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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87화 (87/92)

〈 87화 〉 전면전

* * *

나무를 깎아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천막을 덮었을 뿐인, 전초기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허름한 막사.

그곳에는 연합군의 대표 격들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 모여있었다.

하얀 제복을 각이 나도록 입은 칼리고 제국의 황자.

늙으면서 온몸의 털이 하얗게 변했지만, 여전히 그 카리스마를 잃지 않은 늙은 사자와 같은 리처드 폰 오르도.

검은 복장에 핏빛 십자가가 새겨지고 금속 건틀릿을 착용한 제2 사도.

인간계의 수호자인 용사 아일라.

마지막으로 가장 늦게 합류를 한 마족과의 전쟁 경험이 있고, 마왕성까지 도달한 적이 있는 인류의 영웅이라 불리는 베네쿠스의 대마법사인 카펠라였다.

진중한 분위기 속에서 카펠라가 전이해오자 막사 내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에 집중되었다.

그 뒤에는 카펠라만 있는 것이 아닌, 은발의 두 성녀와 여우를 업은 소년이 있었다.

엄한 분위기에서 지루하듯이 머리카락에 바람을 불고 있던 아일라는 애런을 보고 반갑다는 듯이 동그랗게 뜨고 손을 흔들었다.

애런도 그걸 보고는 피식 웃고 손을 흔들어줬다.

"다 모였네."

카펠라는 원탁의 남은 자리에 가서 앉고는 말했다.

그 순간 잠시 멈췄던 회의는 다시 진행되었다.

"카펠라 님, 저 분들이 성녀님과 전생 용사였다는 분들입니까?"

칼리고 제국의 황자가 전이해온 사람들을 가늠해보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은발을 가진 두 여성에게서는 보기만 하더라도 넘쳐나는 신성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용사였다는 자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의 기운이었다.

"맞아. 지금 상황은 어때."

그 말에 막사 내에 마법으로 화면을 띄어놓았던 베네쿠스의 마탑주 한 명이 설명했다.

"보시다시피 용의 협곡에서 용들과 합류 후 그대로 쉬지 않고 인간계로 진격해오고 있습니다. 일단 곳곳에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피난 권고를 해놨습니다만, 도망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래. 연합군의 준비는?"

그 물음에는 노장인 리처드가 중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적들의 침입 경로를 예상해서 분배해놨습니다. 남은 건 지금 막사 내에 있는 핵심적인 사람들뿐입니다."

이미 늙을 대로 늙은 리처드가 훨씬 어려 보이는 카펠라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은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실제 나이를 생각한다면 당연하였다.

"... 그래."

카펠라는 원탁 위에 수정 구슬들을 콰르르 쏟았다.

애런이 미호에게 마나 회복을 시켜주는 동안 만들어놨던 연락 수단이었다.

시끄럽고 마법의 갈취가 일어나는 전장 속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특별히 공을 들여서 만든 물건들이었다.

"이걸로 전장의 상황은 공유될 거야."

손가락으로 수정 구슬을 톡 건드리니, 막사 내에 띄워져 있는 화면과 똑같은 화면이 수정 구슬에서 떠올랐다.

"미리 마법을 걸어둬서 각 구역에 있는 인원들에 대한 상태도 알 수 있고, 하나하나 연락을 할 수도 있으니 현장에 있는 지휘자가 알아서 활용하도록 해."

"네."

각국의 대표들은 수정 구슬을 하나씩 들고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미 말했던 거지만, 우리가 방어만 하고 있다고 전쟁은 끝나지 않아. 결국은 마왕이나 마신의 목을 베야지 끝나. 그건 모두 이해했을 거야."

인간의 악함에서 태어나는 악마들은 전쟁이 지속하면 지속할수록 늘어만 가는 인간의 부정적인 생각에서 그 수를 늘려갈 것이다.

결국, 시간은 마족의 편이란 소리다.

그러니 인간들이 할 것은 새로 생겨나는 것보다 빠르게 마족들을 죽이고, 마신을 죽여 그들의 진격을 막아내야만 한다는 소리였다.

"그러기 위해서 상황에 따라 소수 인원은 마왕을 죽이기 위해서 움직일 거야. 그런 상황이 된다면 최대한 힘을 온존할 수 있도록 호위해주길 바라."

옛날 전쟁 때는 아리아나와 카펠라, 그리고 연합군들이 애런을 호위했듯이.

이번에는 마왕과 대항할 수 있는 카펠라와 아일라의 힘을 최대한 아껴야만 했다.

최대 전력인 둘이 힘을 아끼는 만큼 다른 사람들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는 어쩔 수 있는 것이었다.

각국의 대표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머지는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전달할 테니까 이제 제자리로 가봐. 여기까지 마족들이 오는 것도 금방이야."

카펠라는 나가보라는 듯이 손짓을 했고, 대표들은 아직 궁금한 것이 있는 눈치였지만 군말하지 않고 막사를 나섰다.

"오빠!"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과 있어서 어색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던 아일라가 이제 다 아는 얼굴만 남자 애런에게 달려들었다.

"이제 같이 있어도 된대!"

"그래, 그래."

애런은 피식 웃으면서 아일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분명 마족과의 전쟁은 인간들에게 있어서 최악인 상황이지만, 아일라에게 있어서는 합법적으로 가족과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었다.

"이자벨라 님도 그 모습으로는 오랜만이에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살아있는 시체였던 이자벨라도 멀쩡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달려갔다.

"네, 오랜만이네요."

라즈니의 몸으로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본인의 몸으로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던 이자벨라도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었다.

이자벨라가 전부터 원하던 그림이었다.

