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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66화 (66/92)

〈 66화 〉 발푸르기스

* * *

비가 내리지 않아 말라 비틀었지만, 마기로 영양분을 공급해 죽지는 않은 땅, 어둠이 시작되는 하늘은 마계의 끝, 마신을 위한 신전이 있는 곳이었다.

거의 다 무너져내려 가는 기둥이 겨우 받치고 있는 신전 내에는 거대한 원탁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의 뼈, 용의 뼈, 마족의 뼈로 이루어진 탁자는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원탁이라고 무생물인 것은 아니고, 무수히 많은 뼈를 먹고 살아가는 마물 중 하나이다. 지능이 높은 녀석은 마왕들의 심기를 살피며 필요한 물건을 갖다주는 역할이었다.

신전에 원탁을 제외한 나머지가 없는 이유도 그냥 원탁이 유능해 다른 것들은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 늦군."

원탁에는 이미 5명의 마왕이 모여있었는데, 그중에는 백발에 양의 뿔을 가진 파이몬도 포함되어있었다.

마왕이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마왕이 교체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이몬 정도가 되면 마왕 중에서도 꽤 오래 해온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파이몬이 원탁을 손가락으로 툭 툭 두드리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발푸르기스를 신청한 녀석이 오지 않는 건 어떤 경우지?"

"교만,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말고 기다려 봐. 발푸르기스로 마왕을 소집시켰다는 것은 이유가 있겠지."

수녀복을 입은 백금발의 분노의 마왕이 파이몬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여유롭게 손톱 손질을 하고 있었는데, 파이몬은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최근 마왕이 아주 개판이야. 근본 없는 것들이 섞여 있다고."

"네가 할 소리인가?"

백발을 한 미형의 시기의 마왕이 한 말에 파이몬이 짜증 냈다.

"시기의 마왕, 내가 보기에는 네가 제일 근본 없다. 남을 따라 해서 마왕의 자리에 오르더니, 너무 기고만장해졌군?"

"아니꼽다면 나에게 싸움을 걸어봐라. 흔쾌히 받아들여 주지."

시기와 교만의 마왕 사이에서 긴장감이 돌았다. 모든 것은 무력으로 정해지는 마계에서는 법 따위는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싸운다. 그리고 패자는 승자의 결정에 따라야만 했다. 그건 같은 지위에만 한하는 것이 아닌,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싸우지 말아요~."

그때 벚꽃색에 가까운 긴 핑크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푸른 눈동자의 음욕의 마왕이 중재에 나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서큐버스라는 것을 증명하듯 했다.

"가장 오랜 시간 마왕을 해온 태만도 가만히 있다고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행동은 그만하도록 해요~."

그녀의 가벼운 말투에 시기와 교만의 마왕은 혀를 차며 말을 그만두었다.

가벼운 말투와는 상반되게 음욕의 마왕 역시 오랜 시간 마왕을 해오고 있는 강자였고, 그만큼 마계에서의 입지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자, 한 소리 할 거라면 태만이 하도록 하자고요. 할 말 있어요?"

"없다…"

산처럼 보이는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머리에는 수많은 뿔을 달고 있는 곰, 태만의 마왕이 조용하게 말했다.

그가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것은 가장 오랜 시간 마왕을 해온 노장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음~ 그래도 건방지기는 하네요. 마신도 와있고 저희도 다 와있는데, 발푸르기스를 신청한 탐욕이 아직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니 말이에요."

"인색도 나오지 않았는걸?"

분노의 마왕이 손톱 손질을 마치고 후 불면서 말했다. 음욕은 꼬리를 홱홱 휘두르며 성을 내는 척을 했다.

"정말이지… 인색도 마왕을 오래 해왔으면 약속 시각 정도는 지켜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시기의 곁에 가서 몸을 배배 꼬며 야릇한 소리를 내면서 교태를 부렸다.

"시간이 남아돌면… 어때요? 지금 시기는 잘 생기기는 했으니까, 특별히 제가 봉사해드릴 수도 있다고요?"

"필요 없다."

