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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56화 (56/92)

〈 56화 〉 필리스 대수림

* * *

"그러니까 베로니카가 몸 안에 마왕이 봉인되어있는 것을 알면서도 보내줬단 말이야?"

애런이 들고 있는 수정 구슬에서 카펠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일라와만 연락이 가능했던 수정 구슬이었지만, 카펠라가 새로 하나를 더 만들면서 셋이서 연락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응."

미호를 쫓던 베로니카는 애런의 마기를 느끼고 마왕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런데도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나중에 어떻게 될지가 궁금하다며 그냥 보내주었다.

덤으로 이걸 알만한 상황을 마련해준 미호도 보내준다고 했다.

"뭐, 무사하면 됐어요. 그런데 몸도 안 좋은데 혼자서 필리스 대수림으로 가도 괜찮겠어?"

"나도 있지 않느냐!"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를 듣고 있던 미호가 끼어들었다.

"여우 구슬이 없는 너는 있으나 마나 잖아. 어쨌든 용사 시절에는 정령왕의 허락하에 들어가서 모르겠지만, 그곳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불친절한 곳이야."

"괜찮아. 정령왕은 아니지만, 정령에게 증표는 받았어."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카펠라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이 돼서 하는 소리라고요. 아직도 자기가 용사인 줄 아나 본데, 조금 자신을 되돌아보는 게 어때? 이제는 평범하다 못해 마법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약해빠진 인간이라고요?"

"알겠어 알겠어."

"하아…"

전생에는 입장이 반대여서 몰랐는데, 지금이라면 용사였던 애런이 자신에게 왜 그렇게 딱밤을 때렸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걱정을 하는데도 긴장하기는커녕 저렇게 건성으로 대답을 하니 짜증이 날 것 같았다.

'내 속도 모르고…'

지금 하는 일을 다 때려치우고 애런에게 갈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하지는 않았다.

전생의 애런이 미숙했던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믿어주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미숙하더라도 성장해서 보완할 테니까.

"알겠으면 조심해서 갔다 와요."

"그래."

카펠라가 걱정하지 않도록 연락을 끝내고 수정 구슬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덜컹. 애런이 필리스 대수림까지 가기 위해서 고용한 마차가 돌멩이를 밟고 크게 흔들렸다.

"느앗!"

몸집이 작은 미호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공중에 붕 떠올랐다. 그 상태로 바닥에 쓰러질 뻔했으나 애런이 자연스럽게 팔로 감싸주었다.

"고, 고맙다."

"또 이럴 수도 있으니까 그냥 이렇게 있자."

애런은 미호의 얇은 허리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음음… 그렇지. 또 날아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미호는 잠시 눈을 감고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마탑주 베로니카에게 자신을 데리고 도망치겠다고 한 것. 그렇게 한다면 제 목숨도 보장할 수 없을 텐데, 민폐만 끼치고 다녔던 자신을 감싸주었다.

'아무리 착해도 그렇지. 이건 멍청이다.'

베네쿠스의 마법사들에게 습격을 받을 때도 나를 내버려 뒀으면 공격당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런데도 버리지 않겠다고 했다.

무능하고 재수 없는 자를 위해 목숨까지 걸어가며 챙겨주는데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일까. 이제까지는 애라고 봐왔다만 조금은 이성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게 해오던 신체접촉에 가슴이 뛰는 것 같았다.

'에휴… 이 이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카펠라랑 도로시, 그 고얀 년들이 노리고 있는데 내가 끼어들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추워?"

"응?"

"좀 더 붙어. 바람이 불어서 조금 쌀쌀하기는 하네."

그렇게 말하면서 제 옆구리 쪽에 미호를 딱 붙였다. 미호는 귀를 몇 번 쫑긋거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망할.'

평소라면 살아있다는 것을 자각시켜주는 두근거리는 심장이 지금만큼은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수고하셨어요."

애런은 필리스 대수림까지 오랜 시간 마차를 이끌어준 마부에게 금화 10닢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마부는 몇 번이고 애런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왔던 길을 돌아갔다.

"흠… 보이기는 하는군."

대수림과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렸는데, 그것에는 이유가 있다.

필리스 대수림은 보이지만 찾아갈 수 없는 곳이다. 그건 특별한 결계때문인데, 공간 자체에 간섭하는 결계는 증표가 없는 자를 대수림 건너편으로 보내버린다.

만약 결계를 마법으로 무시하고 들어간다고 한다면 그건 수호자에게 자신의 목숨을 노려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가자."

하지만 애런에게는 증표가 있었다. 들어갈 자격이 있는 자가 다가오자 결계가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화아악­. 결계가 열리자 안에서 뜨거운 열기와 새카만 연기가 빠져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거대한 나무가 우거져서 빛이 들지 않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던 필리스 대수림이 불타고 있었다.

