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70화 (70/92)

〈 70화 〉 모노크롬

* * *

성기사들이 악마의 아이를 정화하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애런은 모노크롬의 벽을 넘어서 들어왔다.

아일라는 모습을 바꾼 도로시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미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 계신 분들은 누구셔?"

"모습이 바뀌기는 했지만 도로시예요…! 기억하고 계시려나요? 1년 전에 잠깐 만났으니까 잊었을 수도 있지만, 이자벨라 언니의 동생이에요!"

지하실에 갇혀 지내느라, 혼자서 묻고 답하는 것에 익숙해진 도로시 특유의 말투. 아일라도 전에 만났을 때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말투를 알고 있었다.

"아, 도로시 님 맞네요. 그런데 그 모습은 어떻게 된 거예요?"

"제 원래 모습으로 앙겔로크라티카에 가면 정체를 들킬 거라고 카펠라 님이 마법으로 바꿔주셨어요.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됐는데, 이제는 이것도 제 몸 같아요."

조금 낮아진 시선도, 짧아진 팔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생활을 했다. 아일라는 시선을 옮겨서 미호를 보며 물었다.

"그럼 오빠 등에 업혀있는 꼬마는?"

"애런이 기르던 여우니라."

"아, 오빠를 구해줬다던 미호 님이구나. 근데 이렇게 보니까 완전 애네요. 반말해도 돼요?"

"마음대로 하거라."

그러고 보니 어깨에 계속 매달려있었던 여우가 사람으로 변했다는 말이 있었던 것 같았다. 여우가 갑자기 사람이 될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뭐냐…"

"오, 이 촉감. 그때 그 여우가 맞네!"

"그보다 피가 묻은 손으로 만지다니... 내 머리에도 묻지 않았느냐…"

미호는 자기 머리를 만져보더니 손에 묻어나온 피를 보고 으엑 소리를 냈다.

"그럼 내가 씻겨줄게."

"응?"

"자, 따라와. 오빠, 나랑 얘랑 씻고 나올 테니까 잠깐 기다리고 있어."

"나는 마법으로 깨끗하게 하면 된다만."

"에이, 물로 제대로 씻는 게 아니면 뭔가 찝찝하잖아."

이때까지 애런에게 돌봄을 받았던 아일라는 자신이 누군가를 돌봐줘 보고 싶단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눈앞에는 자신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미호가 있다.

얘는 꼭 내가 돌봐줘 봐야지 라는 생각을 한 아일라는 애런의 등에 업힌 미호를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애런 님의 여동생이라 그런지 남을 잘 챙겨주시네요."

"그러게요. 저랑 같이 있을 때는 응석만 부려서 몰랐는데 말이에요."

애런은 자기 방이기도 했던 아일라의 방을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며, 자신이 없을 때 어떻게 하고 사나 둘러봤다.

청소가 되어있기는 하지만 창틀을 손가락으로 닦아보니 까만 먼지가 묻어나왔다.

"... 뭐, 이 정도는 그럴 수 있지."

잘 보이지 않는 곳이니까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고 옷장을 열었다.

안에는 다림질을 하지 않아 주름이 생긴 채로 옷걸이에 걸린 옷들이 보였다. 거기다가 속옷들은 개지도 않고 마구 집어넣어 놓은 것 같았다.

"얘는 왜 옷을 막 던져놓은 거야."

애런은 한숨을 쉬고 옷장에 있는 모든 것들을 꺼내서 하나하나 다리기 시작했다. 도로시는 자연스럽게 옆에 와서 애런을 다려놓은 옷을 개었다.

"도로시 님은 편하게 계세요."

"아니요, 괜찮아요.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요."

"그보다 여기에 이자벨라 님이 있는 것 같죠?"

"네…"

도로시는 모노크롬에 들어오면서 멀리서 느껴지는 이자벨라의 신성력을 느꼈다. 방향이 확실하지 않아서 고개를 몇 번 두리번거린 것뿐이었는데, 애런은 그걸 놓치지 않고 봤었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까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그냥 모노크롬에 있다는 것 정도만 알겠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모노크롬에 숨겨둘 만한 곳이라면 그곳밖에 없잖아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소리가 새어 나갈 일도 없으며, 누가 오는 일도 없는 곳. 모노크롬에 그런 곳은 단 하나뿐이다.

"지하실이요?"

"네, 도로시 님이 있었던 지하실이겠죠. 아마 거기에 이자벨라 님과 제4 사도가 있을거예요."

"제가 있던 곳에 언니가…"

도로시에게 있어서 지하실은 암울했던 과거 그 자체였다. 어둡고 춥고 쓸쓸한 지하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곳이었다.

그런 곳에 이자벨라가 갇혀서 고통받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새벽에 잠깐 정찰을 가보죠. 제4사도가 어떤 상대인지 모르니까 섣부르게 행동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네."

