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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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당신들 성녀인 저를 납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모르시나요?"
라즈니는 몸을 벌벌 떨면서 말했다. 애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앙겔로크라티카… 아니, 더 나아가서 인간들을 전부 적으로 돌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요! 서, 성녀는 마족에 대항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니까요…!"
"아일라, 나도 코코아 한 잔 태워다오.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더니 목이 마르다."
"따라와, 태워줄게."
라즈니의 위협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미호와 아일라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대화를 했다.
성녀인 자신을 납치하고도 이리 태연한 모습을 보니 당황해서 차마 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더 말한다고 하더라도 통하지도 않을 것 같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정신만 깎여나갈 것 같았다.
"야, 너는 연기에 너무 심취한 거냐? 아니면 진심으로 자기가 성녀라고 믿고 있는거냐?"
다리가 묶여서 땅바닥에 쓰러진 라즈니와 시선을 맞추려는 듯 애런이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그는 불편한 기색으로 라즈니를 보고 있었는데,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불쾌했던 라즈니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연기라고요…?"
라즈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애런을 노려봤다. 그의 말대로 연기에 심취했는지, 자신을 의심하는 말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당신의 눈에는 제가 성녀가 아니라면 어떻게 보인다는 말이죠? 성녀도 아닌 제가 그만한 신성 마법은 또 어떻게 사용한다는 말인가요?"
"하."
애런은 어떻게 보아도 진심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라즈니의 표정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의 것을 빼앗아 쓰는 주제에 뻔뻔하네."
자신이 성녀의 뇌를 이식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한 말에 라즈니는 몸을 움찔거렸다.
'설마, 이 남자는 모든 것을 알면서 접근한 것일까? 왜? 뇌를 가져가기 위해서…?'
이유를 추측하다가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공포감에 라즈니는 실금을 했다. 축축하게 젖어가는 카펫을 보며 카펠라의 일이 떠오른 애런은 실소를 터뜨렸다.
"아, 미안. 옛날 일이 떠올라서 말이야. 뭐, 어쨌든 내가 너를 납치한 이유를 대충 눈치챈 모양이네."
"살려주세요! 목숨만큼은… 목숨만큼만 남겨주신다면 뭐든지 할게요!"
머릿속에 든 뇌를 노리는 것이다. 그걸 확신한 순간 라즈니는 태도를 180도 바꿔서 고개를 땅에 박으며 애런에게 빌었다.
산 채로 머리가 열리는 고통을 두 번이나 겪는 것은 사양이다. 그런 것을 겪을 바에는 치욕 따위는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었다.
"살려만 주신다면… 제 몸을 아무렇게나 사용하셔도 괜찮아요…! 아니요, 부디 사용해주세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마를 땅에 몇 번이고 처박았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눈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살기 위해서 구차하게 제 몸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여자로서 치가 떨리는 일이었지만,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살아서 나갈 수만 있다면 다음 기회는 있을 테니까.
"오빠… 지금 악당 같아 보여."
"애런은 가끔 저런다. 전에 나한테도 저런 식으로 괴롭힌 적이 있다."
"진짜? 아니, 어떻게 이런 어린애를…"
"죄책감이 든다고 어른 모습으로 바꿔서 저런 짓을 시켰다. 아주 나쁜 놈이지 않으냐."
미호는 곤란해하는 애런을 히죽 웃으며 골려줬다. 그 말 때문에 아일라는 코코아를 홀짝이는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애런에게 실망했다는 듯이 쳐다봤다.
"오빠가 저런 짓을 시켰다고?"
"아니, 사실이기는 한데… 그때는 내 잘못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런 짓을 시킬 리가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아일라?"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왜 거짓말 한 거야. 미호."
아일라는 미호의 이마를 찰싹 때리며 물었다. 이마를 맞은 미호는 빨갛게 달아오른 이마를 손바닥으로 비비며 억울하다는 듯이 아일라를 올려다보았다.
"아일라, 너는 나를 믿어주는 줄 알았는데…"
"그런다고 오빠보다 더 믿을 리는 없잖아."
제 편이 없음을 안 미호는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침대에 앉아서 코코아나 홀짝였다.
"뭐, 갑자기 대화가 새기는 했지만… 나는 네 몸을 사용할 생각이 없어. 이래 보여도 임자가 있는 몸이라서 말이야."
애런은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보여줬다. 라즈니는 희망을 잃은 텅 빈 눈동자로 반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역시 이딴 뇌 이식받는 게 아니었어… 씨발… 매일매일 개처럼 일하기만 하고… 사람들 앞에서는 가식이나 차려야 하고…"
라즈니는 말을 하다가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왜 지금은 사람들 앞인데도 이렇게 욕이 나오는 거지? 왜 가식을 차리지 않는 것일까?
그 의문에 답하듯 도로시가 라즈니를 보며 말했다.
"언니, 혹시 보거나 듣고 있는 거야…?"
정말 라즈니가 뇌를 이식받은 거라면 이자벨라의 의식도 조금 정도는 남아있을 거로 생각한 도로시가 바늘구멍만한 희망을 품고 물었다.
"언니…? 당신, 설마 이 뇌 주인의 동생이야?"
"네, 뭐… 그러니 이딴 뇌라든가 자신이 성녀라든가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미 다 알고 온 사실이라서."
도로시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이자벨라를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뇌가 이식되어있다고는 하나 지금 모든 정신은 라즈니의 지배하에 있다.
"역시 반응이 없네요."
애런은 이제 라즈니에게 볼일은 다 봤다는 듯, 차갑게 내려앉은 눈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걸 본 라즈니는 몸을 심하게 떨면서 구역질을 하고, 온몸의 구멍에서 물을 쏟아내며 살기 위해 발악했다.
