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옛날 집
* * *
모든 색이 다 빠진 듯한 긴 백발을 가진 노인이 침대에 앉아서 애런과 미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육이 빠져서 축 늘어진 살, 텅 빈 눈동자, 그런데도 아직 미형은 지워지지 않은 얼굴.
그 모습은 분명 죽었을 터인 전생의 애런과 똑같은 것이었다.
"내 시체가 왜 움직이는 거야…"
애런은 당황해서 손에서 검을 놓칠 뻔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시체가 17년이 지난 아직 죽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인지, 왜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지…
"마왕…"
노인이 애런을 보고 중얼거리자, 텅 빈 눈동자를 살기가 가득 채우며 차갑게 식어갔다. 감정은 배제하고 그저 살의만 드러낸 노인은 기계와도 같아 보였다.
"마왕은 죽여야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자기 일을 하려는 듯이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나는 마왕을 죽이기 위해서 생겨났으니까… 죽여야 한다."
스르릉… 벽에 걸린 노인이 들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워 보이는 대검을 한 손으로 쉽게 빼 들었다.
"애런, 저게 네 시체라는 것은 알겠다만 일단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알고 있어."
늙어서 몸에서 근육이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인이지만 용사의 몸이다. 애런은 자신을 상대로 방심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몸과 마검에 마기를 두르자, 노인은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은 몸으로 순식간에 애런에게 접근했다.
카앙!!
대검과 마검이 부딪쳤다. 힘은 애런쪽이 우세했다. 하지만 노인은 자연스럽게 무영창으로 마법을 발동하며 애런을 몰아붙였다.
대기 중의 수분이 모여서 푸른 얼음 창이 생겨나더니 애런을 향해 날아왔다.
"Hyooa oouem."
미호가 빠르게 불의 벽을 만들어 창을 막아내고 애런은 공격을 위해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캉! 캉! 공중에서 몇번이고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그것에는 끝이 없었다. 마치 거울과 가위바위보를 하는 느낌이었다.
가위를 내면 노인도 가위를 내고, 바위나 보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수의 공격 수단이 노인과 겹쳐 치며 상쇄되었다.
어느 순간 나무로 지은 집은 다 무너졌고, 자연스럽게 공방을 이루며 숲으로 나왔다.
기술은 완벽하게 똑같다. 힘은 애런이 조금 우세하지만, 노인은 지치지 않는지 항상 전력으로 검을 휘둘러서 점점 호각이 되어갔다.
마법쪽은 미호가 적재적소로 대응해주고 있다지만, 체력이나 마나, 어느 쪽이든 결국 먼저 지쳐서 노인에게 밀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의 저 몸은 절대 지치지 않는 초월적인 용사의 몸이니까.
"미호, 시간 끌어봤자 좋은 것 없으니까 빠르게 끝내자."
"말은 쉽다만, 방어하기에도 벅찬데 방법이 있느냐?"
"균형을 깨뜨릴 거야."
지금의 애런이 노인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그건 단 한 가지다. 아직 17살이지만 근육이 가득한 몸. 힘만큼은 뼈만 앙상한 노인을 앞선다는 것.
"한 번. 딱 한 번이야."
애런은 노인의 검을 받아내며 말했고, 미호는 날아오는 마법을 막으며 들었다.
"저놈의 손에서 대검을 떨어뜨려 놓을게. 그때를 노려서 공격해줬으면 좋겠어."
"허어, 지금 나보고 저 무식한 위력의 무영창 마법들을 막으면서 네가 만들어낸 틈을 타서 공격을 하란 말이냐?"
"안 되려나? 너라면 가능할 줄 알고 말한 거였는데."
정신을 잃어서 보지는 못했지만 마왕은 미호가 필리스 대수림의 수호자도 쓰러뜨렸다고 했다.
그 정도 실력이라면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미호는 미호였나 생각하며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려는 찰나. 애런의 감정을 공유받은 미호가 외쳤다.
"시, 실망하지 마라…! 하면 될 것 아니냐? 무영창으로 마법을 쓰는 저놈보다 더 빠르게 두 개의 마법을 동시에 쓰면…"
자기가 말하면서도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으음… 하면 되지 않느냐… 불가능해 보이기는 하다만… 무영창으로 마법을 하나, 영창으로 마법을 하나 쓰면 되지 않느냐…"
애런은 마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호가 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몰랐기에 대충 부탁한다고 말했다.
