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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60화 (60/92)

〈 60화 〉 옛날 집

* * *

자신을 탐욕의 마왕이라 말하던 베로니카가 사라지자 마법사들은 그제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10분도 안 되는 공방이었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쏟아져나오는 소환수들을 막는 것은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했다.

누군가가 놓치기 시작하면 도미노처럼 다 같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는 그 압박감은 며칠 동안 내내 싸운 것 같이 기운이 쭉 빠지게 했다.

"피해가 크다고 해야 할지… 작다고 해야 할지…"

애런은 마탑의 정상에서 베네쿠스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왕과의 전투가 있었던 것치고 피해는 적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피해는 크다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카펠라가 미리 언질을 주고 대비를 해놓아서 대처가 빨랐기 때문에 인명 피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베로니카의 주먹과 카펠라의 마법의 여파로 인한 피해의 흔적은 부서진 건물을 통해 보여졌다.

거기다가 베네쿠스를 지키던 방어막이 파괴된 것과 베로니카가 있던 마탑의 손상이 심해 재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도 상당한 피해라고 할 수 있었다.

"방어막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애런은 마탑의 옥상에 걸터앉아있는 카펠라의 옆에 앉아서 물었다.

"원래 마탑을 축으로 대육각형의 마법진으로 발동한 방어막이었는데, 마탑 하나가 부서져서 마법진을 새로 고쳐 썼어."

"그래?"

"덕분에 강도는 저번보다 줄었어. 마탑을 재건하고 새로운 마탑주가 생기기 전까지는 조금 취약해지겠어요."

카펠라는 베네쿠스의 하늘에 쳐져 있는 방어막을 올려다봤다.

거의 다 죽인 베로니카를 놓쳤다… 마왕을 약화하고 온전한 상태에서 싸울 기회가 다시는 없을 텐데… 그런 절호의 기회를 실수로 놓쳐버렸다.

애런은 괜찮다고 했지만, 베로니카는 베네쿠스에 오고 나서 비상식적인 속도로 성장했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더 성장해서 괴물이 되기 전에 죽이지 못한 것을 분명 후회하게 될 것만 같았다.

딱! 인상을 쓰고 있는 카펠라의 이마를 애런이 손가락을 튕겨서 때렸다.

"뭐야."

카펠라는 빨갛게 부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비비면서 애런을 흘겨보았다.

"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웃는 게 보기 좋아."

마계에서 긴장하라고 해도 용사와 성녀가 같이 있다면 무적이라며 천진난만하게 웃던 모습. 그때는 긴장하라며 이마를 때렸지만, 지금은 쓸데없이 걱정이 많아서 때렸다.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려고 하면 언젠가 마음이 무너진다. 그걸 전생에 겪어봐서 아는 애런이었기에 카펠라는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물론 카펠라가 어떤 걱정을 하는지는 알겠고 그럴만한 일이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웃게 해주던가… 툭하면 걱정이나 끼치면서 어떻게 웃어달라는 거예요?"

"그건 뭐라고 할 말이 없네. 전생이랑 다르게 지금은 안 믿음직스러워서 그런 것도 못 해주나 봐."

애런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자신이 그때 그렇게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착각을 하는 애런을 위해 조금 용기를 내보기로 한 카펠라는 애런의 뺨을 두 손으로 잡아서 자신의 방향 쪽으로 돌렸다.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리면서도 애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 웃게 할 수 있는 방법 알려줘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말했다?"

카펠라의 작은 두 손이 애런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거리는 가까워졌고,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뭐라고 말도 못 하게 촉촉한 혀가 들어와서 애런의 혀를 몇번이고 휘감았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애런의 눈동자는 커져서 갈 곳을 잃었지만, 어디를 봐도 카펠라의 얼굴 밖에 보이진 않았다.

"... 후으."

카펠라가 드디어 입을 떼고 길게 늘어진 침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자기가 해놓고 창피했는지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있었지만, 옛날처럼 순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혹시 싫었어요?"

"아니… 싫었다기보다는 당황해서… 그 뭐냐, 네가 갑자기 이럴 줄은 상상도 못 해서…"

전생의 무덤덤한 모습과는 달리 당황해서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애런을 보며 카펠라는 피식 웃었다.

"안 싫었으면 됐고. 나 웃는 모습 보고 싶으면 가끔 먼저 해줘요."

"... 어, 어. 그래."

