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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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를 가로지르는 섬광은 소리도 없이 온몸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그레이슨과 맞부딪쳤다.
"이것 참… 성흔이 없었더라면 영락없이 당했겠습니다."
그레이슨과 부딪친 것이 아니었다. 불꽃을 두른 금빛 십자가가 아일라와 그레이슨의 사이를 막아섰고, 그것이 검을 받아내었다.
쿠드득… 거대한 신성력 덩어리인 십자가는 아일라의 검을 한 번 받아내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하고 무너져 사라졌다.
그레이슨은 허리에 차고 있던 플랜지드 메이스를 꺼내었다. 화르륵! 주홍색 불꽃이 메이스에 붙으며 주변 공기를 일렁이게 만들었다.
얼마나 뜨거운지 그 열기가 떨어져 있는 애런마저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불꽃은 메이스를 통해 번져가며 그레이슨의 몸을 뒤덮었다.
마치 자신의 몸마저 불태울 것만 같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벨라의 피닉스처럼 저 불꽃은 몸을 회복시키는 효과였다.
잔상처가 생긴 피부를 화염이 그곳을 불태우고 자리를 잡으니 새로운 피부가 생겨났다.
적을 불태우고 자신은 회복시키는, 언젠가 라즈니가 말했던 정화의 불과 닮아있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정화의 불입니다. 저는 해가 뜨지 않은 세상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사람들을 이끄는 등대요, 악을 멸하고 벌하는 지옥 불이지요."
그레이슨의 메이스가 아일라가 서 있던 곳을 강타했다. 쿠구궁! 땅이 움푹 파이며 불길과 맞닿은 곳이 빨갛게 달아올라 녹아버렸다.
"뭐래. 나방을 꾀어내기에는 좋아 보이기는 하네."
"제게 뛰어드는 용사님이야말로 불나방이나 마찬가지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레이슨은 아일라에게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초격은 그레이슨의 눈으로 도저히 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방어를 한 것은 몸에 새겨진 성흔의 자동 방어.
천사가 내려준 신성 마법은 사람의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위력이었지만, 그런데도 일격에 부서졌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몸에 있는 성흔은 총 12개. 아까 하나가 부서져 버렸으니 11개가 남은 셈이었다.
"그 전에 끝낼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애런과 미호를 슬쩍 흘겨봤다. 저들은 전투에 개입하고 있지 않지만, 느껴지는 기운으로서 만만치 않은 상대임은 틀림없었다.
저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성흔 하나쯤은 남겨두고 싶었다.
"...!"
잠깐 눈을 돌린 사이 지천을 뒤흔드는 아일라의 쇄도.
마나가 흩날리는 푸른 안광과 사늘한 죽음의 기운을 담고 있는 검날이 그레이슨을 향했다.
"천사님의 기적을."
쿠우우웅!!
또 하나의 성흔이 파괴되었다. 남은 것은 10개. 그러나 성흔으로도 아일라의 발을 묶어놓지는 못했다.
"내려주시옵소서."
화아악!
붉은 불길이 모노크롬을 뒤덮을 기세로 퍼져나갔다. 세워진 불의 장벽은 아일라도 잠깐 멈칫거릴 정도의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화르르륵…! 퍼져나간 불길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불지옥을 형상시켰다.
녹아내리는 지표면, 일렁이는 공간과 산소를 집어삼켜 새카만 연기를 내뿜는 불꽃.
아일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에게 위협적인 공격은 아니나, 지하실 입구에 서 있는 세 명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빨리 끝내자."
푸른 마나가 아일라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며 형태를 바꾸었다. 이윽고 모노크롬에 먹구름이 끼더니 지옥 불을 끌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서 기분이 나빠졌다가, 돌아가서 애런에게 다시 말려달라고 할 생각을 하니 그리 나쁜 것 같지도 않았다.
적당하게 마나와 신성력을 몸에 휘감은 채 약해진 불길을 뚫고 그레이슨을 향해 달렸다.
"과연 용사님이십니다…!"
그레이슨은 아일라가 어디서 불길을 뚫고 나타날지를 알고 있었다는 듯 메이스를 내리치고 있었다.
