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대성당
* * *
다가갈 수가 없다.
애런은 가브리엘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날아오는 깃털과 작은 태양 때문에 자꾸만 체력이 깎여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도 가브리엘과는 가까워지지 않는다.
이미 마기에 당한 경험이 있는 가브리엘은 애런이 쏘아낸 마기를 빛의 검으로 막아내고 주저 없이 검을 버렸다.
어차피 신성력은 무한하다. 검이야 만들어내면 된다.
하지만 저 몸을 갉아 먹을 듯한 마기는 상대에게 승기를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애런이 쏘아내는 마기만을 경계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가브리엘은 다가오지도 못하면서 계속 뛰어 체력을 낭비하고 있는 애런을 보며 물었다.
"네 머리통에 든 이자벨라 님의 뇌를 끄집어내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아. 이 새끼야."
"하! 다가오지도 못하면서 말입니까?"
쿠구구구…
앙겔로크라티카를 덮고 있던 금빛 방어막이 사라졌다.
도로시의 몸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깨달은 가브리엘은 승리를 확신하며 히죽 웃었다.
"도로시 마이어의 신성 마법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태양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
애런은 고개만 돌려서 대성당이 있는 방향을 봤다.
정말 도로시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성력을 한계까지 받아들였다면, 이 이상 싸우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 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지금은 가브리엘이 거리를 벌리고 있다지만, 등을 보인 순간 권능을 해제하고 목숨을 노릴 것이 뻔했다.
진퇴양난.
그것이 지금 애런의 상황을 아주 잘 표현하는 말이었다.
"애런, 어떡할 거냐. 가브리엘이 저 권능을 발동하고 있는 한 네가 노리기는 힘들 것 같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야."
애런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태양들을 올려다보았다.
일단 저것부터 막아야 한다.
그리 생각하며 온몸의 마기를 마검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촤르르르르!
하늘에 떠오른 거대한 바퀴가 회전하면서 앙겔로크라티카를 덮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태양은 하늘 덮개를 뚫지 못하고 소리조차 없이 존재가 사라졌다.
"천개…"
그 순간 애런과 가브리엘 둘 다 싸우는 것을 잊고 하늘을 바라봤다.
천개의 주인은 전 성녀인 아리아나다.
그녀가 아니면 작동할 수 없기에 대성당에 고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누가 저걸 움직였단 말인가?
아리아나는 죽었다.
모든 사람은 그렇게 알고 있다.
전 성녀가 죽었기에, 현 성녀인 이자벨라와 도로시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천개를 움직였단 말입니까."
가브리엘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검은 마기가 반구처럼 애런과 가브리엘을 덮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 속에서 가브리엘은 날개를 활짝 펼쳐 작은 태양들을 만들어내 빛을 발했다.
저벅저벅.
적막한 어둠 속.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브리엘은 그곳으로 작은 태양들을 날려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했다.
애런 베커라면 괜찮다. 그는 자신의 권능 때문에 손도 대지 못하니.
하지만 천개를 움직인 미지의 적은 경계해야 한다.
아직 적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지금 느껴지는 마기는 마왕과 필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녕."
그리고 여성의 목소리가 마기로 만들어진 반구 속에서 울려 퍼졌다.
태양이 소리가 나는 곳을 밝혔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백금발과 자색 눈동자.
마왕급의 마기를 두른 주제에 입고 있는 옷은 천사를 믿는 자들의 수녀복이다.
"... 아리아나 님?"
애런은 벙찐 표정으로 전 성녀, 아리아나를 바라봤다.
분명 죽었을 터인데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그리고 지금 느껴지는 이 거대한 마기는 어떻게 된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서 일어나서 애런은 그저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아리아나 님일리가 없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제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가브리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가브리엘… 그래, 네가 확인했겠지. 그리고 실제로 그때의 난 죽은 상태였을 거야. 하지만 난 죽지 않거든. 지금의 너와 교황처럼 말이야."
그 말에 둘은 아리아나의 죽음이 거짓된 것임을 눈치챘다.
실제로 이자벨라와 교황은 죽지 않는 존재였으니, 그와 비슷한 능력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성녀는 용사처럼 전대가 죽어야지 후계자에게 전해지는 힘이다.
아리아나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이자벨라와 도로시는 성녀란 말인가?
"아리아나 님, 이해가…"
"애런, 그건 가브리엘을 처리하고 천천히 얘기하자."
아리아나는 그렇게 말하고 가브리엘의 앞에 섰다.
"그 날개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12장의 날개라니… 거기다가 6장은 악마의 것처럼 칠흑이지 않습니까."
"너는 아직도 날개의 수에 연연하니? 아휴, 이러니 앙겔로크라티카의 장래가 어둡다고 생각했지."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가브리엘은 아리아나를 향해 6장의 날개를 힘껏 휘둘렀다.
"...?"
칼날과 같은 깃털이 날아가고 작은 태양이 날아가야 할 터인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깃털 몇개가 빠져 바닥에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해하지 못하겠지?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지."
"..."
가브리엘은 다시 한번 날개를 휘둘렀다.
하지만 공기를 가르며 바람이 조금 불었을 뿐,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기적을 일으킬 수가 없다.
자신의 믿음과 존재가 부정당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가브리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브리엘, 그거 아니? 마계에 마왕은 총 7명이 있단다."
"...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그렇겠지. 그래, 아무튼 내가 할 얘기는 세상에는 네가 모르는 일들이 참 많단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겁니까."
가브리엘은 초조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너는 미카엘이 유일한 치천사라 믿어 의심치 않겠지만…"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뚝뚝 떨어졌다.
"실제로 치천사는 2명이었단다."
후두두둑!