쌍둥이 자매와 애런과 아일라가 모두 있는 상황이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마족과의 전쟁이라면 성녀인 자신과 도로시가 할 고생은 이제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건 용사인 아일라도 마찬가지고, 전생 용사인 애런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기뻐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자, 이제 감동의 재회는 그만하고 집중해."

짝.

카펠라가 박수를 치면서 막사 내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다른 사람들은 다 물렸는데, 왜 너희만 여기 남아있는지 알겠어?"

애런은 여기에 남은 사람들을 둘러봤다.

대마법사에 용사, 성녀… 하나같이 이 전쟁을 이끌어나갈 중요한 인물들만 남아있었다.

"마왕을 죽일 때 움직일 인원들이구나."

그 말이 맞는다는 듯 카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나 애런은 이미 마왕 토벌을 해본 적이 있으니 말할 것도 없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어. 용사인 아일라는 경험이 없기는 해도 무식하게 강하니 마왕을 죽일 때 꼭 필요하지."

그리고 쌍둥이 성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희는 상황에 따라 달라. 성녀의 역할은 아주 다양하니까 말이야. 마족을 약화시키고 죽이는 것, 아군의 강화와 회복… 너희는 이 모든 걸 동시에 해내야 해."

개인에게 모든 힘을 쏟아붓는 것보다도 인류 전체에게 버프를 걸어주는 것이 전선을 유지하는 것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마왕 토벌에 투입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었다.

"엄청 많네요…."

"전 성녀님은 이걸 혼자서 하셨나요?"

이자벨라와 도로시가 카펠라에게 물었다.

어떻게 보면 마왕을 토벌하러 가는 것보다도 해야 할 일이 더 많고, 부담도 가는 일이었다.

"그래, 아리아나 님은 여기에 마왕 토벌에도 참여했었어."

도로시는 입을 쩍 벌리고 대성당에서 만났던 자신의 선배, 아리아나를 떠올렸다.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능력마저도 완벽한 성녀였다.

과연 자신이 그런 성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아리아나 님과 너희를 비교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야. 그분도 애런처럼 규격을 벗어난 인간이었으니까."

"맞아요."

애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아리아나가 분노의 마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만 봐도, 전생 애런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거기다가 그분은 성녀를 좀 더 오래 하셨고 경험도 많았으니까요."

전란의 시대.

이자벨라와 도로시처럼 어린 나이에 성녀로 선택받았던 아리아나는 어려서부터 전장을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았다.

그 실전 경험이 지금의 성녀와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나마 나은 점이 있다면 이 시대에는 악마의 아이가 존재했고, 이자벨라는 그것을 통해서 실전 경험을 나름 쌓았다는 것.

도로시는 치천사의 대행자를 허락받으며 6장의 날개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이 아리아나와의 격차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테다.

"그러니 너희가 마왕 토벌에 참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 전쟁 속에서 얼마나 성장하느냐에 따라 달린 거야."

"그렇군요… 이해했어요."

이자벨라와 도로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보다 더 성장해야지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 사실이 더더욱 노력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카펠라는 둘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그럼 남은 아일라와 애런, 미호는 마왕을 토벌하는 조야. 나 같은 경우는 다른 마왕도 견제해야 하니 완전하게 너희와 행동할 수는 없어."

"카펠라, 너는 거기서 더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느냐?"

미호는 전에 들었던 인간계 전체를 뒤덮는 마법진을 발동시킬 거라던 얘기를 떠올리고 물었다.

"응, 물론 그것도 해야지."

"그럼 네게 가는 부담이 너무 많지 않느냐? 마왕에 마법진이며 동시에 연합군의 지휘까지 맡아야 한다니."

"... 가장 경험이 많은 내가 맡아야지. 애런과 아리아나 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너무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 그래 봤자 좋은 거 없는 건 내가 잘 알아."

애런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돌이켜보면 전생에 감정이 죽어버렸던 것도 모든 것을 홀로 해내려고 하다가, 그 부담감을 버티기 위해서 그러했던 것 같았다.

카펠라가 자신처럼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앞으로도 미소를 잃지 않았으면 하고, 기계처럼 되지 않길 바랐다.

"걱정 마요. 난 내 할 일만 할 뿐이야. 나머지는 아일라랑 애런한테 시킬 거니까 그때 가서 불만이나 말하지 마."

"알겠어."

"맡겨만 둬요."

아일라는 자신 있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이제는 도울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애런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도와주겠다는 그 모습이 귀여워 보여서 애런은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므해."

"기특해서 그래. 기특해서."

치직.

그때 카펠라가 가지고 있는 수정 구슬이 빛나며 통신이 연결되었다.

­ 오르도 왕국의 리처드 폰 오르도다. 마물들이 인간계를 통과하는 것이 보이는군.

리처드가 수정 구슬을 통해 보이는 광경을 비추자, 파도처럼 몰려오는 마물들이 보였다.

그것은 지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하늘의 태양마저도 뒤덮어 마물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빛이 없었다.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나뉘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몰고 다니는 마물들은 악 그 자체라 할 만큼 야만적이고, 흉측했다.

리처드가 이끄는 연합군은 창과 방패를 들고, 마물들을 맞받아칠 준비를 하였다.

"이자벨라, 도로시. 저곳이 너희가 가야 할 전장이야. 가서 도와주도록 해."

"네."

이자벨라와 도로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정 구슬을 받아서 리처드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수정 구슬이 비추는 화면에서 빛과 어둠이 충돌했다.

둘은 섞이고, 이제 누가 빛이고 어둠이고 할 것도 없었다.

그곳은 이제 붉은 빛이 뒤덮었다.

마물과 사람의 살점과 핏방울이 튀기는 전장이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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