시기는 불쾌한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꺼지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음욕은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분노에게 달라붙었다.

"분노~ 저건 시기의 성격인가요? 아니면 시기 모습 주인의 성격인가요?"

"음… 그렇네. 저건 둘 다 섞인 거야. 시기의 지랄 같은 성격과 모습 주인의 고자 스러움이 합쳐진 거지."

분노의 말에 음욕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며 자리에 돌아갔다.

"분노가 말한다면 그런 거겠죠~."

"잠깐."

그때 시기의 마왕이 의자를 밀어서 넘어뜨리며 일어섰다.

"나를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지 마라. 이 모습은 나의 모습이고 나 자체이다."

"으응~? 하지만 시기의 모습은 그게 아닌걸요? 저는 다 알아요. 저도 꽤 오랫동안 마왕 해 먹고 있으니까요."

"닥쳐라. 오랫동안 마왕을 해와서 이제 죽어서 그만두고 싶은 거냐?"

스릉… 시기는 등에 차고 있던 대검을 꺼내 들며 말했다.

"어휴~ 왜 이렇게 싸움을 좋아할까요? 저는 연약한 여자라서 싸움 같은 건 싫어하거든요?"

"아하하! 그건 재밌는 농담이었어. 음욕."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분노가 박수를 치며 시기의 대검을 손가락을 튕겨 툭 쳤다.

그러자 쩌적… 소리를 내더니, 금이 생기며 단단하던 대검이 산산조각이 나버리다 못해 가루가 되어버렸다.

"너 싸우는 거 되게 좋아하잖아. 거기다가 강하기도 하고."

"분노, 방해하지 마라."

"쯧… 이래서 네가 그 모습의 주인이 아니라는 거야. 약해빠져가지고 주제 파악도 못 하잖아."

"분노는 착해서 문제에요. 내버려 뒀으면 제가 알아서 처리했을 텐데~."

"그래서 내가 먼저 나선 거잖니? 네가 나서버리면 이대로 시기가 사라질 테니까. 내용물은 필요 없지만, 저 모습으로 네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은걸."

둥­둥­.

그때 마신 신전의 공기가 떨리며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왕들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서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리 오너라."

신전에 들어오는 것은 네발로 기고 있는 악마를 탄 탐욕의 마왕,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이제 붉은 머리 사이에 있는 작은 두 뿔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히죽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원탁의 제일 끝자리, 마신과 마주 보는 곳에 앉았다. 하지만 의자에 앉은 것이 아닌 자신이 타고 온 악마를 의자 삼아 앉아있었다.

"인색은 왜 저러고 있는 걸까요~?"

음욕은 베로니카의 밑에 깔려 인상을 콱 구기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악마를 보며 물었다.

"개새끼야, 대답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하마."

베로니카가 발로 배를 걷어차자, 밑에 깔린 악마는 입을 열었다.

"싸움에서 패배했다…"

"아하~. 사실 알고 있었는데, 인색… 아니, 이제는 인색이 아니니까 뭐라고 불러야 하죠? 뭐, 약한 당신의 입으로 듣고 싶었어요."

얄밉게 웃는 음욕을 악마는 노려보기만 할 뿐, 무언가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탐욕~ 발푸르기스를 신청해놓고 가장 늦게 온 이유는 그것 때문인가요?"

"뭐, 그렇지. 이 개새끼가 기어 다니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말이야."

"그럼 몸에 있는 상처는… 개새끼? 그게 그 악마 이름인가요?"

"그런 셈이지. 내가 붙여준 새 이름이다."

베로니카의 말에 악마는 이를 꽉 다물었다. 굴욕적이지만 패배한 자신의 처우를 정하는 것은 승자가 할 일이니.

"어쨌든 개새끼랑 싸우느라 생긴 상처인가요~?"

"아니? 개새끼는 나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어. 이건 인간계에 갔다가 카펠라에게 당한 상처다."

베로니카는 아직 아물지 않은 배의 상처를 덮고 있는 로브를 들어서 카펠라에게 당한 것을 보여줬다.

