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믿음
* * *
"..."
애런이 눈을 떠보니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보였다.
옆에는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지펴놓아 듣기 좋게 타닥 소리를 내며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따뜻한 열기를 내고 있었다.
"일어났느냐."
미호가 애런의 시야에 고개를 빼꼼 내밀며 튀어나왔다.
"나 기절해있었어?"
"그래, 제대로 숨도 못 쉬어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그건 미안하다… 옆에서 간호해준 것도 고마워."
애런은 몸을 일으켜 세워 모닥불을 보며 앉았다.
"..."
방향성 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혼란스럽다.
17년 동안 자신이 애런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는데, 아닐 수도 있다니.
이상한 부분도 있기는 했다. 떠오르는 전생의 기억은 대부분 마왕 토벌을 하러 가는 부분부터 시작되었다.
그 전 기억도 드문드문 떠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 타인이 자신을 평가하는 듯한 기억이었고, 자신의 감정 같은 것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왜 저런 행동을 했고, 그 행동으로 무엇을 배웠고,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지를 모르겠다.
'그건 내가 기억만을 읽은 악마라서일까? 본인이 아니니 외면이 아닌 내면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니 얼추 들어맞는 것 같았다. 불안한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갔다. 다시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워진다.
"진정하거라."
미호가 작은 두 손으로 애런의 입을 막았다.
"천천히 코로 들이쉬고 내뱉는 것에 집중해라."
"흐읍… 흐으…"
조금씩 호흡이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찔해지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혼자서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도 말해보거라. 지금 너 혼자서 생각해봤자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이 흘러갈 거다."
"응."
애런은 자신이 느꼈던 것, 생각하는 것, 왜 자신이 악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는지 미호에게 털어놓았다.
"..."
미호는 팔짱을 끼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
'솔직히 모르겠군.'
뭐라 좋게 말해주고 싶지만, 노인과 애런의 기억에는 명백하게 차이가 있다.
그것도 애런에게 안 좋은 쪽으로.
애런은 자신이 전생에 왜 그랬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모르고 있다.
하지만 노인은 그걸 다 알고 있었다. 그게 지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급조해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잘 짜여있었다.
그러니 애런이 자신은 용사 애런의 기억을 읽은 악마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럴싸했다.
"... 애런, 두 가지 가설을 세워보자."
"두 가지?"
"일단, 첫 번째 가설이다."
미호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하나 들어서 흙을 슥슥 그어서 사람과 악마 형태의 그림을 그렸다.
"네 말대로 한 명이 악마고, 빙의를 해서 기억을 읽어내어 애런인 척을 하고 있다는 것."
"그렇지."
"아주 그럴싸하다. 하지만 의문도 있지. 네 말에 따르면 파이몬이라는 교만의 마왕이 용사였던 네 힘이 필요하다고 도움을 요청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애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이상하다. 만약 악마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자신의 부하이니 막 부려도 되는 것이 아니느냐?"
"음…"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애런의 머릿속에는 여러 부정적인 가능성이 떠올랐고 의문을 제기했다.
"만약 다른 마왕이 악마에게 이러한 짓을 시킨 거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만… 그렇게 가정을 이어가다 보면 끝이 없다. 그러니 다른 마왕의 개입은 없다고 치자."
애런은 미호가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논리적으로 부정해주기를 바랐지만, 역시 그것까지는 무리였다.
하긴, 끝없이 왜? 왜? 왜? 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대답이 턱 막힐 때가 생길 것이다. 괜한 의문만 더 늘어나기 전에 미리 싹을 자른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어쨌든, 첫 번째 가설은 네가 설명하지 못하는 감정이나 행동의 원리에 이해가 가는 것이다. 이어서 두 번째 가설이다."
"응."
두 번째라… 무엇일까. 애런은 악마가 한 소행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떠오르는 것이 없었기에 귀를 기울였다.
"너와 노인, 둘 다 애런 본인이라는 가설이다."
"뭐?"
"잘 들어봐라. 혼이 나누어졌다거나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아니면 저 몸은 영혼마저도 죽지 않는 것이라 다시 생긴 것일 수도 있고."
