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88화 (88/92)

〈 88화 〉 전면전

* * *

마물들의 파도는 끝없이 몰려왔다.

그곳에는 함성과 포효와 비명, 검이 살을 베고, 창이 내장을 뚫는 소리… 다양하고도 끔찍한 소리가 어우러져 정신을 사납게 했다.

마물들이 돌진해오면서 굳건히 유지하고 있던 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창과 방패를 들어 올리고 마물에 대항하려고 했지만, 크기가 다양한 마물들의 체중이 실린 돌진은 막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앞서서 돌진해오는 코뿔소와 같은 마물이 기사들을 치고, 날아가게 했다.

진열을 뚫고 들어온 마물을 기사들이 능숙하게 베었다.

수도 없이 훈련을 했던 상황이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훈련 때만큼의 기량을 발휘하지는 못했고 아직 숨이 붙은 마물은 발악을 하며 끝까지 기사들의 발을 묶었다.

쿵!

곰 같은 몸집에 사자 같은 머리가 달린 마수기 거대한 앞발을 휘두르고, 발로 짓밟고, 머리를 물어 터뜨린다.

고작 그런 행동에 수십 년을 살아온 기사가 죽었다.

누군가에게는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남편인 사람이 너무나도 쉽게 죽었다.

이번에는 하늘을 날고 있는 용의 가슴 부분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부풀었다.

브레스를 사용하기 위해서 숨을 들이마신 거였다.

화아아아­!

그리고 태양처럼 뜨거운 불길이 기사들을 덮쳤다.

마물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지켜줘야 할 갑옷이 녹아내리고, 몸에 눌어붙는다.

이윽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끔 사람이 은빛 액체가 되었다.

브레스와 함께 흐릿한 날씨의 전장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붙으며 대낮처럼 환해졌지만,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어둠이 도래했다.

대지에 붙은 불은 활활 타올랐지만, 생명의 불씨는 너무나도 쉽게 사그라들어 사라져갔다.

이곳이 전장.

죽음이 가장 가까운 곳이면서도 악한 감정이 뒤섞여 마족에게는 생명이 가장 가까운 곳.

"이게 전장…."

도로시는 이 끔찍한 광경을 바라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저 멀리서 튄 피가 얼굴에 후두둑 떨어졌다.

붉고 따뜻한 피가 이마에서부터 주륵 흘러내리며 도로시가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도로시,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해."

악마의 아이 정화로 생명이 죽는 것에 익숙한 이자벨라는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도로시의 얼굴에 흐르는 남의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도로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역질이 날 것 같고 머리는 어지럽지만, 자신은 성녀다.

사람들을 보살피고 도와줘야만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다.

각오를 다지고 목에 걸고 있는 펙토탈레를 꽉 쥔 채로 6장의 날개를 펼쳤다.

화아악­!

눈처럼 새하얀 깃털이 전장에 휘날렸다.

마물들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기사들도 그 모습을 보았다.

순백의 날개를 펼친 채 자신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는 성녀를.

그 모습은 성스럽고 고결했고, 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성녀님이 우리를 보살피신다!"

누군가의 외침에 기사들은 다시 힘차게 마물들에 맞섰다.

앞장서는 것은 오르도 왕국에서도 특별한 대테러리스트 부대.

인간을 상대할 것을 상정하고 훈련하는 부대였지만, 그 실력은 마물에게도 통하는 것이었다.

마력이 담긴 방패들이 마물들의 돌진을 막아내고, 마치 하나인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쾅! 쾅!

마물들이 머리를 들이받아 보지만, 가장 선두에 선 자들을 뒤에서 지탱해주는 자들이 있어 쉽게 밀리지 않았다.

"... 인류가 이 고난과 시련을 이겨낼 힘을 내려주소서."

마침 이자벨라와 도로시의 기도도 끝이 났다.

