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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67화 (67/92)

〈 67화 〉 정령 계약

* * *

"꽤 많이 복구되어있지 않나."

애런의 등에 업혀있는 미호는 햇빛이 들지 않을 정도로 무성하게 나무가 자라난 필리스 대수림을 보며 감탄했다.

불과 1년 전에만 해도 베로니카의 마기에 오염된 정령과 수호자가 대수림을 파괴해서 허허벌판이 된 상태였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파괴되기 전과 비슷할 정도로 회복을 하였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정령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수호자가 생명력을 공급받아 불사로 존재했던 것처럼 반대로 정령의 생명력을 대수림의 회복에 사용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정령이 소모되었는지, 정령의 숲이라고 불리던 이유인 대수림을 가득 채우는 은은한 빛은 보이지 않았다.

우웅­.

필리스 대수림을 지키는 방어막은 애런과 미호의 존재를 인지하고, 길을 열었다.

"제대로 작동하는군."

"뭐, 수호자의 뿔로 만든 거니까 말이야."

애런과 미호의 옷가슴에 붙어있는 오망성 모양의 배지.

수호자에게 받았던 뿔을 카펠라에게 부탁해서 휴대하고 다니기 편하게 배지로 만들었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금색으로 빛나는 것과 그 특유의 부러지지 않는 성질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전에 왔을 때는 방어막이 열리고 뜨거운 열기와 새카만 연기가 둘을 반겨줬다면, 지금은 시원한 바람과 상쾌한 숲 내음이 반겨줬다.

"애런, 저길 봐라. 우리를 반겨주기 위해 오는 것 아니냐?"

"그런가."

미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둥근 형태의 하급 정령들이 나무 그늘에서 나오고 있었다.

"전에 왔던 녀석들이다!"

"그 대마법사네."

애런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아는 척을 하는 정령들.

"아, 너희들 전에 정신이 멀쩡했던 녀석들이냐?"

"맞아!"

"여긴 왜 또 왔어?"

"애런과 계약할 정령을 찾기 위해서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애런을 졸졸졸 따라오는 정령들은 궁금한 게 많은지 계속해서 질문을 했다.

"누구? 누구랑 계약하려고?"

"강한 정령이겠지. 그럼 수호자?"

"수호자는 대수림을 수호해야 하니까 안 되지 않겠느냐."

"그런가? 그런가?"

나무가 우거진 수림에 들어가자 빛이 들어오지 않아 주변이 어두워졌다.

"자, 이제 너희가 주변을 밝혀주거라."

"뭐? 싫어."

"귀찮게…"

"게을러 빠진 녀석들이구나…"

정령들은 미호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한숨을 쉬고 어쩔 수 없이 미호가 마법으로 불을 만들어냈다.

푸른 여우 불 9개가 애런의 곁을 돌면서 주변을 밝혔다.

"그러고 보니 애런, 너는 계약하고 싶은 정령을 정해두기라도 한 것이냐?"

"아직 정하지는 않았는데… 베로니카의 마탑에서 만났던 어둠의 정령처럼 마왕의 마기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정령이 있다면, 걔랑 계약하고 싶네."

"뭘 아직도 그 녀석의 마탑이라고 부르는 것이냐. 사람이 아닌 마왕이었으니 베로니카는 마탑주라고 인정할 수 없다. 그러니 내 마탑이라고 해라."

자기도 사람이 아닌 구미호면서 저런 소리를 하는 건가 생각을 했다. 미호는 그걸 공유받아서 알아차렸는지 업힌 상태에서 작은 주먹으로 애런의 등을 툭툭 쳤다.

"애런, 네놈 또 나를 한심하다고 생각한 것이냐?"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그냥 네 입이 문제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침대 위에서는 예쁜 말만 하잖아. 평상시에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을래?"

"뭐, 뭣… 난 언제나 예쁘게 말하고 있지않냐!"

