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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82화 (82/92)

〈 82화 〉 대성당

* * *

아리아나는 날개에 걸터앉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오래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려고 하니 불쾌한 기분이 절로 들어 혀를 차고 입을 열었다.

"애런, 얘기는 네가 마왕을 죽인 뒤부터 시작해."

"네."

애런은 그 뒤로 용의 협곡 근처에 있는 숲에 은거했기 때문에 인간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왜 아리아나는 죽은 척 연기를 하고, 마왕이 되었으며, 미카엘이 아닌 치천사는 누구인가.

궁금한 건 많았다.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거 기억나? 고생한 만큼 보답을 받아야 한다고 했던 말."

"네, 기억나죠. 마왕 토벌에 떠났던 사람들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했던 거요."

잊을 리가 없다.

실제로 애런도 행복해지고 싶었기에 그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하지만 용사라는 사명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고,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행복을 바랐다.

"나는 보답받을 수 있을 줄 알았어. 아니, 받아야 하는 게 옳은 일이었지. 하지만 실상은 달랐어."

아리아나의 입술에서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앙겔로크라티카로 돌아온 나는 행복한 삶은커녕 다시 성녀로서의 삶으로 돌아온 거야. 사람들의 행복을 빌어주고, 축복해주고…."

어떤 삶일지 상상이 갔다.

모노크롬에 지내면서 이자벨라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보았으니까.

아리아나는 이미 완전한 성녀였으니 그것보다 더 힘든 삶이었을 것 같았다.

"그래, 남의 행복을 빌어주지만, 나의 행복은 바랄 수 없는 삶이었지. 사실 나는 이 정도까지는 괜찮았어.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한다면 나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네, 아리아나 님은 그런 분이었죠."

"하지만 네가 마왕을 죽이고 새로운 마왕이 탄생했을 때, 인간들에게는 저주가 내려졌지. 마왕의 부활 그릇인 악마의 아이. 지금 너처럼 말이야."

아리아나가 애런의 어깨에 있는 역십자가의 흉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인간들은 인간을 죽이기 시작했지. 불과 10살에 불과했던 자기 아이를 죽이고, 남의 아이들을 때려죽이고, 악마를 낳았다는 이유로 그 가족들도 악마라고 부르며 죽여버렸어."

애런이 보지 못했던 악마의 아이가 생겼을 초기의 상황은 지금보다 더 잔혹했다.

사람들은 사람이 악마가 된다는 것에 공포를 느꼈고, 그 증상이 발현하는 10대 아이들을 가두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 볼 일 없는 벽돌로 건물을 짓고 철창으로 막아둔 감옥이었다.

하지만 악마의 아이 수가 늘어나자,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그 크기를 점점 늘려갔다.

조금씩 커지며 그만큼 악마의 아이가 늘어나자 사람들은 이제 귀찮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그들을 돌봐줘야 하지? 악마면 그냥 죽이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내가 막아선 거야. 악마의 아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사람인 몸. 그 아이들이 부모에게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돌을 맞으며 죽기를 바라지 않았으니까."

아리아나의 의견으로 감옥에는 악마의 아이가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화장실만 있던 공간은 방이 되었고,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부엌이 생기고, 잘 수 있는 침실이 생기며 집이 되었다.

아이들이 늘어나니 식자재를 조달할 필요도 있었고, 아이들의 교육을 빼먹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식당을 만들고 학교를 만들었다.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닐 수 있도록 운동장을 만들고, 작은 사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일이 터진 거야. 모노크롬에 숨어든 성기사 무리가 악마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인 거지."

아리아나가 주먹을 쥐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악마의 아이는 죽이는 것이 인간 입장에서는 옳아. 맞는 일이지. 하지만 그때의 나는 인간의 편을 들고 싶지 않았거든. 배은망덕한 놈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아이들을 죽이는 학살자. 뭐, 이렇게 생각하며 분노했다는 거지."

"그게 마왕이 된 것과 관련이 있나요?"

애런의 질문에 아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한테 접근한 치천사가 있어."

순백의 날개와 칠흑의 날개를 활짝 펼쳐서 보여주며.

"네가 아는 치천사는 순백의 날개 6장을 가진 미카엘이겠지.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치천사가 있단 말이야. 더 강한 힘을 위해서 타락하고 순백의 날개에 칠흑의 날개를 더한 치천사가."

"그자가 마신인가요?"

치천사의 힘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강한 힘을 바라서 된 존재라면 마왕 이상의 마신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녀는 마신도 아니고 마왕도 아니야.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 어딘가에 박혀서 아직도 힘을 기르는 중이지."

"네."

"그녀… 아니, 계속 이렇게 부르기도 뭣하네. 원래 이름은 부르지 말랬는데 뭔 상관이겠어? 걔 이름은 루시야. 치천사 시절에는 루시퍼였다고 하는데, 타락하면서 그 이름은 버렸다고 하네."

처음 듣는 얘기다.

치천사가 2명이라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치천사 하나가 타락했다는 것은 쉬이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루시의 계획 중에는 인간을 멸하는 것도 포함되어있으니, 힘을 줄 테니 자신을 도우라고 하더라. 그 과정에 나는 한 번 죽었어. 미카엘과의 계약을 끝내야 하니까 말이야. 가브리엘은 그걸 보고 내가 죽었다고 판단했던 거지."

"그런가요."

실제로 죽고 다른 치천사와 계약을 했으니, 미카엘에게 선택받은 성녀는 없는 셈이었다.

그걸로 이자벨라와 도로시가 선택받은 것도 말이 되었다.

