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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86화 (86/92)

〈 86화 〉 전면전

* * *

"..."

충분히 마나를 회복한 미호는 마탑 정상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창피함으로 볼에서부터 귀까지 붉게 물들어있었다.

애런과 관계를 맺으면서 내뱉었던 말을 밖에 있던 이자벨라나 도로시가 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서였다.

"미호 님, 왜 그러고 계세요?"

그런 미호에게 말을 거는 건 이자벨라였다.

딱 봐도 놀렸을 때 반응이 재밌을 것 같았기에, 이유를 알면서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 혹시 들었느냐?"

이자벨라의 반응은 마치 자신이 한 말을 못 들은 것 같아 보였다.

미호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고개를 들었다.

"뭐를요?"

아니.

이 여자는 다 들은 게 분명했다.

히죽히죽 웃으면서 자신을 놀리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미호는 고개를 홱 숙이면서 마나 회복이라는 이유로 어깨가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는 애런을 흘겨봤다.

이 부담스러운 여자를 좀 어떻게든 해달라는 듯이 애런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봤지만, 애런은 영 반응이 없었다.

아일라가 전장의 선두에 서게 된다는 것이 걱정되는지, 표정은 구겨진 상태였고 초조해하는 것이 공유되어 미호에게도 전해졌다.

"미호 님, 괜찮으신가요? 다치신 건 아닌가요? 그렇다면 제가 회복 마법을 써 드릴 수도 있어요. 이래 보여도 저 성녀잖아요? 어디 다쳤는지 말씀만 하시면 바로 도와드릴게요."

쿡쿡 웃으면서 미호의 옆에 앉은 이자벨라가 미호의 배에 손을 갖다 댔다.

찌부러졌으면 회복시켜주겠다는 말.

미호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창피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 그만하거라…! 멀쩡하니까 말이다."

"네? 하지만 얼굴은 붉고 열도 나는 것 같은데요? 왜 그런 건가요?"

"으음… 더워서 그런 거다… 더워서."

미호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흐르는 식은땀을 식혔다.

앞에 앉아있는 도로시의 시선도 심상치 않은 것이 가시방석에 앉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자신은 카펠라의 허락도 받았고, 애런과 강제로 하거나 그런 상황을 만든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인가.

굳이 따지자면 아직 아무 관계도 아닌, 도로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나?

없다.

자신은 떳떳하며 창피한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그리 생각하니 자신감이 생기고, 오히려 자신이 도둑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쳐다보는 시선이 불편했다.

그래서 미호는 도로시에게 보란 듯이 애런에게 더 붙었고, 둘 사이에 놓여있던 손을 자신의 허리에 둘렀다.

"...!"

그걸 본 도로시는 깜짝 놀라서 눈동자가 커졌다.

이내 이를 꽉 깨물고, 다리를 떨 거나 주먹을 쥐거나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어…."

이자벨라는 자신의 행동이 오히려 미호가 반발하도록 한 건 아닌가 생각하며, 수습을 해보려는 듯 입을 열었다.

"미호 님? 더우시면 조금 애런 님한테서 떨어지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마나 회복을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 더워도 감내해야 한다."

"그… 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일주일 내내 회복을 하기는 했다만."

미호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럽나?

나는 일주일 동안 네가 상상만 하는 걸 실제로 했는데.

노려보기만 하면 어쩔 건데 라는 식으로.

"마왕이라는 존재는 상식을 벗어난 존재이니 말이다. 마나가 얼마만큼 있더라도 부족할 테지. 조금이라도 더 모아두는 편이 애런에게도 도움이 될 테지."

미호를 놀리면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순한 동물로 생각했던 이자벨라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지금은 놀리는 것이 아니라, 미호의 기분을 맞춰줘서 울상이 된 동생을 달래줘야 할 것 같았다.

이자벨라는 미호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미호 님… 놀려서 죄송해요. 그만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 말에 오랜만의 승리감에 젖은 미호는 더더욱 기세등등해졌다.

"뭘 그만하라는 것이냐? 나는 마땅히 해야 할 행동만을 하고 있다만."

"그렇기는 한데요… 그래도 너무 기고만장해하시면 카펠라 님이 화내지 않으실까요?"

미호는 인간계의 연합군과 전쟁에 대해서 상의를 하러 간 카펠라를 떠올렸다.

지금 이 자리에 없기는 했지만, 만약 봤다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어제만 해도 대놓고 경고를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잠결에 카펠라가 자신을 배려했다는 사실을 듣고도 너무 주제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나니 조금은 떨어지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해서 살짝 거리를 벌리려고 하니.

"애런?"

애런이 옆에 앉아있던 미호를 번쩍 들어서 무릎 위에 앉히는 것이었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는 도로시뿐만이 아닌, 이자벨라와 당사자인 미호도 놀랐다.

작은 아이의 모습을 한 미호는 무릎 위에 있으니 애런이 꽉 껴안고 머리 위에 턱을 올려두기에 딱 좋은 크기였다.

안 그래도 아일라의 일 때문에 심란했던 애런은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방법을 생각하다가 이런 일을 벌인 것이었다.

거기다가 마나 회복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이기도 했으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한 것이다.

"싫으면 말해."

분명 아까까지는 거리를 벌려야겠다고 생각한 미호였지만, 차마 싫다고 말은 하지 못하겠고 괜찮다는 뜻을 담아 볼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애런은 생각에 잠긴 채로 턱을 움직여서 쫑긋 튀어나온 귀를 툭툭 건드렸고, 민감한 귀가 건드려질 때마다 미호는 어깨를 떨면서 눈만 깜빡거렸다.

도로시가 뭐라 말도 못 하고 패배감에 이만 바득바득 갈고 있을 때.

덜컥.