"또 내가 가끔이라고 했다고 진짜 가끔 하는 거 아니죠? 볼 때마다 해도 상관없으니까 편하게 해."

그렇게 말하고 카펠라가 일어나서 귓속말로 조용히 말한 것은 애런이 말도 못 하게 만들었다.

"더한 것도 괜찮아요."

애런이 벙쪄서 붕어처럼 입만 꿈뻑거리는 것을 보고는 배시시 웃으며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면서 말했다.

"아, 참고로 나는 전생의 용사님보다 지금이 더 좋아요. 표정이 다양해서 보기 좋아."

"어…"

카펠라가 가고 난 뒤에도 넋이 나간 채로 있던 애런은 해가 지면서 찬 바람이 불어올 때 즈음에 정신을 차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밑에 내려가자 의자에 앉아서 넋 놓고 있던 미호가 벌떡 일어나 호다닥 달려왔다.

"애런, 옥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까 내려온 카펠라의 얼굴이 홍당무던데."

"응?"

미호는 히죽 웃으며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네 공유된 감정이 나한테까지 전해져왔다. 이렇게나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냥 그런 일이 있었어."

"무얼 그리 쑥스러워하느냐?"

애런이 의자에 앉으니 미호도 따라서 무릎 위에 앉아서 쿡쿡 웃었다.

"혹여 발정한 것이 창피한 것이냐?"

"뭣…"

애런은 미호를 붙잡아 남이 들으면 오해할만한 말을 하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미호, 입 좀 다물어."

"으브브븝."

뭐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지만, 들어봤자 허튼소리일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막고 있으니 카펠라가 서류를 작성하며 말을 걸었다.

"베네쿠스에서는 얼마나 더 있을 생각이에요?"

"음… 그렇네. 이자벨라 님을 구할 수 있을 정도가 될 때까지는 있으려고."

"그러면 꽤 오래 있겠네."

스윽. 슥… 펜이 종이 위를 거니는 소리가 들리다가 멈췄다.

"그럼 전에 살던 집에 가서 내가 줬던 반지나 찾아와요."

"아, 그거?"

"응, 그게 있으면 도움이 될테니까 다시 가져와."

마나 회복력을 높여주는 아티팩트였던 반지. 마법을 쓰지 못하는 애런에게는 필요없을 거라 생각했어서 말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미호와 계약을 했다면 얘기는 다르다. 이미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른 미호에게 마나만 공급해준다면 그건 큰 전력이 될테니까.

*

"... 조심해서 갔다오세요."

도로시는 눈에 다크 서클이 생긴채로 하품을 크게 하며 애런과 미호를 배웅하러 나왔다.

"도로시 님, 괜찮아요? 요즘 계속해서 방 안에만 틀어박혀 계신 것 같으신데."

"언니를 구할 때 제가 걸림돌이 되면 안 되니까 노력해야죠… 애런 님이야말로 최근에 무리하신 것 같으신데 괜찮으신가요?"

"괜찮다! 뻔뻔하게도 내 생명력을 받아서 쓰고 있으니, 멀쩡한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

애런의 등에 매달려있는 미호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대답했다.

"... 뭐, 그런거라면 다행이고요."

"응? 어째 기운이 없지 않느냐. 평소라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텐데."

"미호 님은 저랑은 다르게 은근히 도움이 되는 것 같으니까요."

피곤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린 것인지, 자신감이 떨어져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애런은 도로시의 어깨를 잡아 펴주었다.

"어깨 펴요. 미호는 저를 도와줬다지만, 도로시 님은 미호가 물고기에게 잡아먹힐 뻔한 걸 구해주셨잖아요?"

"으음… 그런가요?"

"네, 그러니까 자신이 쓸모없다거나 그렇게 생각하지는 마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이자벨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성녀로 인정하게 만들라는 그 말. 쓸모없다고 생각하며 풀 죽어있을 것이 아닌,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나도 같이 가주고는 싶은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힘들 것 같아."

"괜찮아, 어차피 그 숲에는 위험한 거 없어."

"말은 매번 그렇게 하면서 실제로는 안 그랬으니까 그러지."

카펠라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을 보고 애런은 다리와 발에 마기를 집중시켰다.

"미호, 꽉 잡아."

"으응…? 뭘 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뭐하기는. 여기서 뛰어내리려는 거지."

"뭐, 뭐, 뭐하는 것이냐?"

미호는 계단이 아닌 창문으로 걸어가고 있는 애런을 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빠른 길로 가려고."