미호는 꼬리를 홱홱 휘둘러서 애런의 머리를 찰싹 때렸다. 뼈나 살같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 마나로 이루어진 꼬리라서 아프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기분 나빠하지 말거라… 방금은 네가 나한테 수치를 주지 않았느냐."

"내가 무슨 수치를 줬다고 그래? 예쁘게 말해달라고 한 게 수치심을 느낄만한 건가?"

"네, 네놈이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지 않느냐. 이제는 너까지 그 여자들을 따라서 나를 괴롭히는 것이냐…"

미호는 카펠라와 도로시를 생각하니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카펠라는 애런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을 이용해서 전처럼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고, 애런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 때문에 상당히 고생을 했지만, 못 참게 될 즈음에는 결국 빌려주기는 했다.

도로시는… 애런과 관계를 맺고 그냥 그 상태로 잠이 든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미호에 대한 적개심이 늘어나며 민감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도로시가 그렇게 된 것에는 이유가 더 있는데, 그건 바로 이자벨라 때문이다.

앙겔로크라티카에서 끊임없이 고문을 받고 있을 이자벨라를 구하러 가야 하는데,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렸으니 점점 초조해져서 그렇게 돼버린 것이리라.

그런 마음을 카펠라가 이해했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도로시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었다.

미호는 그 둘을 다시 떠올려보니 그렇게 나쁜 녀석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왜 그렇단 말인가.

"혹여 정말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인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정말 자신의 입이 문제인가? 그런 의문이 든 미호는 조금 좋게 말을 하자고 다짐했다.

"애런, 나는 이제부터 착하게 말을 하기로 했다. 너희들이 나를 괴롭히는 이유는 내 입 때문인 것 같구나."

"어… 적어도 나는 아닌데. 그냥 너 놀리면 반응이 귀여워서 그러는 거야."

"이 나쁜 자식!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않느냐! 대수림에 와서 떠오른 김에 하는 말이다만, 나는 여기서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 생명을 너에게 맡기지 않았느냐!"

"흐음…"

웬일로 맞는 말을 하는 미호에게 애런은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미호는 그런 각오까지 하며 계약을 했는데, 자신은 잘 대해주지 못한 것 같았다.

"알겠어, 미안해. 생각해보니까 내가 잘 대해줘야 했는데 말이야."

"그래, 나는 마음이 넓으니까 특별히 용서해주도록 하마."

"그거 고맙네."

애런은 피식 웃으면서 용서해준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점점 수림 깊숙이 들어가니 미호가 만들어낸 여우 불의 빛이 아닌 은은한 금색 빛이 흘러나왔다.

대수림을 밝히는 것은 정오의 태양 같은 금빛의 사슴, 수호자였다.

수호자의 몸에서 작은 빛의 입자들이 나와 나무로 퍼져나가서 스며들었다. 아마 저런 식으로 생명력을 나누어주며 대수림을 되살린 모양이었다.

미호에게 육신을 파괴당하고 재생되었을 때에는 작은 사슴이었지만, 이제는 다 회복했는지 뿔을 제외하더라도 10m는 되어 보이는 크기였다.

"작은 나무 같군."

미호는 수호자의 머리에서 뻗어 나온 뿔을 보며 말했다. 가지가 뻗은 것처럼 뿔에 뿔이 이어진 모습은 그렇게 보일만 했다.

"왔나."

수호자가 애런과 미호를 보고 입자들을 거둬들였다.

"때마침 수림의 수복도 거의 끝났다. 지금이라면 계약을 할 정령을 찾을 수도 있을 거다."

"때 마침 온 모양이구나 애런."

"그러게 말이야."

"­­­­­!"

수호자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나무들이 흔들리며 대수림 곳곳에 퍼져있는 정령들을 불러 모았다.

반딧불이처럼 작은 빛들이 사방에서 수호자를 향해 모여들었다.

"정령의 숲이라고 부를만하군."

미호는 그렇게 말하며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애런은 전에 본 적이 있는 것이었지만, 미호의 감정이 공유되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정령들이 많을 때는 더 예뻐."