마탑 정상에 있는 문이 열리며 연합군과 상의를 하러 갔던 카펠라가 돌아왔다.

"..."

카펠라는 돌아오자마자 보이는 애런의 품에 안겨있는 미호를 보고 혀를 찼다.

그래도 뭐라고 하지 않은 건 어젯밤에 애런이 했던 말 때문이고, 곰돌이 인형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일단 중요한 얘기부터 할게."

카펠라가 손짓을 하자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모두 차단되고 어두운 상태가 되었다.

또 한 번의 손짓에 푸른 화면에 지도가 떠올라 현재 상황에 대한 간략한 정보가 나타났다.

"마족들은 이제 용의 협곡을 지났어. 도마뱀 놈들이랑 싸우면서 조금이나마 전력이 소모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베로니카 때문이구나."

장로 용을 자신의 소환수로 거느리고 다니는 베로니카.

그녀의 명령 한 번이면 용의 협곡에 있는 장로 용 휘하의 용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리며 오히려 협력을 할 테다.

"맞아. 안 그래도 차이가 나던 전력이었는데, 적의 전력은 더더욱 강해졌어. 여기서 희망을 잃은 멍청이들도 많았지."

연합군과 상의를 할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카펠라는 한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인간계의 전력은 칼리고 제국의 과학 병기와 오르도 왕국의 기사들, 베네쿠스의 마법사, 앙겔로크라티카의 성직자와 이단심문관. 마지막으로 용사인 아일라야."

아일라의 이름에 애런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마왕을 죽이려고 했던 것인데… 평범한 몸으로는 제시간에 맞추지 못한 것이었다.

"최대 전력인 아일라가 아무리 강하다고는 해도, 결국은 혼자야. 7명의 마왕과 마신, 장로 용과 정령 왕이 인간계 곳곳을 습격하면 대처하지 못 하는 일도 일어날 거야."

"그렇겠지… 용사라고 하더라도 신은 아니니까."

전생에 용사였던 애런도 마왕을 손쉽게 죽일 정도로 강했지만, 인간계에 일어나는 일을 모두 처리하지는 못했다.

마물의 공격을 막아내는 아리아나의 방어막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만큼은 막지 못했다.

"그래서 마족은 전력을 분산시켜서 전쟁을 시작할 거야. 아마, 7명의 마왕이 있는 만큼 일곱 군데에서 공격을 할 거라 예상하고 인간계도 전력을 나눴어."

지도에는 큼지막한 빨간 점 7개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에 맞서듯 푸른 점 7개가 나타나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일단, 베네쿠스의 5명의 마탑주가 마왕 하나당 한 명씩 붙을 거야."

"마왕은 7명이다만 마탑주는 5명이 아닌가?"

그때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미호가 물었다.

"맞아. 그러니까 그에 필적하는 아일라가 하나를 맡을 것이고, 내가 2명의 마왕을 맡을 거야."

"흐음… 가능하겠느냐?"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 이미 마왕과의 전쟁을 겪은 적이 있고, 그 누구보다 뛰어난 대마법사야."

미호는 카펠라의 그 말이 객기를 부리는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실제로 베로니카와 싸울 때 보여줬던 역량은 이 시대 최고의 마법사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고, 노련했다.

오히려 2곳을 맡은 카펠라와 비교해도 다른 마탑주들이 불안할 정도였다.

"베로니카가 바로 전장의 선두에 서지는 않을 거야. 아일라의 전력은 그때를 위해서 온존해두는 것이 좋을 테니, 웬만하면 앙겔로크라티카의 제2 사도가 그 역할을 대신하기로 했어."

"제2 사도라고요?"

사도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이 있는 이자벨라와 도로시가 반응했다.

그럴 만 하다고 생각했기에 카펠라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너희가 사도를 안 좋게 생각하는 건 이해하지만, 전쟁에서는 꼭 필요한 전력 중 하나야. 가브리엘과 교황을 잃은 지금은 더더욱 말이지."

"그렇겠죠…."

이자벨라가 이해하는 모습을 보고 카펠라는 다시 말했다.

"덤으로 애런의 존재와 두 성녀도 내가 데리고 있다고 말해놨어."

"괜찮았어?"

제2 사도의 처지에서 보자면 애런은 악마와 다름없고, 두 성녀는 교황과 가브리엘의 믿음을 저버린 자들이었다.

그런 그가 반발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발하면 어쩌겠어? 연합군에서 날고 기는 녀석들이라고 해봤자 내 말에 토 달 녀석은 없어. 마족과의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녀석들에게는 내가 가장 중요한 전력이고, 내가 곧 연합군의 머리야."

"그렇겠지…."

"덤으로 전생 용사라고 해줬더니 어느 정도 이해하는 분위기였어. 그러니 이제 쫓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활동해도 괜찮을 거에요."

카펠라는 그리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은 아일라에게 폐가 될까 봐 같이 있어 주지 못했던 애런에게는 가장 좋은 소식이었다.

"아일라도 좋아하더라. 내가 베네쿠스로 돌아오기 전에는 고맙다면서 날 껴안을 정도로 말이야."

"그래, 고마워 카펠라.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아일라와 같이 있는 건 어려웠을 텐데 말이야."

아일라가 선두에 서는 것에 불안함을 느꼈던 애런은 조금이나마 불안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자신이 곁에 있어 줄 수 있다면 경험이 부족한 아일라를 도와줄 수 있고, 서로에게 든든할 테니 말이다.

"마족이 공격해오는 것은 멀지 않았어. 우리도 연합군과 합류할 거니 따라오도록 해."

카펠라의 짧은 영창에 방안에는 마나가 가득해졌고, 이내 푸른 빛에 휩싸이며 연합군의 전초기지로 전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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