아일라가 그걸 봤을 때는 이미 자신의 머리를 향해 메이스가 떨어지고 있었으나 맞을 생각은 없었다.
순간 발을 세게 구르자 그레이슨의 시야에서 아일라가 사라졌다. 쾅! 메이스는 그대로 허공을 가로지르며 땅에 박혔고, 그곳에 있던 아일라의 움직임을 쫓아가지 못한 마나가 흩날렸다.
"생명이 위험한 전장에는 익숙하지만, 이런 일방적인 사냥은 처음 겪는 일이군요!"
그레이슨은 방어를 버렸다. 이 이상 자동 방어에 성흔을 소모하는 것은 공격이 통하지 않는 이상 의미 없는 낭비다.
하나의 성흔을 제외한 모든 성흔을 신체 능력 강화로 돌렸다.
몸이 움찔거리며 한계를 넘어선 신성력을 버티지 못하고 정신이 망가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천사에게 선택받은 제가 신성력에 정신이 무너지는 것은 어불성설…!"
핏줄이 터지며 눈이 붉게 변한 그레이슨은 고개를 홱홱 돌리며 아일라를 포착했다.
보인다. 저 재빠른 움직임이 훤히 보인다. 그레이슨은 히죽 웃으며 메이스를 꽉 쥐었다.
콰앙! 아일라가 있는 공중으로 도약했다.
"보인다고 상대가 되는 건 아니거든."
아일라의 손짓에 하늘이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쿠르릉!! 먹구름이 옆으로 비키며 하늘에서 푸른 번개로 이루어진 창이 떨어졌다.
하나… 둘… 그 수가 점점 늘어나더니 이윽고 먹구름을 모두 몰아내고 빛이 없는 새벽 하늘을 번개가 환하게 비추었다.
"감히… 감히 이런 광경을 만들다니."
그레이슨은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번개를 떨어뜨리는 아일라를 보며 인상을 콱 구겼다.
그 모습은 마치 천사가 자신을 벌하기 위해서 창을 던지고 있는 것만 같아서 자신이 심판받는 악마가 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소나기에 약해졌던 불길을 끌어올려 번개에 대항한다. 쿠르르릉! 번개와 불이 뒤섞이며 밝은 빛이 발했다.
아일라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발로 차 가속했다. 불과 번개가 뒤섞인 전선을 뚫고 별똥별처럼 떨어졌다.
"놓치지 않습니다."
그레이슨의 기도에 하늘에 층을 나누듯이 공기를 태우는 불길이 생겼다.
하지만 아일라의 주변에 물방울들이 생기며 불길을 막아내었고, 하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불길의 층을 하나씩 뚫을 때마다 아일라는 공간을 발로 차며 더더욱 가속했다. 그럴 때마다 충격파에 공간이 파도처럼 일렁였고, 불들이 휘날려 사라졌다.
"팔 하나."
아일라의 말이 들리기도 전에 그레이슨이 마지막 보루로 남겨둔 성흔이 사라지며, 아일라를 막기 위해 생겨난 십자가가 파괴되었다.
콰직!
검은 어깨뼈를 아작내며 그레이슨의 오른팔을 떨어뜨렸다. 고통에 신음을 내기도 전에 아일라는 몸을 휘리릭 돌려서 발로 그레이슨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몸이 직각으로 꺾여 공중에 붕 뜬 그레이슨은 몸에 두른 정화의 불로 베어진 오른팔을 대신했다.
촤아악…! 열기에 달아오른 모래에 몸을 뒹굴며 속도를 줄였다.
"뭐야, 팔 하나로는 제압하지 못하네."
아일라는 검을 휘둘러서 묻은 피를 털어냈다. 이만한 격렬한 전투에도 숨이 차지 않는다. 아직도 여유롭다는 듯이 천천히 그레이슨을 향해 걸어갔다.
"이만한 격차가 있는 것인가요."
그레이슨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천사에게 선택받은 제4 사도이지만, 용사인 아일라에게는 잔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을 몇 번이고 겪으며 수많은 시련을 이겨낸 자신이 전장을 경험해보지도 못한 아일라에게 압도당한다는 굴욕감.
