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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71화 (71/92)

〈 71화 〉 구출

* * *

세상을 밝히는 태양이 뜨지 않은 새벽은 천사의 눈을 피해 몰래 행동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모노크롬의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 때문에 미호는 따뜻한 애런의 등에 더 달라붙고 꼬리로 몸을 감쌌다.

"아일라, 제4 사도를 맡아도 정말 괜찮겠어?"

"괜찮다니까. 싸워보지는 않았지만, 지금 내가 오빠보다 더 강할걸?"

"그건 그럴 수도 있긴 하겠지만…"

용사가 된 아일라는 이미 신체부터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전생의 애런처럼 죽어도 죽지 않는 몸은 아니기에 검으로 목을 베이면 힘없이 쓰러지고, 독을 마시면 중독되고, 마법에 몸을 꿰뚫릴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애런은 전투 중에 자잘한 상처가 생기는 것마저도 신경이 쓰였다.

"오빠, 계속해서 그러면 나 무시하는 것 같아서 서운하거든?"

"미안해. 그러려고 한 소리는 아니야."

"모노크롬에 있는 동안은 내가 도와줄 수 있으니까, 얌전히 도움받으란 말이야."

"알겠어, 알겠어."

애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의 아이를 상대할 때만 해도 아일라가 다치지 않도록 자신이 먼저 나서서 싸웠는데, 어느새 이렇게 성장한 걸까.

"뭐야, 왜 웃어? 웃지 마. 뭔가 쑥스럽잖아…"

"기특해서 그래."

피식 웃으면서 아일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하니 쓰다듬기 좋게 머리를 갖다주었다.

"헤헤."

아일라는 헬슨 때와는 달리 옆에 같이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여차하면 자신이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는 그때처럼 애런이 희생하지 않아도 자신이 일을 해결할 수 있으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미호와 도로시는 결국은 서로를 걱정하며 챙겨주려 하는 모습이 남매답게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니 금세 도로시가 갇혀있었던 지하실 입구에 도착하였다.

전에 도로시를 데리고 탈출하느라 이자벨라가 펼친 방어막에 부서진 오두막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었고, 가브리엘과의 전투로 녹아버렸던 땅이 그 상태로 굳어있었다.

"어휴, 내가 이걸 처음 봤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아일라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애런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그럴만하네."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 수 없었을 것 같은 흔적이었다. 물론, 애런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자벨라와 미호의 도움이 있었고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여기 이자벨라 님이 있는 게 더 확실해졌네요."

애런은 지하실 입구를 막듯이 펼쳐진 금빛 방어막을 보며 말했다.

중앙에는 원이 그려져 있고 천사를 칭송하는 글자가 적혀있는 방어막은 사도가 펼친 것답게 어떤 공격에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다.

"부쉈다가는 방어막을 펼친 자에게 알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미호가 방어막을 대충 살펴보고는 말했다.

"그럼 제가 해볼게요."

도로시가 앞으로 나서서 방어막을 향해 손을 뻗자, 방어막은 금빛 입자가 되어서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베네쿠스에서 도로시는 마법 수련만 한 것이 아니었다. 카펠라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 먼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물건, 여러 가지 마법, 용의 시체 같은 것들을 소멸시키는 연습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더더욱 강화했다.

그 결과 사도의 신성 마법이라도 무방비하게 있다면 손쉽게 소멸시킬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부수는 것이 아니라 소멸시키는 것이라면 문제는 없겠죠?"

도로시는 미호를 보며 물었다.

"그래, 술자에게 알리도록 만들어진 마법도 같이 소멸해버렸으니 모르고 있을 것이다."

"다행이네요…"

도로시는 지하실 입구를 말없이 바라봤다. 이제 20살이 되었지만, 12년은 이 답답하고 차가운 곳에서 홀로 지냈다.

아직 보기만 해도 다리가 떨리고 두려운 곳이지만, 1년 동안 자신 이상으로 고통을 받았을 이자벨라를 생각하며 나선형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화아악… 깊은 지하실에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도로시의 몸을 휘감았다.