쌍둥이의 기도가 끝이 나자, 햇빛을 막고 날씨를 흐릿하게 하던 구름이 확 개면서 밝은 빛이 기사들을 감쌌다.

따스한 빛은 상처를 낫게 하고, 정신을 맑게 했으며, 인간을 강화하고 마물들을 약화시켰다.

촤르르르­!

이자벨라로부터 신성력이 엮이며 만들어진 금빛 사슬이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갔다.

용들은 사슬을 피해 보려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날아다녔지만, 하늘을 덮을 기세로 날아오는 사슬들을 모두 피하지는 못했다.

하나에 날개가 묶인다면 뒤이어 날아온 사슬이 몸을 옭아매어 저항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브레스를 쏘지 못하도록 턱부터 얼굴을 사슬이 꿰뚫고 기사들의 손이 닿는 지상으로 떨어뜨렸다.

용들이 떨어진다.

마물들의 진격이 더뎌졌다.

두 성녀의 힘은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선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인간들을 도왔다.

마치 좀비처럼 죽지 않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인간과 죽음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달려드는 마물.

이제는 누가 더 끈질기게 일어서느냐의 싸움이었다.

*

하늘이 맑아졌다.

그 사실이 뜻하는 것은 두 성녀가 광범위한 신성 마법을 사용했다는 뜻.

"슬슬 이쪽에도 몰려오겠군요."

제2 사도인 마테오가 말했다.

이 전선에는 제2 사도뿐만이 아닌, 용사 아일라, 전생 용사인 애런, 대마법사인 미호도 존재했다.

인간계의 전력이 몰려있다고 느끼는 건 당연했다.

이곳은 전선을 밀어내고, 용사가 마왕을 죽일 수 있도록 길을 뚫는 역할을 해야만 했으니.

저 멀리서 몰려오는 마물들을 보고 마테오가 거대한 도끼를 들고 외쳤다.

"준비를 하십시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마물들의 거대한 발소리가 들릴 때, 이단심문관들 뒤에 줄을 맞춰 서 있는 성직자들이 다양한 금빛 나팔을 들었다.

뿌우우우­!

마치 동물이 울부짖는 듯한 저음을 내는 나팔이 울리고 나자, 여러 나팔이 울리면서 마물들의 발소리를 지웠다.

동시에 나팔을 들지 않은 성직자들은 두 손을 깍지 끼고 고개를 들었다.

"기도하십시오."

마테오의 지휘에 따라 성직자들이 입을 맞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여러 목소리가 뒤섞이며 조화를 이루고, 이내 하나의 목소리가 되었다.

그것은 남성의 것인지, 여성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에 있는 천사에게까지 닿을 정도로 거대했다.

교황처럼 여러 사람의 믿음을 엮어내어 거대한 하나의 신앙심을 만들어내었다.

그것은 성녀에게도 뒤지지 않는 신성력을 되돌려 받았으며, 그 모든 신성력은 그들을 지휘하는 제2 사도, 마테오에게 향했다.

"보라, 저 흉측하고 악하기 그지없는 지성이 없는 마물들을."

마테오는 도끼를 쥐고 정화의 불꽃을 몸에 둘렀다.

그 불꽃들은 곧 뭉쳐져서 붉은 날개를 만들어내었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불살랐다.

"저들은 주제넘게 감히 하늘을 향해 이를 드러내었고, 그것은 곧 천사님에게 살의를 향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날개가 더더욱 커지며 전장을 뒤덮듯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이다. 내 비록 천사님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 미약한 인간이나, 영광스럽게도 대행자 역할을 허락받았으니, 내가 심판자가 되어 죄인들을 심판할 것이다."

펄럭!

마테오가 힘껏 날갯짓을 하자 무수히 많은 불꽃 깃털들이 땅에 박히며 이글거리는 정화의 불꽃으로 바뀌어 갔다.