꽉 묶인 밧줄이 살갗을 파고들어 하얀 피부를 빨갛게 만들기는커녕 시뻘건 피가 흘러나왔다.
고통에 신음을 흘리면서도 라즈니는 그만두지 않았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살려는 의지를 내보였다.
그러다가 뚝. 줄이 끊긴 꼭두각시 인형처럼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라즈니의 목소리지만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말투, 억양.
"... 도로시, 오랜만이야."
삐걱삐걱 몸을 일으켜 세운 라즈니가 피식 웃었다.
"언니…?"
도로시는 눈물을 주륵 흘리며 자신을 부른 라즈니를 껴안으려 했으나, 자신의 능력을 떠올리고 흠칫했다.
"괜찮아."
라즈니… 아니, 이자벨라는 밧줄에 묶인 몸을 이끌고 도로시의 곁으로 다가갔다.
신성력을 두르지 않은 그녀는 도로시에게 닿는 것만으로도 눈 녹듯 소멸할 것 같았지만, 그 행동에 두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도로시가 뒤로 물러나지 못하도록 팔로 몸을 감싸며 자신의 품속으로 이끌었다.
"구하러 왔구나."
이자벨라의 몸은 아니지만, 이자벨라가 자신을 감싸 안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라 끅끅대며 이자벨라를 껴안았다.
신성력을 두르지 않은 피부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언제나 이렇게 이자벨라와 몸을 맞대고 있기를 바랐다.
하고 싶었던 말은 많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저 울음소리뿐이었다.
이자벨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로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흐윽… 흐으…"
서서히 숨이 진정되어갔다. 도로시는 떨리는 눈동자로 눈앞에 있는 이자벨라를 바라봤다.
"언니…"
"응."
"미안해…"
나 대신 붙잡혀서. 나 때문에 고통받아서. 빨리 구해주지 못해서. 도로시는 그 모든 것들이 미안했다.
"미안하기는… 내가 미안한데."
성녀가 되고 바쁘다는 이유로 같이 있어 주지 못했다. 누군가는 죽으리라는 미래 예지 때문에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자신의 능력 때문에 남과 접촉하기를 두려워하는 도로시에게 먼저 믿음을 보여주지 못했다.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그리고 고마워."
거리를 두었다가 다시 친하게 굴었을 때도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가브리엘이 모든 것을 알아차려 알리러 갔을 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도 상처입은 이자벨라를 걱정했다.
분명 앙겔로크라티카는 자신에게 있어 지옥 같은 곳일 텐데도, 다시 돌아와서 구해주려 하고 있다.
이자벨라는 그것들이 고마웠다.
"흐흐…"
그러다가 이자벨라가 갑자기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영문을 모르겠는 도로시는 멍하니 있었다.
"둘 다 미안하다고 그러고… 못된 자매네."
"아니, 나만 못났는걸."
이자벨라는 도로시의 볼을 두 손으로 붙잡아 붕어처럼 만들고는 히죽 웃었다.
"얼굴이 못났다고?"
"언니…!"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저런 장난을 쳐야 할까. 애런은 이자벨라답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애런 님하고 아일라 님도 고마워요. 도로시를 도와주신 모양이네요."
"뭘요. 이자벨라 님 덕에 저도 살았었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오빠가 가브리엘 님한테 안 죽게 해줬으니까, 저도 갚아야죠."
애런과 아일라는 남매답게 대답도 비슷했다.
그래, 이자벨라는 이 광경을 바랐었다. 도로시가 있고, 애런과 아일라가 있고 시끌벅적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
"제가 이런 몸만 아니었다면 완벽했을 텐데요…"
이자벨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점점 정신이 흐려지고, 원래 이 몸 주인의 정신이 깨어나려고 하며 자신을 밀어낸다.
"애런 님, 라즈니에게 이식된 제 뇌는 반쪽이에요. 다른 반쪽은 교황에게 이식되어있고, 제 눈은 가브리엘이 가지고 있어요."
몸의 제어를 빼앗기기 전에 이자벨라는 재빠르게 제 할 말을 했다.
애런은 마치 자신의 몸에 마왕을 봉인하고 시간이 없었을 때처럼, 이자벨라가 매우 급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하여 무어라 묻지 않고 말을 들었다.
"가브리엘은 직접 보신 적이 있어서 잘 아시리라 생각해요. 그러니 교황에 대해서 말할게요. 자세하게 말하지 못하는 점은 이해해주세요."
"네."
"그는 수많은 과거를 가지고 있으며, 수많은 미래를 가진 사람이에요. 이 말뜻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라즈니의 몸이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의 주인인 라즈니가 정신이 깨어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으음… 이제 한계인 모양이네요. 어쨌든, 구해주러 와서 고마워 도로시. 애런 님하고 아일라 님도 고마워요."
"...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말투가 바뀌었다. 자신감이 넘치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기어들어 가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목소리가 되었다.
벌벌 떨면서 빌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애런은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았다.
"야, 네 원래 뇌는 어디다 버렸냐?"
애런의 질문에서 라즈니는 일말의 희망을 보았다. 생기가 돌아온 눈으로 애런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제, 제 원래 뇌도 제대로 들어있어요. 말하자면 제 머릿속에는 3개의 뇌가 들어있는 셈인 거죠…"
"그래? 그럼 이자벨라 님의 뇌를 뽑아내도 살 수는 있단 소리겠네."
이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애런은 이런 비인도적인 짓도 거리낌 없이 하는 앙겔로크라티카에 혐오감을 느끼며, 검을 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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