마왕의 초월적인 회복력에도 회복되지 않는 특이한 상처는 카펠라가 마왕이라는 존재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연구를 했는지 알게 해주는 것이었다.

"용사만 조심하면 될 거라더니 다른 괴물이 있었잖냐. 진짜로 죽을 뻔했다고."

베로니카는 계속해서 미소를 띠고 있는 분노의 마왕을 보며 투덜거렸다.

"카펠라가? 하여간 기특한 아이라니까. 또 용사나 성녀를 위해서 노력한 모양이네."

"뭐, 내가 발푸르기스를 신청한 이유는 그게 아니고 다른 거다."

베로니카는 원탁에 다리를 올린 다리를 꼬면서 말했다.

"인간계를 수호하던 용사가 죽었다."

그 말에 모든 마왕은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용사가 마왕을 죽이고 인간계를 수호한 시간이 100년에 가까워지고 있다.

100년이라는 시간은 마족에게 길지 않은 시간일지 몰라도, 나약한 인간들에게는 긴 시간이었다.

전쟁을 통해 마족에 대한 공포, 두려움이 있는 세대들은 대부분 죽었고, 마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세대로 교체가 되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인간의 마족에 대한 공포가 줄어들었음을 뜻하고 마족들의 힘이 줄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악함에서 비롯되는 악마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을 태어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항상 마족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건 어떻게 알아낸 걸까요~?"

"베네쿠스라는 나라에서 만났거든. 평범한 몸에 환생한 용사를."

"평범한 몸에 환생~?"

음욕은 정신 사납게 꼬리를 휙휙 휘두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벚꽃 무늬가 새겨진 눈동자는 왼쪽 끝에 앉은 태만부터 순서대로 마왕들을 훑어봤다.

"그런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마왕급의 악마뿐이잖아요~?"

"..."

음욕이 모든 마왕을 둘러보고 파이몬에게 시선이 향했을 때. 분노의 마왕이 입을 열었다.

"근데 용사라는 건 확실한 거야? 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알아낸 거야?"

"아, 그거 말인가."

베로니카는 시기의 마왕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대답했다.

"저 녀석이랑 똑같은 검술을 사용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지."

"그래?"

"뭐~ 범인 찾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일단 그래서요~? 용사가 죽고 환생했으니?"

"아, 뻔하지 않나. 이제 용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겁쟁이 마신에게 전해주려고 한 거지."

베로니카는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마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마신. 네가 두려워하던 용사는 죽었다. 이제 인간계로 가지 않을 이유가 있나?"

마왕들의 시선이 어둠을 향했다. 자신들의 힘을 기를 수 있는 인간계 침공은 모든 마왕이 바라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마신은… 여전히 인간계로 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조용히 있던 태만의 마왕이 마신의 대답을 대신 전했다.

"하, 마족을 통괄하는 마신이라는 놈이 이렇게 겁쟁이여서 쓰겠나…"

전 마족의 정점에 있는 마신의 뜻은 곧 마족 전체의 뜻이다. 마왕이라고 한들 마신의 말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러니 마신이 인간계에 침공할 생각이 없다면, 마족들은 용사가 죽은 것을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뜻이다.

"좋다. 어차피 마신의 자리도 탐나던 참이었다. 오랜 세월 어둠 속에 박혀서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 네놈 대신 내가 마신이 되어 마족을 이끌어주마."

베로니카는 빛을 모두 흡수해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어둠마저 꿰뚫어 보듯 마신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내 상처가 다 나으면 네게 싸움을 신청하지. 그때까지도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라. 버러지 놈아."

"와~ 이건 또 보기 힘든 일이네요. 이제껏 바뀐 적이 없는 마신의 자리를 노리는 마왕이 생길 줄이야!"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 모두가 입을 다물고 마신과 탐욕을 보고 있을 때, 음욕의 마왕만이 눈치 없게 큰 소리를 내며 박수를 쳤다.

"이걸로 전하고 싶은 건 다 전했다. 돌아가자 개새끼야."

베로니카는 악마의 배를 걷어차며 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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