"그러냐? 못 봐서 아쉽구나."

"아쉬울 게 뭐가 있어? 나중에 다시 오면 되는데."

애런은 미호를 땅에 내려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호자의 뿔과 미호가 대수림을 한 번 구해서인지, 마기를 느끼고 경계는 하고 있으나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면 계약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계약하고 싶은 정령이 있나?"

"응, 마기에 익숙한 마족의 영혼으로 만들어진 정령이면 좋겠어."

"그런가. 그럼 이 녀석들이겠군."

수호자의 말에 검은 빛을 내는 어둠의 정령들이 애런의 곁으로 다가왔다.

"계약을 하기 전에 물어보겠다. 네게서 용사의 영혼이 느껴지는데 너는 용사인 것인가?"

"..."

그 질문에 용사 애런의 몸으로 자신이 애런이라 칭하던 노인이 떠올랐다. 아직 미호가 세웠던 가설 중 어떠한 것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카펠라 덕에 적어도 애런은 자신이 용사였다고 확신했다.

"그래."

"그렇다면 옛날처럼 또 마왕을 죽이기 위해서 힘을 바라는 것인가?"

"죽이기 위해서…"

자신이 전생에 어땠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는 마왕을 죽이기 위해서 힘을 바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의 애런은 달랐다.

"아니, 마왕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닌 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야."

용사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아일라를 위해.

마족의 침공이 시작되면 최전선에 나서게 될 카펠라를 위해.

베로니카에게 여우 구슬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지식까지 노려지는 미호를 위해.

동생을 도망치게 하고 붙잡혀서 고통받고 있을 이자벨라를 위해.

그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힘이 필요했다.

애런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슴의 형상을 한 수호자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정령이 필요하겠군. 아르카나."

수호자의 부름에 다른 어둠의 정령들보다 덩치가 큰 까마귀처럼 생긴 정령이 앞으로 나왔다.

"어둠의 고위 정령인 아르카나다. 마기에 익숙하니 너를 도울 수 있을 거다."

"아르카나의 의견은 어때? 나랑 계약해도 괜찮아?"

"괜찮습니다. 용사였던 분을 모실 수 있다면 영광일 따름입니다."

아르카나는 날갯짓을 해서 애런의 어깨에 앉았다.

"그럼 바로 계약하자."

"좋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애런 님을 위해서 힘을 빌려드릴 것입니다."

정령과의 계약은 마법진을 요구하거나, 복잡한 조건들이 필요하지가 않다.

영혼으로 이루어진 정령은 영혼으로서 계약을 하고, 그것은 어떠한 조건보다도 절대적인 효과를 지닌다.

"계약은 완료되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애런 님의 몸 안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불러주시길."

그렇게 말하고 아르카나는 애런의 어깨에서 몸이 스르르 가라앉으며 사라졌다.

"애런, 뭔가 달라진 것이 느껴지느냐?"

"음… 잠깐만."

정령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조건인 정령을 몸에 깃들게 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이다음은 벨라처럼 정령의 힘을 몸에 두르거나, 실현시키면 된다.

'어떻게 만들까.'

애런은 어떻게 아르카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생각했다.

벨라의 불꽃처럼 방어를 위한 것도 괜찮은 것 같고, 가브리엘은… 정령 마법은 아니지만, 공격을 위한 날개도 괜찮은 것 같았다.

[창의력 수준하고는.]

'시비 거는 거냐?'

[남의 것을 따라가려고 하니까 답답해서 그랬다. 내가 정해주지.]

'가만히 있어라.'

[날개나 망토보다는 뿔이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상할 수 있게하고, 마기를 조종하는 용도로 만드는 것이 어떻냐.]

마왕의 말 때문에 애런은 자신의 머리에 뿔이 생긴 모습을 상상했다.

"아."

그리고 애런이 상상했던 대로 실현되었다. 머리에 자신이 악마라고 말하듯이 어둡고 작은 뿔이 두 개 돋아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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