영혼이 다시 생긴다? 애런은 잠깐 생각에 빠져들었다.
머리가 터져도 죽지 않고, 몸이 다 찢어져도 죽지 않았던 용사라면… 그런 것도 가능할 것 같기는 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저 몸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사람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신이 빚어냈다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몸.
"그러면 나한테 부족한 기억들은?"
"그건 너무 오래되어서 잊은 것이다. 너는 네 어렸을 때 겪었던 일이나 그때의 감정을 빠짐없이 떠올릴 수 있느냐?"
"없지."
"그래, 기억은 마모되고 왜곡된다. 그러니 그냥 잊은 것일 수도 있는 거다. 용사의 몸은 특별하니 잊지 않은 것이고."
듣고 보니까 이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한쪽이 악마라는 가정보다는 미호의 두 번째 가정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자신이 악마일 가능성? 마왕의 계략에 빠져들었을 가능성? 그런 것들은 확인할 수도 없을뿐더러 마음만 힘들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두 번째 가설이 맞았으면 좋겠네."
"뭐, 당연하겠지."
애런은 자신이 악마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서 눈을 돌리려고 했지만,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의심은 지워지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목에 가시라도 걸린 것처럼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하아… 어쨌든 아티팩트나 빼서 돌아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손으로 털어내고, 바위를 잠깐 들어서 손가락에 끼워져있는 반지를 빼냈다.
금빛과 붉은빛이 적절하게 섞인 반지는 대마법사인 카펠라가 어렸을 때 만들어낸 아티팩트였다.
반지에 부여된 마법에는 부서지지 않도록 강도를 강화하는 것, 손가락 크기가 다른 사람도 착용할 수 있도록 크기를 조절하는 마법등이 부여되어있다.
"이거 덕분에 좀 덜 외로웠던 것 같기도 하고."
애런은 반지를 끼면서 중얼거렸다. 마왕 토벌 후 홀로 산다고 하니 카펠라가 선물로 주며 자기 생각이나 하라고 했는데, 그게 실제로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았다.
"하여간 기특한 녀석이라니까."
"나 말이냐?"
"너 말고."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는 미호를 베네쿠스로 돌아가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등에 업었다.
"애런, 너무 불안해하지 말거라."
미호는 조용히 귀에 대고 말했다. 괜찮은 척을 하고 있었지만, 감정이 공유되는 미호를 속일 수는 없었다. 애런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계약이란 거 불편하네."
"남들에게 의지하지 않는 건 용사 시절의 버릇인가?"
"아, 그 말 나 신경 써서 해주는 거야? 네가 용사였고 악마는 아니라고?"
"쯧… 눈치는 좋아가지고."
"뭐야, 너도 꽤 기특하네."
애런은 피식 웃으며 뒤에 업힌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푹신푹신한 귀가 손에 걸려서 쓰다듬는 맛이 있는 머리였다.
"기특은 무슨! 애 취급하면서 머리 쓰다듬지 마라! 나는 네 전생하고 지금 나이 하고 다 합친 것보다도 나이가 더 많단 말이다!"
*
"왔네."
꽤 늦은 시간인데도 카펠라는 차를 홀짝이며 깨어있었다.
"아, 나는 이제 졸려서 자야겠다. 카펠라, 애런은 너한테 맡기마."
"맡겨? 무슨 소리야."
미호는 하품을 하고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카펠라는 차 한 잔을 더 내와서 애런의 앞에 내어주며 옆에 앉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냐 별일 없었어. 그냥 반지나 다시 찾아왔지."
애런은 손가락을 펼쳐 왼손 엄지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여줬다.
"잘 찾아왔어. 그거 끼고 있으면 마나 회복 속도가 빨라져서 미호가 소모하는 마나도 금방금방 채울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전생…"
애런은 전생 용사 시절에는 몰랐는데 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자신이 애런이 아니라 악마라면 그건 전부 거짓된 기억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역시 뭔가 있잖아."
