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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59화 (59/92)

〈 59화 〉 탐욕의 마왕

* * *

방안을 가득 채운 소환수들 중 정령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애런의 품속에 있는 수호자의 증표를 느끼고, 대수림이 진정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베로니카는 그런 사소한 반응을 알아차리고 용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필리스 대수림을 갔다 왔나 보네. 저번에 왔을 때 정령이 알려줬나?"

어눌했던 목소리는 귀에 또렷하게 들리는 힘이 실린 목소리가 되었다. 이제는 자신의 존재를 숨길 생각이 없는 것인지 방안을 집어삼킬 듯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베로니카는 고깔모자를 벗어 창밖으로 던졌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있을 수 없는 작고 뾰족한 뿔이 두 개 솟아있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을 알고 온 것이라면 편하게 있는 것이 낫지 않겠나."

자신의 정체를 적진 한가운데에서 들켰음에도 침착하다 못해 여유가 넘쳤다. 역시 마족을 아우르는 왕인 마왕답게 오만했다.

"정체를 들킨 걸 알아차렸으니, 정령과 계약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자."

카펠라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언제 영창을 했는지 그 작은 손에는 이미 마나가 뭉쳐져 푸른 별을 이루고 있었다.

"Peaooga vialu."

그리고 별에 균열이 생기고 붕괴되며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하더니, 콰아앙­! 굉음을 내며 마탑의 정상을 없애버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베로니카도 폭발에 휘말렸을 것 같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런 선물은 필요 없는데 말이야."

펄럭! 날갯짓을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폭발에 생겨난 연기를 확 걷어냈다.

어느새 새끼 용이 마탑의 위를 날고 있었고, 목 부분에는 베로니카가 일어서서 카펠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데, 이것도 네가 한 짓이냐?"

베로니카는 약간의 그을음이 생긴 팔을 휘두르며 물었다.

"맞아, 몸이 짓눌리는 것 같고 힘도 잘 안 들어가지?"

"상관없다. 이 정도 핸디캡은 주어야지 조금 해볼 만하지 않겠나."

"해볼 만 해? 약해진 몸으로 혼자서 나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야?"

그 말에 답하듯 베로니카는 허공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파문이 번지기 시작했다.

"혼자? 내가 소환사라는 것을 잊은 것이냐?"

마치 바다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많은 파문이 생기더니 일렁이는 공간에서 수많은 소환수들이 머리를 내밀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종류도 용부터 시작해서 고위 정령, 온갖 마족으로 다양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베로니카의 소환수들 때문에 햇빛이 가려져 베네쿠스가 어두워졌다.

압도적인 머릿수. 베네쿠스의 마법사 수를 다 합한다고 하더라도 저 정도는 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수도 많지만, 하늘에는 아직도 파문이 번지며 소환수가 끝없이 나오고 있었다.

"터무니가 없네."

"베로니카 녀석, 베네쿠스를 소환수로 가득 채울 셈이더냐?"

애런과 미호는 마치 마계에라도 온 것 같은 광경에 약간이나마 당황했지만, 카펠라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도 말했을 텐데. 혼자서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냐고."

퍼버버벙­! 카펠라와 베로니카의 마탑을 제외한 4개의 마탑의 옥상에서 일제히 빛이 번쩍였고, 하늘을 뒤덮는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잇따라서 얼음 창들이 소환수들의 몸을 꿰뚫고, 번개가 태워죽이고, 바람의 칼날이 양단시켰다.

"네 소환수는 다른 마탑주들이 맡아줄 거야. 그러니 나는 너만 상대하면 되는거고."

"큭… 크하하하! 고작 저것들 상대하기도 벅차 보이는데. 재밌네."

베로니카는 베네쿠스에 있는 모든 마법사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고 웃음을 뚝 그치고 세게 허공을 두드렸다.

두웅­! 두웅­!

공기가 떨리며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때까지의 파문과는 크기부터가 달랐다. 공간이 뒤틀리고 한쪽에서는 거대한 용의 머리가 튀어나오며 먹이를 위협하듯 포효를 내질렀다.