가브리엘의 등에 돋아난 6장의 날개가 힘을 잃고 우수수 땅에 떨어졌다.
그걸 본 가브리엘은 눈을 크게 뜨고 확인을 해보려는 듯 등을 더듬었다.
하지만 만져지는 것은 그저 딱딱한 자신의 등이었다.
그것 외에 만져졌던 부드러운 날개 같은 것은 이미 땅에 떨어진 것이었다.
"이건 애런이 물어본 것에도 답이 되는 거야. 왜 성녀가 여러 명이 있는 것인가. 그건 내가 미카엘이 아닌 다른 치천사에게 선택받은 성녀이기 때문이지."
펄럭!
아리아나가 12장의 날개를 펼치고 가브리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발을 옮겼다.
"가브리엘, 왜 네 믿음이 미카엘에게 닿지 않는지 알겠어?"
"설마."
가브리엘의 머릿속에 떠오른 불길한 생각.
아리아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도 이제 알아챘겠지. 네 기도는 지금 이 공간에서 미카엘에게 닿지 않아. 나를 선택한 치천사에게 돌아갈 뿐이지."
"그런 일이…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기도를 가로챈다?
그런 것은 들어본 적도 없다. 미카엘의 눈과 귀를 피해 그런 짓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가브리엘은 자신을 둘러싼 마기를 보았다.
"설마, 설마… 이 마기가 미카엘 님의 눈과 귀를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가브리엘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아리아나는 어디 해보라는 듯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전지전능하신 미카엘 님에게 바랍니다. 당신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는 저, 가브리엘 플라벨룸이 이 위기와 고난을 넘길 수 있는 기적을 내려주시옵소서."
가브리엘은 마기에 뒤덮여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곳에는 어두운 마기만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고 있을 뿐, 찬란한 빛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포기했으려나?"
"아니, 아직입니다!"
쾅!
머리를 땅에 박은 가브리엘이 크게 소리 내 외쳤다.
"미카엘 님! 당신의 대행자, 당신을 믿고 따르는, 가브리엘 플라벨룸이 바라옵건대, 저의 믿음을 지킬 힘을 빌려주십시오!"
쾅! 쾅!
머리가 땅을 내려치는 소리가 몇 번 울려 퍼졌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가브리엘은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로 눈앞에 있는 아리아나를 바라봤다.
"이제 포기했니?"
"... 이런 일이… 이건 거짓입니다. 저는, 저는 지금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이 믿는 천사가 기적을 내려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죽도록 내버려 두는 상황에 가브리엘은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아리아나를 선택한 치천사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때까지 무한한 믿음을 보였는데, 어찌 이리도 무정하단 말인가.
가브리엘은 벅차오르는 감정에 땅에 머리를 박고 흐느꼈다.
"저런… 포기는 하지 않고 현실을 부정하는구나. 참 지독한 녀석이야 너도."
콰직!
아리아나는 무심하게 발로 가브리엘의 머리를 짓밟았다.
미약한 정화의 불이 머리를 다시 회복시키려고 활활 타올랐다.
"야, 루시. 뭐 하고 있는 거야?"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하늘을 보며 말하자, 어둠을 밝히던 작은 빛도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아리아나는 불쾌한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반만 남은 머리를 짓밟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발을 땅에 비비며 부숴놓다 못해 아주 가루를 내놓았다.
그럴 때마다 가브리엘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그 떨림은 이내 멎어 들었다.
"불쌍한 아이구나."
아리아나는 꾸물거리며 다시 붙고 있는 이자벨라의 뇌를 보며 슬프게 말했다.
그녀의 손에서 따스한 빛이 나오더니 이자벨라의 뇌 반쪽이 공중에 떠올라 자연스레 재생되었다.
"애런, 저 자가 전 성녀냐?"
애런의 등에 가만히 매달려있던 미호가 물었다.
"응, 내가 용사였던 시절 같이 마왕을 죽이러 갔던 성녀님이야."
"허나 느껴지는 기운은…"
미호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모든 일을 끝마친 아리아나가 몸을 홱 돌려 손에 이자벨라의 뇌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런, 오랜만이네. 몸은 바뀌어도 알아볼 수는 있겠어."
아리아나는 손이 든 이자벨라의 뇌를 애런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반갑다는 듯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리아나 님."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알겠어. 왜 마왕이 되었냐는 그런거잖아?"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6장의 날개를 의자처럼 만들어서 그 위에 걸터앉았다.
"잘 알고 있네요. 저랑 같이 마왕을 죽이러갔던 성녀님이 어째서 마왕이 된거죠?"
"에휴, 오랜만에 만났는데 하는 소리가 그런거야? 나는 네가 환생한 것도 궁금한데, 그것부터 얘기해주지?"
"아리아나 님."
애런이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아리아나는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 말해주면 될 거 아니야. 쓸데없이 진지하기만 해가지고…"
그리고 아리아나는 입을 열었다.
"조금 길고 지루한 얘기가 될거야. 그보다 그 등에 매달린 여우 귀엽네. 얘기하는 동안 잠깐 빌려주면 안 돼?"
"뭐… 좋아요."
"애, 애런?!"
미호는 딱 봐도 마왕인 아리아나에게 자신을 넘기려는 애런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목에 팔을 두르고 꽉 매달렸다.
"싫어하네. 그럼 어쩔 수 없는거고."
미호를 받으려고 팔을 펴고 있던 아리아나는 실망한 표정으로 팔을 내렸다.
"좋아, 마왕을 토벌하고 헤어졌던 날부터 내가 사라지기 전까지 있었던 일에 대한 것과 왜 내가 마왕이 되었고, 나를 선택한 치천사는 누구인지 말해줄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