카펠라는 애런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고 조금 더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요. 용사 시절이랑은 다르게 표정에서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다 티가 난다니까?"
"용사 시절이랑은 다르게…"
애런은 말을 되뇌었다. 내가 용사가 아니라 악마라서 그런 면에서 차이가 나는 건가? 분명 용사라면 이런 일이 있어도 침착함을 유지했겠지.
그런 생각이 들어 얼굴을 확 구겼다. 카펠라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애런의 불안감을 키우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애런?"
"카펠라, 만약 내가 네가 아는 애런이 아니라면 너는 어떡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애런은 자신의 집에서 봤던 것, 시체가 살아 움직이고 자신이 애런이라고 했던 것, 미호가 세운 가설들을 말해주었다.
"죽지도 않고 무영창으로 그만한 마법을 쓰는 거라면 확실히 용사긴 하네요."
"그렇지… 미호는 둘 다 애런일 가능성도 있다고 했지만, 그것도 나를 생각해서 했던 말이겠지. 그 녀석 착하니까 말이야."
영혼이 다시 재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시 터무니가 없다. 미호의 얘기를 들을 때는 불안한 상태였으니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그걸 믿었던 것 같다.
"나는 두 번째 가설을 믿어. 용사님이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카펠라, 용사는 신이 아니야."
"내가 아는 용사님이라면 죽어서라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다시 살아날 사람이니까."
"사람이 되살아나다니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그런 불가능…"
"괜찮아. 나 생각해서 그렇게 말해주지 않아도 돼."
카펠라는 자신의 말을 끊은 애런을 빤히 바라봤다. 불안감에 어두워진 눈동자,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입술.
확실히 자신이 아는 용사라면 저런 반응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용사도 내색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두려움도 느끼고 외로움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걸 알기에 더더욱 지금 눈앞에 있는 애런이 용사라는 믿음이 생겼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라면 저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용사님을 생각해서 이렇게 말한다고? 아니, 나는 진심으로 내 눈앞에 있는 애런이 전생 용사라고 믿어요."
"나도 나를 못 믿는데?"
"네가 믿든 못 믿든 나는 믿어. 나를 못 믿겠다면 그걸 증명해줄게."
카펠라는 애런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따라와요."
그리고는 마탑 정상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애런을 이끌고 들어갔다.
창문이 없는 방이었지만 천장에서 빛나고 있는 푸른 은하수가 밖에 나와있다는 느낌을 주어서 답답하지는 않은 방이었다.
카펠라는 애런을 잘 정돈되어있는 하얀 침대로 밀어서 앉혔다.
"내가 당신을 악마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침대에 걸터앉은 애런의 위에 올라타서 두 팔로 목을 휘감고 갑작스레 입술을 맞추었다.
카펠라의 작은 숨결마저도 느껴질 정도의 가까운 거리. 부드러운 혀가 애런의 혀를 탐하듯이 입 안을 휘저었다.
방금 마셨던 차 때문인지 키스는 달콤했다. 애런은 카펠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하고만 있었다.
츄릅… 츠르릅…
카펠라는 애런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휘감은 팔을 움직여서 서로의 고개를 조금씩 틀어가며 몇 분 동안이나 키스를 계속했다.
"카, 카펠라 너…"
"하아… 후."
조금 흥분했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카펠라는 숨을 몰아쉬고는 늘어난 침을 혀로 핥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전생에는 고자가 아닌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네요."
자신의 엉덩이를 찌르고 있는 단단한 무언가를 느꼈는지, 조금씩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였다.
"읏, 흐읏… 내가 말했죠? 나는 믿는다고. 악마랑은 이런 짓 안 해요…"
"너…"
그리고 애런은 바지가 촉촉하게 젖어가는 것을 느꼈다. 치마를 입고 고간을 비비던 카펠라의 팬티에서 물이 흥건하게 흘러나온 것이었다.
"또 바지 젖게 만들어버렸네요… 벗어요. 이번에는 내가 빨아줄게."
뭐를 빨겠다는 거지..?
애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걸 알려주겠다는 듯이 카펠라가 침대 밑에 쭈그려 앉아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