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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57화 (57/92)

〈 57화 〉 필리스 대수림

* * *

대마법사라고 떵떵거리기는 했지만, 마나 회복 기관인 여우 구슬이 없는 미호는 무능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마나를 다른 곳에서 받아오면 될 뿐이었다. 그럴 방법이 있기는 하나 애완동물 취급이나 다를 바가 없어서 하기 싫었던 것.

바로 계약이다.

정령들처럼 힘을 빌려주고 대등한 계약이 아닌, 소환수처럼 종속되어서 주인에게 힘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 이렇게 한다면 신체접촉으로 얻는 마나보다 많은 양을 받을 수 있다.

"대마법사인 내가 아래가 된다는 건 마음에 걸린다만…"

미호가 여우였을 때 애런이 대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애완동물… 이라도 지금이나 취급은 비슷할 것 같았다.

"뭐, 애런이라면 괜찮겠지."

미호는 기절해있는 애런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애런이 기절하면 안에 봉인되어 있는 마왕도 기절하는 것이냐?"

그 말에 애런은 손을 움찔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 깨어있다."

분명 애런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였지만, 톤도 다르고 말투도 달랐다.

"마왕이로군?"

"그래."

"뭐, 네놈도 애런이 죽으면 곤란할 테니 내 말을 듣고 따라주겠나?"

"몸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무리다. 말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 정도면 충분해."

미호는 손가락을 물어서 나온 피로 애런의 팔에 마법진을 그렸다. 그리고 애런의 얼굴에서 흘러나온 피로 자신의 팔에도 똑같이 마법진을 그렸다.

"피로 계약이라니, 아주 작정을 했군?"

"많은 것을 받으려면 많은 것을 주어야 하니 말이다."

계약은 거래니까 당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피로 맺는 계약은 그야말로 제 생명을 맡기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미호는 대마법사인 자신의 생명을 맡기고 그 대가로 마나를 얻어낼 것이었다. 애런의 몸에 그만큼의 마나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없다면 이후에 더 받아내면 될 뿐이었다.

"나는 2년 전 처음 네가 애런과 만날 때부터 보고 있었지만, 이런 계약을 나눌 만큼의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확실히 그런 사이는 아니지."

2년이라는 시간은 길다고 하면 긴 시간이지만, 생명을 맡길만한 사이가 될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그런 나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주었잖느냐."

마법사들에게 노려질 때, 베로니카에게 쫓길 때, 조금 전 폭발에 휘말릴 때도, 애런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미호를 우선시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만난 자신을 우선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나."

피로 만든 마법진에 미호가 마나를 흘려 넣자 계약의 시작을 알리는 붉은 빛이 나기 시작했다.

"굳이 계약 내용을 들을 필요는 있겠나?"

"없다."

"그럼 그냥 동의만 하면 된다."

"동의한다."

치이익… 피로 그려진 마법진에 불이 붙더니 조금의 고통과 함께 지울 수 없도록 피부에 새겨지면서 계약은 체결되었다. 미호는 팔에 새겨진 마법진으로부터 마나가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많이도 쌓아뒀군."

2년 동안 많이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아닌 모양이었다. 이때까지 마나를 쓰지 않고 쌓아두기만 했던 애런의 몸에 있던 마나들이 모두 미호의 몸으로 들어오며 9개의 꼬리가 꽃이 피듯 돋아났다.

어린아이로 보이던 몸도 성장해서 성인이 되어있고, 무엇보다 아까와는 같은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가 정령들이 넋을 놓고 지켜보게 만들었다.

"조금 전에 있던 꼬마가 맞는 거냐?"

"딱 봐도 똑같이 생겼지 않나."

"아니… 위압감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뭔가 다른 것 같은데."

"물러나 있어라. 도와준다고 했으니 폭주하는 수호자를 막아주마."

아직 멀쩡한 수림이 있는 방향으로 검붉은 불길을 이끌며 다가오는 수호자를 바라보았다.

대수림을 침입한 자를 쫓아내기 위한 거대한 금색 뿔은 나무를 꿰뚫어 파편이 붙어있었고, 마기에 침식당해 탁해진 눈동자는 지켜야 할 것과 위협이 될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워어어!!"