말석에 있는 피델리오도 겨우겨우 이겼었다. 제1사도인 가브리엘과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쳤다.

그 중간보다 위에 있는 제4 사도가 어느 정도로 강할지는 모르겠지만, 손쉬운 상대는 아닐 것이라는 것은 만나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웬만하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맞서고 싶었다.

대마법사인 미호의 도움이 있고, 어둠의 정령인 아르카나와도 계약을 했다. 전보다 강해진 것은 자명하니 만전이라면 승기는 있을 것 같았다.

"파하! 오랜만에 목욕을 하니 기분이 좋구나!"

그때 미호가 욕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하얀 수증기가 문을 통해 나오며 시야를 가리기는 했지만, 드문드문 새하얀 피부가 보이는 것이 알몸으로 나온 것 같았다.

"야! 옷은 입고 나가야지!"

"으억!"

아일라가 몸을 잡아당겼는지 미호의 비명이 들리더니, 휙 하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 오빠! 옷이 없는데?"

"다 씻었으니까 없지. 피 묻은 옷을 다시 입을 생각이었어?"

"아, 그렇네. 그럼 옷 좀 가져다 줘."

조금은 혼자서도 잘살고 있나 싶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 역시 자기가 없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애런은 아일라가 입을 옷과 10살 때 입었던 원피스를 챙겨서 욕실의 문밖으로 손만 내밀고 있는 아일라에게 건네주었다.

"자, 팔 들어."

"아일라, 목욕하면서도 말했지만 나는 애가 아니다. 이래 보여도 오랜 세월 살아온 구미호란 말이다."

"그래? 근데 겉모습은 완전 어린애인데."

"이건 다 사정이 있는 것이다."

대화가 몇 번 오고 가더니 옷을 다 입고 욕실을 나왔다. 둘 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고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을 보고 애런은 한숨을 쉬었다.

"머리는 똑바로 말려야 할 거 아니야. 둘 다 어린애도 아니면서… 말려줄 테니까 앉아봐."

애런의 말에 미호와 아일라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예상대로구나."

"오빠는 이럴 것 같더라니까."

둘은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동시에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야?"

"별거 아니야. 그냥 목욕하면서 서로 통하는 주제가 오빠에 대한 것밖에 없어서 오빠 얘기를 했는데, 우리가 머리를 덜 말리고 나가면 꼭 이럴 것 같다고 말했었거든."

아일라는 기분이 좋은지 다리를 저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는데, 그걸 보니 애런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기분이 좋다고 하려던 잔소리를 안 할 수는 없었다.

"아일라, 방을 둘러보니까 좀 더럽더라?"

"...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런 소리를 해야겠어?"

아일라가 고개를 홱 돌려서 뚱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애런은 아일라의 이마를 손가락을 튕겨 때리고 계속해서 말했다.

"너 수정 구슬로 연락할 때는 평소에 청소도 잘 하고 정리도 잘하고 있댔잖아. 그런데 창틀에 먼지도 쌓여있고, 옷장도 정리가 안 되어있던데."

"아아! 좀!"

"옷은 주름 안 지게 다려서 걸어놓고, 브래지어는 구겨서 보관하지 말고 평평하게 해서 넣으라고 했잖아. 근데 그렇게 돼 있는 게 하나도 없더라?"

"이제 나이도 있는데 속옷까지 보지는 마…"

18살이나 되었는데 옛날처럼 애런이 속옷을 보는 것은 창피한 일이었다.

아니, 오빠인 애런이 보는 것이라면 상관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애런이 환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까 왠지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는 것이 어려웠다.

최대한 신경 쓰지 않고 평소처럼 대하려고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다 널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특히 브래지어는 컵이 망가지면 네 가슴 형태가 이상해질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된다고."

"..."

뭐 저런 것까지 들어야 하나?

이건 환생한 용사라든지 오빠이든지 상관없이 얼굴이 콱 구겨지는 말이었다.

아무리 사이가 좋다고는 하지만 괜한 참견이었다.

"애런, 걱정 마라. 내가 목욕할 때 봤는데 네가 좋아할 만한 예쁜 가슴이었다!"

그 말에는 애런과 아일라, 둘 다 눈살을 찌푸렸다. 미호는 뭔가 말을 잘못했음을 깨닫고 눈치를 살폈다.

"미호, 그래도 아일라는 내 여동생인데…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니?"

애런의 공유되는 실망감이 대못처럼 미호의 가슴을 푹푹 찌르는 것 같았다. 미호는 눈에 눈물까지 맺힌 상태로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다… 그냥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왜 걱정하지 말라는 게 오빠가 좋아하는 가슴이 기준인 거야? 그리고 오빠가 어떤 가슴을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는 거고?"