"나는 루시에게 힘만 받은 게 아니라 내가 모르던 세계에 대한 것도 알게 되었지. 그중에 마왕이 7명 있고, 마신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단 말이지. 인간들에게 분노한 나는 마계로 가서 분노의 마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어."

"..."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미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듣고 있다 보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다만, 조금 전에 인간을 멸한다고 했는데 그 말은 곧 우리의 적이라는 게 아닌가?"

애런도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던 것.

아리아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피식 웃으면서 "그래." 라고 답할 뿐이었다.

"나는 이제 타락한 성녀고, 마왕이고, 인류의 적이지. 애런, 네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나는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어. 난 악마보다 더 악마같은 인간을 멸할 거야."

애런과 오랜 시간 같이 지냈던 아리아나였기에, 애런이 조용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행동을 긍정해주고, 아이들을 죽였던 성기사를 부정하고 공감해주더라도 이미 오래된 응어리는 가슴 속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생각을 바꿀 생각도, 바꿀 수도 없다.

"자, 이야기는 끝이야. 사실 할 얘기는 더 있기는 했는데, 이제 시간이 부족하네."

아리아나가 펼쳐두었던 마기가 서서히 태양 빛에 정화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은 오늘따라 유독 밝았는데, 그건 마기에 둘러싸여 자신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미카엘이 경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기 쉽네. 맞아. 이건 미카엘이 하고 있는 짓이야. 미카엘의 화신인 가브리엘을 미리 짓이겨놓았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미카엘이 강림했을 거야."

날개에 걸터앉아있던 아리아나는 하늘에 손가락으로 욕을 날리면서 일어났다.

"보고 있냐? 미카엘, 이 개자식아. 너는 나한테도 애런한테도 가혹한 운명을 강요했으면서 그에 대해 보답은 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이번 성녀에게도 또 그런 운명을 강요하는구나."

그 말에는 애런도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뭐, 내가 여기 왔던 이유는 전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에 천개를 회수하러 왔던 것뿐이야."

"전쟁이요?"

"아, 맞다. 네게 아직 말해주지 않았구나."

아리아나는 이제 작아질 대로 작아져 손바닥 크기만 해진 천개를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탐욕의 마왕 베로니카가 마신과 싸움에서 이겼어. 이제는 탐욕의 마신이라고 부르는 편이 맞겠네. 어쨌든, 그녀는 전 마신처럼 인간계를 내버려 둘 생각이 없어. 적극적으로 인간들을 학살하고 힘을 기를 생각을 하는 녀석이야."

베로니카.

그 말을 들은 애런은 베네쿠스에서 베로니카를 놓쳤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는 분명 카펠라가 한 끗 차이로 베로니카를 놓쳤다.

그걸 후회하게 될 거라고 카펠라가 그랬지만, 이렇게 빨리 그런 상황이 될 줄은 몰랐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이제는 마족들이 힘 조절도 할 생각이 없어. 그들은 인간계를 넘어서 천계까지 노릴 모양이니까."

"천계요? 천사와 전면전이라도 펼치려는 건가요?"

"그렇지. 너도 봤지? 베로니카가 만들어낸 악마의 아이."

대성당에 침입하기 전에 봤던 마물과 같던 악마의 아이.

그건 파이몬이 연구했던 약으로 만들어진 악마의 아이와는 다르다고 생각했기는 했지만, 베로니카가 생각해낸 거였나.

애런은 여러모로 베로니카를 놓친 것을 후회하게 되는 것 같았다.

"인간들은 그렇게 만들어서 천사들과의 전쟁에서 쓰려는 거야. 그 상태로 뇌를 건드려서 악마에 대한 공포심은 남겨둔 채 가축처럼 기르는 것도 생각하고 있던데."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막을 거니까요."

솔직하게 막을 자신은 없다.

지금은 너무나도 평범한 몸이고 전생처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내버려 두면 기껏 평범하게 살려고 했던 삶이, 행복해지려는 삶이 망가지게 된다.

그것만큼은 안 된다는 생각이 애런이 포기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래… 너는 이제 사랑하는 인간들이 있는 모양이네."

아리아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와서 마왕이 된 것을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아직도 성녀로 남아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었을까."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아리아나는 얼굴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몸을 홱 돌렸다.

"아리아나 님, 저에겐 당신도 그 중 한 명이에요. 거기다가 아리아나 님이 그랬잖아요? 고생을 했으니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요."

"후후, 기특한 말을 다 하네. 전생과 다른 사람인 것 같아. 아무튼, 다음에 볼 때는 적이야. 카펠라에게도 안부 전해주고."

펄럭­!

12장의 날개가 일제히 날갯짓을 했다.

순간 미호가 날아갈 정도의 강풍이 불면서 먼지가 일어났다.

"..."

뿌연 먼지가 다시 땅에 가라앉을 즈음에는 이미 분노의 마왕, 아리아나는 사라지고 없었다.

애런은 멍하니 아리아나가 날아간 방향을 보고 있었는데, 등에 매달린 미호가 볼을 주욱 잡아당겨서 정신을 차렸다.

"애런,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느냐."

"그렇지."

애런은 손에 들린 이자벨라의 작은 뇌를 바라봤다.

이걸로 모든 신체가 모였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차가운 지하실에서 얘기를 나누거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대화를 나누던 자매가 드디어 느긋하게 대화를 즐길 수 있다.

"이건 도로시 님이 해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자벨라를 다시 깨우는 건 쌍둥이 동생인 도로시가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애런은 도로시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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