미호가 영창을 시작하는 걸 확인하고 노인의 검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마기를 한 곳에 집중시켰다.
이제 기술 따위는 필요 없다.
상대가 자신과 똑같은 기술로 상쇄한다면, 잠시나마 더 우세에 있는 힘을 이용해서 짓누를 뿐이다.
자신이라면 어떤 공격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아는 애런은 검을 위로 들어 올리고 온 힘을 담아 내려쳤다.
"나라면 이걸 막아내지 않고 흘려내며 반격하겠지."
그 말은 예언처럼 노인은 검을 비스듬하게 세워서 애런의 공격을 흘리려고 했다.
대처 자체는 옳았지만, 노인은 간과한 것이 있었다. 흘린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몸은 너무나도 약해져 있어 그것조차 버틸 힘이 없다는 것을.
카앙!! 휘두르는 와중에 궤도를 살짝 바꾼 검이 노인의 대검과 부딪쳤다. 찌잉 대검이 떨리고 전해진 충격이 노인의 손에 도착했다.
노인의 손은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검을 탁 놓아버렸다. 공격 수단을 하나 잃었지만, 그에게는 마법이 남아있다.
화르륵! 하늘에 수많은 파이어볼이 떠올랐다. 그것들은 유도탄과 같이 애런과 미호를 노리며 끈질기게 따라왔다.
"Jalocne gaouega."
때마침 미호의 영창도 끝이 났다. 강한 바람이 파이어볼을 막아냈고, 미호의 손 끝에서 발사된 보랏빛 번개가 노인의 몸을 꿰뚫었다.
노인의 몸은 번개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하지만 애런은 그게 끝이 아님을 알고 있다.
천사가 걸은 죽지 못하는 저주는 저런 상처쯤은 금방 치료해내고 멀쩡하게 만들어버린다.
그걸 알기에 애런은 노인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다리와 머리에 무거운 바위를 옮겨서 짓눌러버렸다.
[잘했다 용사. 저 가증스러운 네 몸이 짓이겨져 있는 것을 보니, 내 속이 시원하다.]
"이 새끼가 뭐라는거야…"
둘 다 자신의 몸이고, 애착이 있는 애런은 오랜만에 마왕을 조용 시켰다.
최근에는 꽤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강제하지는 않았는데, 역시 마왕은 개새끼였다. 남의 몸이 부서진 걸 보고 좋아하다니 말이다.
"보았느냐 애런! 영창과 무영창으로 동시에 두 가지 마법을 사용하는 나의 모습을!"
미호는 애런의 앞에 서서 허리에 두 손을 얹고 가슴을 활짝 편 채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히죽히죽 웃으면서 칭찬해달라는 듯이 귀를 쫑긋거리는 것이 미호답지 않게 귀엽게 보여서 애런은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내가 애로 보이느냐? 똑바로 칭찬을 하며 칭송하란 말이다. 위대한 대마법사 미호 님을!"
"나랑 감정 공유된다며. 자, 내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너의 칭찬을 잘 들어보렴."
"..."
미호는 눈을 감고 공유되는 감정에 집중했다. … 하지만 흘러들어오는 것은 칭찬과는 동떨어진 것들이었다.
자신을 속인 것을 안 미호는 다시 빽빽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애런, 네 녀석 내 활약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느냐?! 빨리 네 입으로 칭찬하란 말이다! 오랜만에 활약한 나를…!"
"잘했어 잘했어."
애런은 대충 미호를 칭찬해주고 자신의 시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노인의 머리를 짓이긴 바위를 치웠다.
스르르… 터져버린 뇌가 빛이 모이며 다시 생겨났고, 부서져 버린 두개골이 자석처럼 달라붙으며 형태를 잡아갔다.
자신이 용사일 때는 느끼지 못 했지만, 상당히 징그럽구나 하고 생각했다.
"야."
애런은 자신의 몸이었던 것을 불렀다. 몇십 년을 봐오던 몸을 제 3자의 눈으로 보니 마치 남처럼 느껴졌다.