불꽃은 저들끼리 합쳐지고 흩어지며, 주제를 모르는 마물의 앞을 가로막을 벽이 되고, 죄인을 벌할 창이 되었다.

"심판할 자가 많으니 내 이곳을 심판할 장소로 만들겠다. 여기에 불을 붙여 불지옥을 현현 시켜 악의 무리를 벌하겠노라."

이단심문관들이 마테오의 말에 따라 자신들이 든 플랜지드 메이스에 정화의 불을 붙였다.

마테오가 보여준 기적이 그들의 신앙심을 더 깊게 만들었다.

깊어진 신앙심은 신성력으로 보답받고, 그것은 또 마테오에게 향했다.

천사가 만들어낸 믿음을 만들어내는 순환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제힘을 더더욱 길렀다.

이제는 전장에 서 있는 마테오에게는 가브리엘과 버금가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심판을 위해서 도끼를 들었다.

"신벌을 대행하라!"

땅에서 수천 개의 불기둥이 솟아났다.

지표면이 진득하게 녹아내릴 정도로 열기를 뿜어내고, 아지랑이가 일렁였지만, 인간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상처 입은 자가 다가가면 그 상처를 치유해주고, 몸에 불꽃을 두르게 해 몸을 보호했다.

광신도들은 천사가 함께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미친 듯이 마물을 향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오빠, 굉장하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일라가 말했다.

이 전장만큼은 인간들이 마물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 믿을 수 없는 사실이 고양감을 가져다주었고, 아일라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마족에게 한해서는 든든한 녀석들이야."

전생에서도 이단심문관과 성직자들은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천사와 대적하는 악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들을 벌할 때만큼은 천사가 힘을 아낌없이 빌려주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이 전쟁은 천사들의 대리전쟁이기도 한 셈이었다.

"이래서는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

"아니, 그건 아니지."

지금 당장은 마족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지만, 저기 보이는 것들은 동물의 형태를 한 저급 마물들이다.

본격적으로 힘을 가진 마물과 악마가 나타난다면, 이렇게 승기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도 금방 그만두게 될 것이었다.

거기다가 마왕.

이번 전쟁은 전생에 겪었던 전쟁과 달리 7명의 마왕이 직접 참전한다.

그 사실이 저번 전쟁과 어떤 다른 흐름을 만들어낼지는 애런도 짐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

전장의 흐름은 바뀌었다.

자신들이 마족을 몰아붙이고 있다.

부상자와 사망자도 성녀의 도움 덕에 별로 생기지 않고 있다.

이자벨라와 도로시, 기사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이변은 너무나도 쉽게 일어났다.

"그아아악­!"

악마의 아이.

부상을 입었던 기사의 어깨에 역십자가의 흉터가 생기더니, 몸이 비대하게 부풀어 오르고 피부는 보랏빛으로 변하고 마물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다.

처음에 변한 것은 한 기사였다.

무엇이 그가 악마의 아이가 되도록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순식간에 악마의 아이가 되어서 자신의 동료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그는 이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협력하며 적을 몰아내던 그가 왜 악마의 아이가 되었는지 모르는 기사들은 당황해하며 손쉽게 공격에 당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언니?!"

그 사실을 지켜보고 있던 도로시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녀는 유심히 기사가 악마의 아이가 되는 것을 지켜보며 인과를 알아내려고 했다.

그리고 이 현상과 비슷한 걸 자신은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헬슨 사태 이후에 모노크롬에는 악마의 아이가 급격하게 늘었다.

그때의 원인은 대기 중에 퍼진 마기였다.

마기가 몸에 누적되면서 스트레스를 받은 아이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극대화하여 악마의 아이로 만들었다.

지금 전장의 상황은 어떠한가?

온 곳에 마물의 마기에 오염된 살점과 피가 흩날리고 있다.

대기에는 헬슨 사태 이후 모노크롬보다도 짙은 마기가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것이 전투로 정신이 깎여나간 기사를 악마의 아이로 만든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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