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탐욕의 마왕
* * *
"필리스 대수림을 지켜줘서 고맙다."
미호에게 몸이 산산조각이 났던 수호자는 어느새 재생되었다. 마기가 빠져나가 정신이 멀쩡해지자 가장 먼저 자신을 말려주었던 미호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뭘, 정령의 숲이 사라지면 세계에 어떤 영향이 갈지 모르니까 지킨 것뿐이다."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는 미호의 곁에 정령들이 몰려왔다. 다들 제정신을 차리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감사는 됐다.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정확하게 얘기해보거라. 하급 정령들에게 듣기는 했다만, 당사자가 아니라서 설명을 잘못하더군."
"원한다면 해주지."
아직 완전히 재생되지 않아 새끼 사슴의 모습인 수호자가 자리에 앉아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입에서 나온 말은 애런과 미호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침입자는… 마왕이었다."
"마왕이라고?"
"그래,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강대한 마기… 분명 마왕의 것이었다. 붉은 단발머리에 작은 뿔이 두 개 솟아있는 도깨비였다."
외견 설명을 들으니 침입자는 베로니카라는 확신이 들었다.
베로니카가 이상한 녀석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마왕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미호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건 애런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마왕이라는 존재가 눈앞에 있었는데도 마기를 못 느낀 것인지, 왜 마왕이 인간계에서 마탑주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필리스 대수림에서 죽일 수 없으니, 마기를 주입해 대수림을 파괴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 나를 굴복시키러 오겠다며 말이다."
"어이가 없네…"
"사실 그 뒤의 일은 나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말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 뿐이다."
"아, 괜찮다. 이미 엄청난 정보를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베로니카가 마왕… 그걸 안 것만으로도 이곳에 온 보람은 있었다.
"어둠의 정령이 나에게 이곳에 가보라고 했던 건,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나. 그리고 베로니카라는 마왕에게 당해서 굴복한 정령들이 내 몸에 봉인된 마왕의 존재를 느끼고 경계하는 것은 당연해."
애런은 마탑의 정상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마법사임에도 비정상적인 신체, 대마법사의 방어막을 쉽게 파괴하는 존재. 그것들은 마왕이라면 모두 설명이 되는 것들이었다.
"야, 너도 마왕이었잖아. 아는 거 없냐?"
애런은 가슴을 두드려 봉인되어있는 마왕을 불렀다.
[나도 모른다. 내가 아는 마왕 중에 그런 녀석은 없었다.]
"그럼 네가 죽은 뒤에 마왕이 된 녀석인가…"
비교적 최근에 마왕이 된 파이몬도 마계에서 자기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그러지 않고 인간계에 와있다. 그녀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애런,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
"응?"
"어차피 마탑으로 돌아가면 장본인을 만날 수 있지 않느냐.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
마왕에게 무언가를 물어본다는 것을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하는 미호. 애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계약으로 공유되고 있어서 알 수 있었다. 미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미호는 마왕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그래… 쉽지 않은 족속들이란 말이야."
"뭐,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대화를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법이지 않나? 거기다 베네쿠스에는 베로니카를 제외하더라도 나를 포함해 6명의 대마법사가 있다. 쉽게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미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다른 대마법사들의 실력은 모르지만, 카펠라가 있다는 것은 꽤 든든한 일이었다.
"그냥 네 여우 구슬을 돌려받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 크흠… 아니다."
"..."
애런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조금은 미호를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런 감정이 몽땅 사라져버렸다.
"나,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말고!"
눈빛만으로도 충분한데 감정까지 공유가 되어버리니, 미호는 더더욱 비참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쨌든 돌아가야지 뭐든지 시작할 수 있다."
"그건 그렇긴 한데."
"돌아갈 것이라면 이걸 받아라."
수호자는 애런과 미호에게 자신의 뿔을 뜯어서 넘겨주었다. 빛의 입자로 만들어진 금색 뿔은 딱딱하고,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기나 방어구, 장신구로 만들어서 몸에 지니고 다니면 정령들이 너희들을 적대할 일은 없을 거다."
수호자가 애런과 미호의 존재를 인정하는 증표였다. 이것만 있으면 마기를 경계하며 다가오지 않았던 정령과 계약을 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여기 있는 정령과 계약하기는 힘들 거다. 대수림 복구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니 말이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노력한 보람은 있었군."
애런이 내심 기뻐하는 것이 공유된 미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베네쿠스로 돌아가는 길에는 마차를 이용하지 않았다. 이제 애런의 몸이 다 나아서 직접 뛰어가는 편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음음… 이제 조금 편하군."
등 뒤에 업혀있는 미호가 중얼거렸다. 조금 자고 일어났더니 어느새 베네쿠스의 마탑이 보이고 있었다.
"애런, 어떡할 거냐? 베로니카가 마왕이라는 것을 다른 마탑주들에게 알리고 향할 것이냐?"
"카펠라한테는 오면서 얘기해놨어. 동문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더라."
"그러냐."
동문에 다다르자 카펠라가 짜증 난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애런을 노려보고 있었다.
"... 어째 화가 나보이지 않느냐?"
"그러게."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불편한 기색에 둘은 무언가라도 잘못한 것처럼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카펠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왜 화났는지 알겠어요?"
애런은 짐작 가는 것이 없어서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카펠라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이제 용사가 아닌 평범한 몸이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그런데 마기 때문에 정신을 잃은 것도 모자라서, 잘못하면 고깃덩어리가 될 뻔했다는데 화가 안 나겠어요?"
"그런데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잖아."
"그, 그냥 듣고 있자꾸나."
미호는 계속해서 카펠라의 심기를 건드리는 애런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냥 듣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왜 화를 돋우는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다.