"크워어어어!!"

새카만 검은 비늘과 반이 부러져있는 뿔, 적색의 날카로운 눈동자. 흔한 용의 외견이지만, 이 용은 다른 것이 있었다.

"뭐 저리 커…"

애런은 계속해서 공간을 빠져나오는 용의 몸체를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용의 몸집은 살아온 세월과 강함에 비례한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용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봤던 용 중에서 가장 거대했다.

"어떠냐? 용의 협곡에서 잡아 온 용들의 수장, 장로 용이다."

베로니카는 자신이 수집한 것을 자랑하듯이 말했다. 일부러 크게 소리 내 웃었던 것은 이걸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효과도 있었다. 몇몇 마법사는 싸움을 포기하고 털썩 주저앉을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감이었으니까.

"그리고 옆에는…"

뒤틀린 하얀 불꽃이 형태를 잡아갔다.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얼굴이나 머리카락 같은 것은 없고 몸의 형태만 있는 정령이었다.

저건 애런도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정령왕..."

전생의 애런과 계약을 하고 힘을 빌려주었던 정령들의 왕이었다.

"필리스 대수림에 왜 없나 싶었는데."

저것들은 다른 소환수들과는 격이 다른 것들이었다. 하나하나가 마왕과 필적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소환수였다.

애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마탑주들은 끝없이 나오는 소환수들을 제압하느라 손이 남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는 얘기는 카펠라 혼자서 저 셋을 감당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건 아무리 봐도 무리일 것 같았다.

"판단을 잘못했어."

애런은 전생에 봤던 마왕을 기준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베로니카는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마왕이었다.

왜 파이몬처럼 마계에서 입지를 다지지 않나 싶었던 의문에도 답이 나왔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자신을 따르는 마족이 없더라도 혼자서 저만한 군대를 꾸리는 것이 가능하니, 마계에서의 입지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다.

어떡하지.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나... 이를 빠득 갈면서 생각을 하고 있자.

"진정해라 애런."

그때 등에 매달려있는 미호가 머리를 툭 두드리며 말했다.

"네가 진정하지를 못하니 나까지 심란해지지 않나."

"아… 미안."

미호의 감정이 공유가 되면서 조금은 침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카펠라의 표정을 봐라. 녀석은 아직 자신 있다는 표정을 하고 있지 않나."

미호의 말에 카펠라를 바라보니 이런 상황임에도 입가에 미소가 있었다.

마왕 토벌 당시 마왕의 마법에 당한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카펠라는 오랜 시간 동안 강해지는 것에 집착을 해왔다.

그것은 다시는 발목을 잡지 않겠다는 마음과 홀로 인간계를 지키려는 애런의 짐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피나는 노력 끝에 얻은 힘이 드디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자신의 실력에 대한 의심은 없다. 불안함 따위는 없고 자신감만이 있었다.

"Suine norr jawoga ooue lua."

카펠라가 영창을 한 마디 할 때마다 하늘에 마나가 모이며 빛을 발했다.

적은 허수아비가 아니다. 영창을 하는 것을 내버려 둘 리가 없는 베로니카는 장로 용과 정령왕에게 카펠라를 직접 노리도록 명령했다.

"Kuwooue oi sua."

하지만 카펠라의 영창은 그럴 틈을 주지 않을만큼 빨랐다. 쿠우우우…! 마법이 발동되자 공간이 뒤틀리며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생겨났다.

장로 용은 빠르게 날아서 빨려가는 것은 피했지만, 정령왕은 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짓눌리며 공간의 너머로 사라졌다.

"허… 용사만 경계하면 될 줄 알았더니, 또 다른 괴물이 있었네?"

좋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눈앞에 보이는 탐스러운 힘에 베로니카는 히죽 웃었다.

베로니카는 장로 용을 밟고 블랙홀을 피해 순식간에 카펠라에게 접근했다. 대마법사도 방어하지 못하는 주먹을 뻗기 위해 팔을 크게 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카펠라는 믿는 구석이 있는지, 피하지 않고 영창을 계속했다.