수호자는 순하게 생긴 사슴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흉포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고깃덩어리가 된 살집을 땅에 툭툭 떨어뜨리면서도 생명력을 공급받아 다시 재생되고 썩어들어갔다.

죽지 못한 채 끝없이 몰려오는 고통에 수호자는 몸부림을 치더니, 자신이 지켜야 할 수림을 파괴하기 위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수호자가 이곳을 노리기 시작했어!"

"어, 어떡하지?"

불길과는 다르게 자신들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재앙에 하급 정령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거기 쓰러져있는 애런이나 잘 지켜주고 있거라."

미호는 애런을 정령들이 있는 쪽으로 밀어주고, 영창을 시작했다.

"Nea newo oloc lua."

허공에 투명한 방어막이 생기더니 순식간에 펼쳐지며 불길이 번진 곳과 멀쩡한 수림을 나누었다. 쿠웅! 수호자는 방어막이 생기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뿔을 들이박았다.

하지만 대마법사가 만들어낸 방어막은 그 정도로 부서질 만큼 연약하지 않았다.

"그으으으!!"

방어막에 뿔이 미끄러지며 고개를 휙 돌린 수호자는 미호를 바라보고 입을 쩍 벌렸다. 몸 안에서 넘치는 마기와 허공에 있는 마나가 입안에 모이며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화염이 생겨났다.

"브레스를 사용하는 사슴은 오랜 세월 살아온 나도 처음 보는군."

미호의 마법에 대수림의 결계 안에 먹구름이 끼더니, 쏴아아­. 눈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소나기가 쏟아졌다.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미호의 머리 위에서 뭉쳐지더니 얇은 창을 이루었다.

"그어어어!!"

수호자의 입안에서 흘러넘칠 것 같던 화염이 결국 터져 나왔다. 주변의 물방울들을 순식간에 증발시키는 엄청난 열기의 불길이었다. 그에 딱 맞게 빗방울이 압축되어 만들어진 창도 완성되었고 물방울을 튀기며 쏘아졌다.

푸쉬이이! 화염과 창이 맞부딪치며 대수림을 가득 채울 수증기가 생겨났다.

그 때문에 둘의 시야는 가려지며 잠깐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Nea newo oloc lua."

그러나 미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수증기가 걷히자 잇따른 마법에 의해 생긴 사각형의 방어막이 수호자의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수호자는 시야가 가려졌던 탓에 방어막의 존재를 뒤늦게 깨달았지만, 상황은 이미 늦었다.

"끝없이 생명력을 받아서 쓰러지지 않는다면, 그 공급을 끊으면 될 뿐이다."

마지막 영창이 끝나고 유일하게 뚫려있던 수호자의 윗부분도 방어막으로 덮였다.

미호의 방어막이 필리스 대수림에 펼쳐진 결계와 같은 역할을 했다. 안과 밖을 나누는 결계 역할을 하며 숲에서 생명력이 수호자에게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그아아아!"

쿵! 쿵! 수호자는 자신에게 처한 상황을 눈치채고 빠져나가기 위해서 몇 번이고 방어막에 몸을 들이박았다.

그럴 때마다 마기에 침식당해 썩어가는 살점이 우수수 떨어졌고,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해 재생이 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정령의 숲을 지켜왔던 수호자가 서서히 죽어간다. 살이 떨어지고 점점 새하얀 뼈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수호자는 멈추지 않았다.

"... 죽지 못하고 끝없이 고통받는 것은 괴롭겠지. 네 모습을 보니 앙겔로크라티카에 남은 도로시의 언니가 떠오르는구나."

그녀 역시도 어떠한 괴로운 고문을 받더라도 죽지 못하고 끝없이 고통을 받겠지.

쿵… 쿵…

소리는 점점 줄어들었고 들리는 주기도 길어졌다.

쿵!

마지막으로 뼈밖에 남지 않은 수호자가 땅에 쓰러지면서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Hyeevi suwo."

미호가 주먹을 꽉 쥐자 방어막들은 남은 수호자의 뼈를 완전히 짓눌러 없애버리고 같이 소멸하였다.

덤으로 미호는 필리스 대수림 곳곳에 퍼져있는 마기에 침식당한 정령들을 해치우고 애런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저, 정령들이 몽땅 죽었어…"

자신의 동료가 대량으로 학살당하는 것을 본 하급 정령이 허탈하게 말했다.