"... 악마는 죽여야 해."
노인은 계속해서 정신이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자신도 과거에 저랬을까 라는 생각에 애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야, 너 뭐냐? 악마냐? 내 시체에 빙의한 거냐?"
"..."
"왜 말이 없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노인의 뺨을 가차 없이 때렸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노인을 때리는 것이지만, 자신의 몸이었던 것이라 그런지 전혀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애런. 용사다."
"지랄하지 말고. 네가 나일 리가 없잖아."
애런은 얼굴을 콱 구기고 헛소리를 하는 노인의 얼굴을 퍽퍽 때렸다.
악마라면 고통을 주다 보면 몸에서 빠져나가겠지라는 생각으로 때린 것이었지만, 노인은 아주 태연하게 맞고만 있었다.
"야, 네가 나라면 카펠라랑 나만 아는 비밀이 뭔지 말할 수 있겠네. 그거 말해 봐."
"... 말할 수 없다."
"왜."
"그 일은 무덤까지 묻어두겠다고 카펠라와 약속했었다."
"허, 이 새끼. 내 기억도 읽었어?"
애런은 기가 차서 다시 노인의 얼굴을 때리려고 주먹을 들었다.
[잠깐 기다려봐라. 용사.]
"뭔데."
기껏 조용시켜놨던 마왕이 일어나서 말리길래 주먹을 내려놓았다.
[이 노인… 아무리 봐도 네가 맞다.]
"무슨 개소리야. 나는 죽었었는데."
[내가 본 너는 20살 무렵이었지. 지금 네 눈앞에 있는 노인은 딱 그때 무렵의 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
무슨 소리일까. 20살 무렵의 내가 어땠다는 거지? 애런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보려 했지만,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난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는데."
[저 공허하며 차가운 눈, 악마에 대한 이유 없는 혐오. 뭐, 그런 것들에서 네가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너는 이놈도 나로 보인다고?"
[그런 셈이지.]
애런은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마왕의 말 그대로 그 눈에는 무엇도 비춰지지 않고 비어있었고, 애런을 향한 보이지 않는 살의만이 담겨있었다.
"악마가 내 몸에 빙의해서 기억을 읽었을 확률은?"
"애런."
그때 미호가 어깨를 툭 건드리며 불렀다. 애런은 고개만 돌려서 미호를 바라봤다. 미호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왜?"
"호접지몽이라고 아느냐?"
"... 알고 있지."
"네가 그런 가능성을 제시한다면, 네가 용사의 기억을 읽은 악마일 가능성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네."
갑자기 머리가 깨질듯한 두통이 생기는 것 같다. 자신이 애런이 아니라 악마일 가능성… 생각해보니 충분히 있을 것 같았다.
애런은 베로니카의 소환수, 스핑크스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 애런은 잠깐 고민을 하고 대답했었다.
나는 애런이다.
인간도 악마도 천사도 아닌 존재.
그 말은 몸에 마왕을 봉인하고 미카엘이 남긴 성흔이 있으니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어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기도 했다.
그때에도 자신이 애런이라는 것만큼은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과연 애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으윽…!"
애런은 계속해서 밀려오는 의문에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까득. 이를 꽉 물어서 잇몸에서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하지만 입안에서 피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애런, 일단 진정하거라."
"진정…?"
진정하게 생겼냐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미호에게 괜한 화풀이를 할 뻔해서 애런은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애런의 감정이 공유된 미호도 역시 초조해지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최대한 마음을 추스르며 애런에게 자신의 평정심을 전해주려고 노력했다.
"하아… 하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머리는 아프고 토할 것 같고… 애런은 갑갑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헐떡였다.
"과호흡이다. 천천히 숨을 쉬어라."
미호가 뭐라고 하지만 잘 들리지가 않았다. 애런은 정신이 어딘가 깊은 곳으로 점점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 들리나."
혀를 차고 애런의 멱살을 잡아서 입을 맞췄다. 그리고 후우… 조금씩 자신의 숨을 불어넣어 줬다.
"이런다고 될지는 모르겠다만…"
오랜세월 살아왔지만, 과학적인 근거는 없는 대처법이었다. 하지만 미호는 애런이 진정하고 숨을 제대로 쉴때까지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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