까득… 이를 꽉 물었다가 그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순간이었다.
"자애로우신 천사님께 바랍니다. 천사님의 뜻에 따라 사도가 된 저, 그레이슨 이그나에게 이 고된 시련을 버텨낼 힘을 주시옵소서."
이미 신성력에 정신은 너덜너덜하다. 겨우 이를 악물고 버텨내기는 했지만, 이 이상의 신성력은 정신을 망가뜨린다.
하지만 그레이슨은 천사에게 힘을 바란다. 사도로서 자신의 행동이 천사의 뜻임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죽는 것은 천사가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흐흐흐… 맞습니다. 천사님은 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온몸에 새로 생겨난 성흔은 십자가의 형태가 아니었다. 몸에 구멍을 뚫어내고, 피를 흘리고, 고통을 동반했다.
그러나 그 구멍을 통해 신성력이 공급되었고 그레이슨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실실 웃었다.
한계를 넘어선 신성력이 정신을 망가뜨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
그걸 지켜보고 있던 아일라는 혀를 찼다.
이자벨라의 사라진 신체가 어디있는지 불게 하기 위해서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이었는데, 저렇게 정신이 나가버린다면 그걸 듣지 못할 테였다.
거기다가 방금 기도로 신성력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을 느꼈다. 이 이상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빠르게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레이슨을 죽이겠다고 결심한 아일라에게서는 정신을 잃은 그레이슨일지라도 공포에 몸을 움찔거릴 정도의 불길한 살의가 느껴졌다.
피익… 피익… 그레이슨은 자신의 몸에 구멍이 생기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는 것을 보았다.
"...?"
대체 언제 공격을 당한 것이지? 그 순수한 의문이 그레이슨이 제정신을 차리도록 만들었다.
피익… 피익… 서걱… 점으로 나던 상처가 선이 되었다. 손가락이 잘리고, 팔이 잘렸다. 그런데도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천사의 불이 몸에 생긴 구멍과 베인 손가락과 팔을 회복시켰지만, 공격당해 몸이 사라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대체 무슨?"
무슨 공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곧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그레이슨의 몸은 의문의 공격에 휩싸여 사라져버렸으니까.
공간 마법과 검술을 섞은 아일라의 인과가 느껴지지 않는 무자비한 공격은 이미 전생 용사 시절의 애런을 뛰어넘은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응?"
아일라는 자신의 공격에도 꾸물거리며 붙는 피부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저건… 이자벨라 님의 피부?"
화상 자국이 있던 그레이슨의 피부가 깨끗했던 이유는 이자벨라에게서 벗겨낸 피부를 자신에게 이식해 신성력을 공급받아서였다.
아일라는 사람 얼굴의 반을 뒤덮을 피부를 들고 애런에게로 돌아갔다.
애런과 미호는 자신들의 예상을 뛰어넘은 아일라를 보며 입을 벌리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용사이니 강하리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신체 능력, 검술, 마법, 신성 마법. 뭐하나 흠잡을 것이 없다.
애런은 전생의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 눈에 담겨있던 경외심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마왕보다도 더 강한 힘을 가진 용사는 당장은 든든하겠지만, 마족과의 전쟁이 끝난다면 그 검 끝이 누구를 향할지 모르니까 그럴만도 한 것이었다.
그러니 용사를 그렇게 자신들의 나라로 부르려 했던 거겠지.
"오빠, 나 어땠어? 좀 멋졌나? 이 정도면 반할 정도였지?"
아일라는 자신을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는 애런의 눈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 응… 굉장하네…"
애런이 입을 벌리고 감탄을 하고 있자, 아일라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나랑 칼싸움 해볼래? 지금이라면 내가 이길 것 같은데?"
"아니아니아니… 사양할게…"
애런은 손사래를 치며 어릴 때부터 언제나 들어줬던 아일라의 말을 거절했다.
지금 칼싸움을 한다면 자신이 꼴사납게 아일라에게 지는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오빠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전력으로 싸워서 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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