마치 갇혀있을 때로 돌아간 기분에 몸에는 소름이 돋았지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끝이 안 보이네요."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고 있으니 아일라가 입을 열었다.

"이제 거의 다 내려왔어요."

도로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계단은 끝을 보이고 지하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을 가둬놓기 위해 만들어놓은 지하실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햇빛이 들지 않지만, 벽에 걸린 등불 하나로도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로.

가장 앞에 서 있던 아일라는 검을 빼 들어서 주변을 경계했지만, 누군가가 숨어있을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천장에서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등불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들렸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

"그런 것 같네."

애런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검을 다시 집어넣지 않은 아일라의 볼을 손으로 쭈욱 잡아당겼다.

"으이그, 끝까지 방심을 안 하네. 기특한 녀석."

"흐즈 므… 손느으."

애런이 손을 놓자 아일라는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어쨌든, 아무도 없는 건 좋은 거지. 방어막을 믿고 자리를 비웠나?"

그리고 지하실 가장 깊숙한 곳. 녹슨 철창 사이로 사람 하나가 들어갈 정도 크기의 자물쇠가 걸린 나무 상자가 보였다.

"언니!"

도로시는 그걸 보고 흘러나오려고 하는 눈물을 겨우 참으며 달려갔다.

끼이익… 도로시가 자물쇠를 소멸시키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흐으윽…"

상자 내부를 본 도로시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렸다.

다리에는 힘이 풀렸는지 풀썩 주저앉았고, 떨리는 팔로 상자를 붙잡았다.

"도로시 님, 괜찮으세요?"

"애런 님… 언니가… 언니가…"

도로시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자벨라를 부르면서 상자 안을 가리켰다.

서로 붙기 위해서 꿈틀거리고 있는 어린아이가 손으로 마구 뭉쳐 놓은 것 같은 끔찍한 형태의 살점.

으득으득 소리를 내며 나무 상자의 가림막에 생채기를 내고 있는 하얀 뼛조각들.

그리고 가림막 사이사이를 빨갛게 물들인 피와 풍선으로 장난감을 만들어 놓듯이 강아지 모양으로 묶여 있는 내장들.

그 모든 것들이 이자벨라의 것이었다.

"언니… 언니…"

도로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상자를 붙잡고 몸을 일으켜 세워, 안에 있는 몇천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자벨라를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 이게 사람이 할 짓이야…?"

그걸 보고 있던 아일라가 이를 깨물었다. 꽉 쥔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분노와 슬픔이 공존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흐끅… 언니…"

도로시가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은 살점들이 서로 꾸물거리며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뼈와 피가 없어서 형태를 이루기도 전에 흘러내리고 무너졌다.

"아으… 언니, 미안해… 늦게 와서 미안해…"

"잠시만요."

애런은 나무 상자를 들어서 뒤집었다. 안에 들어있던 뼈와 내장, 피가 우르르 쏟아져 바닥에 떨어졌다.

상자에 쏟아놓고 보니 이자벨라는 더욱더 비참한 모습으로 보였다.

그러면서 애런은 강아지 모양으로 묶여있는 내장을 손으로 하나하나 다시 풀면서 입술을 질근 씹어서 피가 나왔다.

"언니… 제발 돌아와…"

도로시는 꾸물거리는 이자벨라를 보며 간절하게 빌었다.

천사님, 제발 제 언니를 돌려주세요. 언니를 성녀로 만든 건 천사님이잖아요. 이때까지 엄청나게 고생했으니까, 조금 정도는 행복해져도 괜찮잖아요.

천사님이 선택한 사도가 언니를 이렇게 만들 때까지 천사님은 대체 뭘 하신 거죠? 언니를 죽이는 것이 천사님의 뜻이었나요?

"애런."

이자벨라의 몸들이 꿈틀거리며 붙고 있는 것을 보고 있던 미호가 입을 열었다.

"어, 너도 알겠어?"

"그래, 부족하다."