"애런, 마법은 걸어줬다!"

"알겠어."

미호가 신체를 강화해준 애런이 그걸 보고 마기를 두른 채 뛰어가는 것도 일순간이었다. 마검을 빼 들고 카펠라를 치려는 주먹을 흘려냈다.

"이건…"

베로니카는 자신의 주먹을 흘린 애런을 보고 무언가를 눈치챈듯 중얼거렸다.

후웅­!

베로니카의 주먹이 검에 빗겨나가면서 분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리고 공간에 파문이 일더니 충격파가 생겨 주먹과 일직선 위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다행히 높은 곳에서 전투가 일어나 피해는 적었다. 부서진 것은 베네쿠스의 높은 건물 일부뿐이었다.

"크윽…!"

애런은 마기를 낚싯바늘처럼 만들어서 마탑에 걸치고, 공중에서 몸을 고정해서 충격의 여파를 버텨냈다.

"잘했어요."

베로니카의 공격을 애런이 막아내는 동안 카펠라는 공격을 위한 영창을 끝냈다.

하늘에 떠있는 푸른 별이 형태를 바꾸어 화살이 되었다. 투웅! 그리고 휘어진 공간을 활시위 삼아 공중에서 발사되어 베로니카의 몸을 꿰뚫었다.

"... 죽이지는 못한 모양이야."

카펠라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베로니카는 용마저도 소멸시켜버리는 마법을 두 팔로 막아냈다. 분명 팔을 꿰뚫으면서 몸에 깊은 상처가 남았기는 하지만 베로니카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내 패배를 인정하마!"

후우우욱!

블랙홀을 피해 날고 있던 장로 용이 화살을 맞고 떨어지는 베로니카를 받아내어 베네쿠스의 방어막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나도 준비를 해놓도록 하지."

베로니카는 주먹을 꽉 쥐고 방어막을 내리쳤다. 몇 번의 파문이 생기더니 용의 브레스도 버티던 방어막에 금이 생기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 이런 사태가 일어날 줄 예상하고 있었나."

2년 전부터 끊임없이 방어막을 소모하게 하던 용들. 베로니카는 그 공격으로 인해 가장 많이 마모된 곳을 쳐서 틈을 만들었다.

"그때는 마탑주 베로니카가 아닌 탐욕의 마왕 베로니카로서 너희들을 반겨주마."

콰드드득! 금이 생긴 방어막을 장로 용이 몸을 들이 박아 틈을 억지로 벌려 베네쿠스의 상공으로 날아갔다.

"..."

까득. 카펠라가 이를 꽉 물었다. 분명 죽일 생각으로 기습을 한 것이었는데, 죽이지 못하고 놓쳐버렸다.

'하나라도 미리 수를 줄여놔서 애런에게 가는 부담을 줄여줄 생각이었는데… 방어막의 내구성을 확인하지 않았던 건 내 실수야.'

그렇게 생각하며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맺힐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베로니카가 후퇴하자 하늘에서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던 소환수들도 모두 사라졌다.

애런은 마탑에 매달린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카펠라의 곁으로 내려왔다.

"카펠라, 괜찮아?"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아까 베로니카의 주먹을 흘릴 때 충격파로 고막이 찢어졌잖아요."

카펠라는 손수건으로 애런의 귀에서 흘러나온 피를 닦아주며 말했다.

"... 미안해요. 여기서 마왕 한 마리는 죽여준다고 말했는데 놓쳐버렸어."

"네가 그걸 왜 사과해."

애런은 울적해져있는 카펠라의 머리에 손을 턱 올렸다.

"베로니카가 장로 용이랑 정령왕을 소환했을 때는 이대로 다 죽는 줄 알았는데, 네 덕에 그 둘에게 죽은 사람은 없잖아."

마왕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둘을 카펠라는 잘 막아주었고, 베로니카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건 사과할 것이 아닌 칭찬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나 대신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려고 노력했겠구나."

"응…"

카펠라는 분명 보답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며 오랜 시간 노력해왔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도와주고 싶었던 사람을 돕고 지킬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보답받는 기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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