"멀쩡하게는 무슨. 운이 좋았던 거잖아. 미호가 없었으면 죽은 목숨이었다고요. 알아?"
"그래, 내가 없었으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지! 수호자는 쫓아오는데, 정신을 잃은 애런… 헙."
오랜만에 한 활약을 얘기하려던 미호는 카펠라의 눈썹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고 손으로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는 자기 입을 막았다. 방금 자신이 했던 생각을 떠올리며 그냥 듣고 있기로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마왕인 베로니카를 만나러 가겠다고? 정신이 나가버린 거지 응? 걔가 너 노리고 있는 것 같다면서요?"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는 카펠라의 앞에 애런은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대체 뭘 믿고 베로니카를 만나겠다는 거야? 죽거나 납치를 당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 너 믿고 그런 거지 뭐."
"하아… 어쨌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는 해놓기는 했는데, 베로니카가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니까 긴장 풀지 마."
"알겠어."
베네쿠스의 방어막을 지나가자 평소와 다른 이질적인 느낌을 받은 미호가 귀를 쫑긋거리며 입을 열었다.
"카펠라,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을 사용하다니 꽤 고생했겠구나."
"이 정도가지고 뭘."
"뭐가 달라졌어?"
하지만 무엇이 달라졌는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애런은 둘에게 물었다.
"베네쿠스 전체에 마족을 약화하는 신성 마법을 걸어두었다. 아마 성녀인 도로시의 신성 마법 규모를 넓혀서 적용한 것이겠지."
"맞아."
카펠라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대답했다. 마계의 척박한 환경은 마왕을 토벌하러 온 인간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인간계에 온 마왕도 그 정도 불리함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해서 펼쳐둔 마법이었다.
"둘이 돌아오면서 방어막도 닫았어. 이제 베네쿠스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없어."
애런은 방금 들어왔던 방어막에 손을 갖다 대보았다. 분명 사람을 인식하고 열리던 틈새가 꾹 닫혀있었다.
이것으로 베로니카를 포함한 베네쿠스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도망칠 수 없다. 배수진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카펠라는 많은 준비를 해놓았고 마왕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평범한 주제에 마왕을 죽이려는 멍청이가 있어서, 여기서 하나라도 죽여주려고 하는 거야. 알겠어요?”
“카펠라, 너는 옛날부터 무덤덤하게 기특한 소리를 하는구나.”
애런은 피식 웃으면서 뚱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카펠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베로니카가 있는 마탑을 올려다보았다.
마왕.
전생의 애런은 어렵지 않게 마왕의 목을 베고 죽였다지만, 그건 규격 외의 강함을 가진 용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이라면 승산이 있을까.'
베네쿠스에 날아온 용을 격파할 때 사용했던 카펠라의 마법은 분명 마왕에게도 닿을 공격이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불안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감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걱정되느냐?"
애런의 감정을 공유받은 미호가 물었다.
"뭐, 그렇지. 카펠라가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마왕은 얕볼 수 없는 상대니까."
"그래, 그런데도 평범한 네가 마왕을 죽이겠다고 하니 카펠라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느냐?"
"웬일로 맞는 말을 한대?"
미호의 말에 카펠라가 고개를 홱 돌려서 뒤를 보며 말했다.
"어쨌든 걱정을 할 거면 자기 걱정이나 해. 괜히 나서다가 다치지 말고. 알겠어요?"
"알겠어."
….
곧 베로니카의 마탑에 도착했다. 역시 미호에게 원한이 있는 마법사들은 미호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카펠라가 앞장서고 있어서 나서는 자는 없었다.
띵.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마탑의 정상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알렸다. 이미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지만, 베로니카가 마왕이라는 것을 알기 전과 다르게 긴장감이 겉돌았다.
'마치 전생에 마왕성을 올라갔을 때 같네.'
하늘에 닿을 듯한 높은 탑. 그 정상에 기다리는 마왕. 그때랑 다른 점이 있다면, 애런은 마왕을 쓰러뜨릴 힘이 없다는 것과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기다려라."
정상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보이는 것은 석문을 가로막는 사자의 몸에 인간의 머리를 가진 동물, 스핑크스.
스핑크스는 얇게 뜬 눈으로 셋을 바라보았다.
"이곳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내가 하는 질문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주인, 베로니카가 결정한 방문자를 직접 만나는 규칙이다."
웅크리고 앉아있던 스핑크스가 일어났다. 평범한 사자의 몸집이 아닌 스핑크스는 마탑의 높은 천장에 닿을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뱀이 아닌 인간의 머리가 셋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대들에게 묻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나의 주인 베로니카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함인가?"
젊은 여자의 머리에서 어울리지 않는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카펠라가 대답했다.
"네 주인인 베로니카가 소환한 정령을 애런과 계약하게 한 뒤 죽일 거야. 그러니까 비켜."
카펠라가 대답을 해도 너무 솔직하게 대답한 것 때문에 둘을 지켜보고 있는 애런과 미호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스핑크스는 몇 초 동안 카펠라를 바라보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다. 들어가라."
전투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애런과 미호는 긴장을 하고 있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스핑크스는 순순히 길을 비켜주었다.
"무슨 속셈이지?"
소환수면서 주인인 베로니카를 지키려는 행동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애런이 물었다.
"내 질문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했기 때문에 비킨 것이다. 이것 이상으로는 설명해주지 못한다."
무언가 수상쩍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석문은 이미 열렸다. 이대로 있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으니 애런은 베로니카의 소환수가 가득한 방안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어떤 선물을 들고 왔지?"
새끼 용의 등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붉은 단발머리의 소녀, 베로니카가 방문자들을 보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베로니카가 마왕이라는 것을 안 지금 애런은 느낄 수 있었다.
방안을 가득 채운 한없이 불길한 기운을.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탐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