애런은 크게 몇 걸음 도움닫기를 하더니, 카펠라의 마탑 정상에 있는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미, 미친 것이냐?! 평범하게 가면 될 것을 굳이 이렇게 가야겠느냐!"

미호는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게 팔다리를 애런의 몸에 꽉 휘감아 나무늘보처럼 매달린 채로 외쳤다.

"이렇게 가는 게 더 빨라. 착지하기 전에는 마법 부탁해."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그럴 것이니라!"

구름을 몇번이나 뚫고 미호가 소리는 몇번이나 질렀을까. 높은 마탑에서 뛰어내린 덕에 베네쿠스의 끝자락까지 도착하는 데 시간은 별로 걸리지 않았다.

착지할 때의 충격은 미호가 마법으로 완화시켜주어서 신체에 무리가 가는 일도 없었다.

"흐어어… 애런,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내가 베로니카에게 쫓기는 것도 아닌데, 이런 경험을 또 해야겠느냐…"

미호의 심장은 기대고 있는 등을 통해 애런마저도 느낄 정도로 크게 뛰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고 애런의 몸을 잡고 있는 손에는 긴장으로 식은땀이 가득해 옷을 적셨다.

"멀쩡하게 내려왔으니까 잘 된 일인거지."

애런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미호를 보고 피식 웃었다. 옥상에서 카펠라와 무슨 일이 있었냐며 깐족대면서 묻는 미호에 대한 작은 복수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

전생의 애런이 살던 숲은 용의 훈련장이라 불렸다.

마계와 인간계를 나누는 용의 협곡과 가까웠던 탓에 아직 사냥에 미숙한 새끼 용이 사냥을 하기 위해 가끔 왔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드문드문 나무가 무너지고 불에 탄 자국이 있는 것은 아직 미숙한 새끼 용의 사냥 흔적이었다.

"그러면 네 집 근처에는 용이 나온다는 소리가 아니더냐?"

미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카펠라에게는 위험한 것이 없다해놓고, 용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니, 그래봤자 아주 가끔씩이야. 내가 몇 십년을 살았는데도 마주친 적은 별로 없어."

"불안하다… 불안하기 짝이 없어…"

새끼 용이라고는 하나 용은 용이다. 카펠라의 마법에 수백, 수천마리의 용이 죽는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인외의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이기 때문이다.

반면, 카펠라와 똑같이 대마법사인 미호는 고작 새끼 용 따위에 겁을 먹어서 애런의 등에 딱 달라붙은 채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경계했다.

"새끼 용 정도로 뭘 불안해하고 그래?"

"나를 봐라, 이 작은 몸집이라면 새끼 용이라고 할지라도 한 입에 꿀꺽이란 말이다…!"

"확실히… 하늘에 던지면 용이 물고 가겠는걸."

애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등에 업혀있는 미호를 한 손으로 들었다. 자신을 숨겨주는 애런의 등이 없어지자 미호는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하지 마라! 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을 금방이라도 던져버릴듯한 행동을 취하려는 애런을 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섭섭하네. 내가 진짜로 던지기라도 할 것 같아?"

"그건 아니다만…"

"아, 도착했다."

숲 깊은 곳에 나무 덩굴에 휘감긴 전생의 애런이 살던 작은 집이 보였다. 덩굴에 감긴 것을 제외한다면 17년 전 애런이 죽기 전과 똑같은 광경이었다.

집 앞에는 나무를 베었던 도끼가 나무 기둥에 박힌채로 그대로 있었고, 몇 십년 전에 쌓아뒀던 장작에서는 버섯이 자라있었다.

"어떻게 나무로 지은 집이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이냐?"

"글쎄."

애런은 추억에 잠기며 자신이 살던 집의 문의 손잡이를 잡고 밀었다.

쿵!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 관리를 받지 못해 썩어가던 문은 애런이 살짝만 밀었는데도 힘없이 쓰러졌다.

"... 아무도 안 사는 것이 맞느냐?"

미호의 질문은 오래 방치된 집에 문이 쓰러졌는데도, 조금의 먼지가 일어나지 않자 나온 것이었다. 애런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몸에 마기를 두르고 검을 빼내었다.

"뭐야…"

집 안에 들어온 애런과 미호는 무언가를 보고 입을 벌린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이제 사라졌어야할 것이 아주 멀쩡하게 남아있었고, 집에 들어온 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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