"그거야 애런이 내 가슴이 좋다고… 허업."

미호는 그 말을 끝마치기 전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쓸데없는 입을 내버려 둬봤자 좋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상황을 악화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아일라는 애런을 안쓰럽다는 듯이 보고 있었고, 도로시는 미호를 차갑게 내려앉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오빠, 아무리 그래도 이런 어린애 가슴이 좋다고 하는 건 범죄야…"

"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애런과 관계를 맺을 때는 어른의 모습이었으니까!"

적어도 애런을 범죄자로 만들지는 않겠다는 생각으로 불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맞불처럼 한 말이었다.

하지만 놓은 맞불이 또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고 해서 문제였다. 아일라는 머리를 말려주고 있는 애런의 손을 홱 가로채어서 반지를 눈앞에 보여주며 말했다.

"오빠한테는 카펠라 님이 있잖아. 내가 마법 배우려고 카펠라 님이랑 연락했을 때 나한테 그걸 얼마나 자랑했는지 알아? 그렇게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는데도…"

애런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미호처럼 고개를 숙였다. 카펠라가 허락을 하기는 했다만, 그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있었다.

"할 말이 없네."

"나도 마찬가지니라…"

아일라는 죄인처럼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사실 카펠라 님한테 들어서 다 알고 있었어. 둘한테 말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면. 용서해주라길래 말해본 거야."

"... 나중에 사과랑 감사를 같이해야겠네."

"그래, 좀 더 잘 대해주란 말이야. 그 사람 무뚝뚝하기는 해도 하는 짓 보면 은근히 귀엽잖아? 거기다 오빠만 바라보고 살았는 것 같고."

"카펠라랑 사이 좋나 보네."

애런은 뽀송뽀송하게 말려진 아일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에 카펠라가 반지 때문에 못되게 군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화해하고 원만하게 지내는 걸 보니 흐뭇했다.

"뭐… 카펠라 님이 오빠를 만나고 난 뒤부터는 사근사근하게 굴었으니까. 내가 오빠 여동생이라서 친하게 지내고 싶나봐."

"카펠라, 고 계집애가 앙큼한 짓을 해대는구나..."

미호는 오랜만에 목욕했더니 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크게 하품을 하고는 그대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서 자기 꼬리를 안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나는 이만 자야겠다…"

아직 해가 하늘에 떠 있는 잠자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새벽에 이자벨라가 갇힌 지하실을 정찰할 때 피곤하지 않으려면 지금 자는 것이 적당해 보였다.

"도로시 님도 일찍 주무시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네,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요."

도로시는 그렇게 말했지만 어디서 자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방 안에 침대는 2개뿐.

자신이 침대에서 자게 되면 누군가가 불편하게 잠을 자지 않을까 싶어서 소파로 가려고 했는데, 애런이 편하게 침대에서 자라고 했다.

"그, 그럼 너무 죄송한데요… 아일라 님도 잘 곳이 없게 되잖아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아일라도 그렇게 말했지만, 도로시는 둘을 불편하게 재우고는 편하게 잘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몸을 말고 자는 미호의 곁으로 가서 누워서 침대를 하나라도 비게 했다.

"감사하지만, 제가 신경이 쓰여서 불편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고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애런은 하나 남은 침대를 보고 아일라에게 말했다.

"아일라, 네가 방 주인이니까 편하게 자."

아일라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소리래? 원래 이 방 주인은 나랑 오빠인 거 잊었어?"

아일라는 배시시 웃으며 애런의 팔을 잡아당기며 남은 침대에 누웠다.

용사가 되어서 애런의 상상을 웃도는 힘이었기에, 애런은 푹신한 침대에 확 쓰러졌다가 몸이 튕겨져 나왔다.

"3년 전보다 더 좁네…"

마지막으로 잠을 같이 잤던 15살을 떠올리며 아일라가 중얼거렸다. 그때는 둘이 누우면 침대에 남는 공간이 없었지만, 지금은 한 명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아일라, 그냥 내가 소파에서 잘게."

"싫­어. 매일 혼자 자서 얼마나 외로웠는데… 그냥 같이 자면 안 돼?"

애런의 가슴에 머리를 박은 채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런은 자신이 떠나고 3년간 아일라가 혼자 고생하며 지냈을 것을 생각하니 차마 떨어질 수가 없었다.

15살 때까지만 해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일라였는데, 그런 아일라가 미숙하기는 해도 혼자 살려고 노력한 흔적이 있었다.

조금 전엔 좀 더 잘하라며 잔소리를 했지만, 지금은 그냥 장하다는 마음만 들었다.

"어쩔 수 없네… 안 떨어지게 좀 더 붙어."

"응."

이렇게 불편한데 뭐가 그리 좋은지 아일라는 웃으면서 애런의 품속으로 들어와서 안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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