 남은 채로 일어난 시체들은 성대가 없어서 소리 내어 웃지 못했다.

그 대신 남은 자신의 뼈를 부딪치며 마치 웃는 것과 같은 소리를 내었다.

"마음에 드느냐."

딱딱딱딱딱딱….

이미 자신에게 영혼을 저당 잡혀 노예가 되어버린 그들은 자신의 의지가 없다.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은 순전히 인색이 그리하라 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과 대화할 생각 따위는 없다.

다만, 인간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그것으로 행동을 제한하고,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가라. 너희들을 죽인 자들과 그리고 너희들의 동료였던 자들에게 네놈들의 분노를 보여줘라."

딱딱딱딱!!

뼈와 뼈가 부딪치며 시체들이 기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 개개인의 힘은 별 볼 일 없는 것이었지만, 마기에 오염된 혼과 몸은 온몸에 치명적인 독을 두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사들은 뼈와 닿지 않기 위해 방패를 세우고, 그 틈으로는 창을 내밀어 끝없이 쏟아지는 뼈를 막아냈다.

"어서 카펠라를 향하는 길을 뚫어라."

인색은 용의 심장과 신생아의 손으로 장식이 된 지팡이를 들었다.

용의 심장은 마나를 담고 있는 그릇.

그것은 언젠가 자신의 스승이었던 자에게 들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유용했던 지식만큼은 기억하고 있지만, 더는 스승의 얼굴도, 목소리도, 이름도 기억하고 있지 않다.

지식만이 인색에게 필요한 것이었으니, 배은망덕하다며 자신을 질책하던 스승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미 용에게서 뜯은 지 오래된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브레스를 사용할 때처럼 붉게 빛이 나며 열기가 오르지만, 반대로 전장의 온도는 눈에 보일 정도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어붙어라."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한기가 증폭되어 전장을 덮치기 시작했다.

시체, 기사, 마물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얼어붙기 시작한다.

인색의 숨결이 닿는 곳에는 성에가 끼고 피가 얼어붙으며, 모든 것이 멈추었다.

"천사님께 바라옵니다. 저희를 덮치는 추위로부터 몸을 지킬 불을 내려주시옵소서. 몸이 얼어붙은 자에게는 안식과 평화를, 아직 살 수 있는 자들은 따뜻한 불로써 몸을 녹여주시옵소서."

화아아악­!

두 성녀의 기도에 따라 전장에는 따뜻한 금빛 태양이 떴다.

그것은 가브리엘처럼 공격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닌, 전장의 온도를 따뜻하게 올리기 위함이었다.

햇볕을 받은 기사들은 이제 추위에 몸을 떨지 않았고, 갑옷에 생겼던 성에는 봄날에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인색의 마법은 두 성녀의 신성 마법에 확실히 잡아먹히고 있었다.

그 사실 때문에 인색은 이가 부러질 정도로 입을 꽉 다물었다.

이런 치욕은 더는 있어서는 안 되었다.

적어도… 적어도 자신과 비견될 마법사는 카펠라와 미호외에는 있어서는 안 된다.

둘만 있어도 치욕감에 죽을 것 같은데, 그 이상으로 늘어난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인색은 지팡이에 있는 용의 심장을 뜯어서 자신의 갈비뼈를 부숴 그 안에 쑤셔 넣었다.

이미 살을 잃어버린 리치였지만, 용의 심장에서 빠져나오는 마나가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사람처럼 모습을 갖추어 갔다.

인간을 포기하고 리치가 되었던 인색은 이제 리치조차 아닌 잡종이 되었다.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이 뒤섞였지만, 그만큼 운용할 수 있는 힘은 늘어났다.

피와 살이 있다면 그것을 대가로 흑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인색은 당장 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대가로 흑마법을 발동했다.

금방 돋아난 살은 다시 썩어문들어지고, 용의 심장에 의해 재생되었다.

"순수한 마법사도 아닌 성녀 따위가 내 앞을 가로막지 마라!"

으드드드득­!

전장에 떨어져 있는 뼛조각들이 우수수 한 곳으로 모이며 거대한 마물의 모습이 되었다.

그것은 언젠가 인색이 보았던 전 마신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생물을 섞어둔 듯한 괴기한 모습, 세상의 모든 포식자가 모여 단 하나의 정점을 이루어낸 모습.

전 마신의 모습에서 살점을 모두 발라내면 이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머리는 사자이자 곰이고 늑대였다.

머리카락에는 용과 뱀아 꿈틀거리며, 몸통은 코끼리와 거미를 섞어둔 듯하고, 다리는 수많은 동물과 벌레의 것이 섞였다.

뼈만 남은 모습이지만, 그 뚜렷한 윤곽은 살이 붙어있을 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흐흐흐…!"

인색은 방금과는 달리 부러진 이를 훤히 드러내고 턱이 빠질 정도로 크게 입을 벌려 웃었다.

해냈다.

비록 진정한 마신과는 괴리감이 있지만, 자신은 오랜 세월 마계를 평정해온 마신을 만들어냈다.

그것도 자신의 힘으로.

그 사실이 인색에게는 진리의 편린에 닿은 것만 같아서 기뻤다.

이제 자신은 베로니카가 말했던 카펠라나 미호, 눈앞에 있는 성녀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마법사가 된 것이다.

"몇백 년이라는 시간을 진리에 닿기 위해 연구를 끝없이 하였음에도 편린에 조차 닿지 않아 초조했건만, 결국 노력은 보답받는구나."

닿는다.

지금이라면 편린이 아닌, 진리의 근원에도 닿을 수 있다.

콰직!

그때.

한 마리의 사자가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분명 리치가 되면서 고통은 잊었었지만, 용의 심장이 살을 만들어내며 몇백 년 만에 다시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스스로 길을 열어줘서 고맙군."

하얀 갈기를 휘날리며 팔 하나를 뜯어간 것은 인색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던 거대한 대검이었다.

"마법은 잘 모르지만, 술사인 네놈을 죽이면 해체되지 않겠는가."

인색이 방심하기만을 기다렸던 늙은 사자가 드디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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