"뭐라는 것이냐.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생겨날 것이다. 참고로 말해두자면 육체에 있는 마기를 빼내기 위해서 부순 것이니 오해하지는 말거라."

"그런거야…?"

"그래, 그런 거다."

정령왕과 버금가는 수호자, 마기에 정신을 잃은 고위 정령과 잇따른 전투에 마나를 많이 소모한 미호는 다시 어린 모습으로 돌아왔다.

9개였던 꼬리도 이제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사라졌다.

"애런의 상태는 어떻지?"

"아… 이상하리만큼 회복이 빠르다. 이것도 마법인 건가?"

정령들은 멀쩡해진 애런의 몸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법이 아니다. 계약으로 내 생명을 맡겼으니, 그것으로 어느 정도 회복을 한 것이겠지. 하여간, 이렇게라도 죽지 않게 하지 않는다면 금방 죽을 것 같은 녀석이로고."

미호는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애런의 자리를 잡고 앉아서 옆에서 감탄을 하고 있는 정령들에게 말했다.

"뭐,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나도 피곤한 것 같네. 조금 잘테니까 옆에서 춥지 않도록 불이나 비추고 있어 줘라."

"우, 우리가?"

"그래, 너희가 아니면 누가 한단 말이냐? 집이 홀라당 불타 사라지는 것을 막아줬으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어, 음…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 같네."

미호는 마나 회복을 위해 애런의 손만 잡고 자려고 하며 누웠다.

"... 땅이 딱딱하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애런의 팔을 쭉 펴서 그 위에 머리를 올리고 몸을 웅크리고 자기 시작했다.

정령들이 춥지 않도록 불을 지피고 있자 곧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

"..."

애런은 조용히 눈을 떴다. 베네쿠스에 오고 나서부터 자고 일어나더라도 항상 몸이 피곤했는데, 지금은 몸이 가볍게만 느껴졌다.

왼팔을 짓누르며 자고 있는 미호의 머리만 치운다면 말이다.

"어떻게 된거지?"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려본다. 분명 필리스 대수림의 수호자가 둘을 쫓아오며 긴박한 상황이었을 텐데…

왜 옆에서 정령들이 춥지 않도록 불을 조절하고, 시원한 바람을 불어주는 평화로운 상황이 된 걸까. 그러다가 팔에 새겨진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뭐야."

"으음…"

잠꼬대를 하며 애런의 품속으로 파고든 미호의 팔에도 똑같은 마법진이 보였다.

"이게 뭔데."

[계약이다.]

애런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자,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마왕이 말했다.

"계약?"

[그래, 네 옆에 있는 구미호가 기절한 너와 계약을 해서 대수림의 수호자를 쓰러뜨렸다.]

"평소에 그렇게 무능하기만 하던 미호가 정령왕에 버금가는 수호자를 쓰러뜨렸다고?"

애런은 믿지 못해서 마왕에게 물었다.

"나,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냐…"

마왕과 얘기를 하느라 몸을 조금 들썩였더니, 미호가 눈을 떴다.

"아, 일어났네."

"계약 때문이다."

"계약?"

"마왕이 너 대신 계약을 해서 모르겠지만, 너와 나는 피로 계약을 맺었다."

애런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눈만 깜빡거렸다.

"... 그냥 많은 것을 공유하게 되었단 것만 알면 된다. 나는 네게 생명을 맡겼고, 너는 그 대가로 마나나 다른 것들을 나와 공유하겠지."

"마나나 다른 것?"

"예를 들자면… 감정 같은 것이 있겠군. 조금 전 네가 놀란 감정에 나도 놀라서 일어난 것이다."

미호가 계약의 내용에 감정을 공유하는 항목을 넣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혹시라도… 만약의 일이지만, 자신이 애런에게 이 이상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그때는 분명 카펠라나 도로시에게 목숨을 노려지겠지. 하지만 감정을 공유함으로써 살아보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공유받은 애런이 자신을 지켜주길 바라며. 적어도 애런은 그 둘에게 죽지는 않을 테니까.

'뭐, 다른 이유로는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그리고 오늘도 미호의 심장은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듯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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