꿈틀거리며 어느 정도 사람의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한 이자벨라에게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피부가 부족해서 곳곳에는 붉은 근육이 밖에 드러나 있었고, 머리에 있는 눈이 있어야 할 구멍은 텅텅 비어있어 내부가 훤히 보였다.

그리고 재생되는 와중에 보았던 것이지만 하얀 두개골 내부에도 들어있어야 할 뇌가 없어서 텅 비어있었다.

"이 씨발 새끼들이 장난질을 쳐놨어."

대체 이자벨라의 신체로 무엇을 하려고 앙겔로크라티카의 광신도 놈들이 가져갔을까.

대충 짐작은 갔다.

성녀가 아님에도 성녀 못지않은 신성 마법을 사용하던 가짜 성녀 라즈니.

아마 신성력 덩어리나 다를 바가 없는 이자벨라의 신체를 몸에 이식해서 신성력을 공급받는 것일 테다.

씹어먹어도 모자랄 놈들.

애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상자 안에 있던 신체는 다 붙은 것을 확인하고는 이자벨라에게 옷을 덮어주고 들었다.

"일단, 돌아가도록 하죠."

당장 이자벨라를 이렇게 만든 교황이나 가브리엘, 제4 사도를 찾아가 죽여버리고 싶지만, 도로시를 이 상태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도로시의 눈은 빛을 잃어서 공허했고, 계속해서 눈물만 흘리며 입으로는 이자벨라를 불렀다. 어떻게 봐도 정신적인 충격이 커 보였다.

"도로시 님, 걸으실 수 있겠어요?"

"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도로시는 애런이 안아 들고 있는 이자벨라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다가 멈췄다.

심란한 지금 무방비한 이자벨라를 건드렸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떨리는 손을 꽉 쥐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이거 참…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쥐새끼들이 들어왔네요."

지하실의 계단을 다 올라와 달빛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한 남자가 출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자벨라를 안아 들고 있는 애런을 노려보았다.

덩치는 크지 않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그를 보이는 것보다 더 크게 느껴지게 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가 제4사도임을 알게 해주었고, 애런과 아일라는 검을 빼 들었다.

"그건 제 장난감입니다. 도둑질은 천사님이 금하신 죄이니, 어서 내려놓으십시오."

"장난감?"

아일라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앞으로 나섰다. 검 끝을 사도를 향해 들어 올렸다.

"이자벨라 님이 왜 네 장난감이야."

"흐음…"

사도는 눈을 얇게 뜨고 아일라를 보더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사님 아니십니까? 왜 용사님이 그곳에서… 흐음흐음… 곤란하네요. 용사님을 죽여버렸다가는 가브리엘 님이 화를 내실 텐데요."

인간을 초월한 용사를 죽이겠다는 그의 말에는 한점 허세도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아일라를 이기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날 죽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금빛을 띠는 신성력과 푸른 빛의 마나가 솟아올라 아일라의 몸을 휘감았다.

기도도 없이 신성 마법으로 몸을 강화하였다. 영창도 없이 마법으로 몸을 강화하였다.

용사이기에 가능한 남들은 따라 할 수 없는 기교였다.

바스스스… 아일라의 주변에 피어있던 풀들이 압도적인 힘을 버티지 못하고 바스러졌다가, 신성력에 의해 재생되었다.

구름은 짓눌려 땅으로 떨어지고 빛은 왜곡되어 무지개처럼 곡선을 이뤘다.

"... 정정하죠. 가브리엘 님이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할 만한 사람이었군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나쁜 습관이네요."

사도의 몸 곳곳에 새겨진 십자가 성흔이 빛을 내며 신성력을 공급했다.

"저는 천사의 불, 제4 사도 그레이슨 이그나입니다. 인간의 수호자인 용사님과 맞붙게 되니 제가 악당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아니, 당신 악당 맞아."

쾅!

아일라가 발을 구르자 땅이 쩌적 갈라지며 충격파가 떠오른 돌멩이들을 잘게 부숴버렸다.

그리고 지상을 가르는 섬광이 되어 그레이슨을 향해 날아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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