불이 붙은 나무는 하늘을 가렸던 나뭇잎들이 모두 타서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다.

정령들의 은은한 빛으로 가득했던 수림은 검붉은 불길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대수림을 수호해야 할 사슴의 형상을 한 수호자는 대수림를 파괴하고 있었다.

"왜 정령들이 대수림을 불태우고 있는 거지?"

"애런, 저기를 봐라."

미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애런이 아는 대수림의 모습이 아직 남은 곳이 보였다.

은은한 빛을 내는 정령들은 불길이 나무를 불태우지 못하도록 제 몸을 희생해서 막고 있었다.

"저 녀석들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겠느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수림을 불태우던 정령들의 몸체가 홱 돌더니 애런과 미호를 향했다.

"마기다."

"마기이…"

같은 단어를 계속 반복해서 말하는 정령들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보였다.

은은한 빛을 내며 맑아야할 정령은 검은빛으로 탁해져 있었고, 형태를 유지하지 못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애런, 느껴지느냐."

"어, 마기 얘기하는 거지?"

왜 마족이 아닌 정령한테서 마기가 느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마기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베로니카의 마탑에서 정령들이 다가오지 않았던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생각하며 애런은 몸에 마기를 둘렀다.

"일단 정상적으로 보이는 정령들이 있는 곳까지 도망치자."

"어, 응."

이제는 미호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콰아아­!! 자줏빛 번개와 검붉은 불길이 걸음을 멈추려고 하지만 마기로 신체 능력을 향상한 애런은 자연스럽게 공격을 피해냈다.

닿을 듯 말 듯 공격이 지나간다. 시야가 크게 흔들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으으…"

과격한 움직임에 멀미가 날 것만 같았다. 미호는 얼굴을 찡그리고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짐처럼 옮겨지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때까지는 애런이 배려해서 멀미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미호는 고개를 들어서 애런을 올려다보았다. 마기에 의한 고통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얼굴에는 식은땀이 비가 오듯 흐르고 있었다.

지금 애런의 몸 상태로는 배려를 할 여유가 없는 것이었다. 공격을 피하느라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애런, 괜찮느냐?"

"괜찮… 지는 않은 것 같네. 카펠라 말을 들을 걸 그랬나."

생각보다 몸이 버텨주지를 못한다. 너무나도 약한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멍청이가 무리하지 말라고 했건만. 이대로 가다가는 고깃덩어리가 되고 말 거다. 마기는 내가 거둬들일 테니 일단 쉴 수 있는 곳으로 가라.]

몸이 낫지 않은 상태로 무리를 하는 애런을 보고 있던 마왕이 이 이상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말렸다.

"저기 갈 때까지만 기다려."

곧 정상적인 정령들이 있는 곳이다. 그곳이 안전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정신을 잃은 정령들보다는 말이 통하기를 바랐다.

퍼엉! 눈앞에서 피할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 주홍빛 불꽃이 몸을 덮쳐왔지만 뜨겁지는 않았다. 애런이 마기로 미호를 감쌌기 때문이었다.

"애런, 괜…"

물어보려고 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봐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폭발에 튄 돌멩이들이 얼굴에 크고 작은 상처를 남겨놨고, 불길은 피부를 그을려놨다. 자신은 마기로 보호하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에 휘말린 것이었다.

"저 정령들은 말이 통했으면 좋겠는데…"

애런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기다려달라고 했건만 마왕은 이미 마기를 거둬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는지,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힘이 쭉 빠졌다.

"마기다."

"오지 마!"

하지만 정상적인 정령들도 둘을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무 밑에 몸을 숨기고 있는 하급 정령들은 곧 공격을 할 것처럼 몸을 부풀리고 위협을 했다.

불길이 아직 번지지 않은 정상적인 수림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정령들과 대화를 나눌 힘조차 남지 않은 것을 느꼈다.

베네쿠스에 전이해 왔을 무렵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조금 못 미덥기는 하지만 이제 혼자서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미호에게 의지해야만 할 것 같았다.

"야… 미호, 뒷일은 부탁한다."

"응? 그게 무슨 소리냐."

그 말을 하고 애런은 풀썩 쓰러졌다.

"애런, 정신 차리거라!"

어깨를 두드려보지만 이미 기절했는지 반응이 없었다.

"이럴 때 정신을 잃으면 어쩌라는 것이냐…"

뒤에는 마기에 정신을 잃은 정령, 앞에는 마기를 경계하는 정령. 그리고 여우 구슬이 없어 무능한 미호.

"일단 내 말을 들어보거라."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거짓말."

"이전에 온 녀석도 그랬어."

"그 말을 믿었던 아이들은 전부 마기에 오염당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정령숲의 수호자가 저렇게 된 것인지 말해줄 수는 있겠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미호의 분위기가 남달랐기에 정령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 정도는 말해줄 수 있어. 대신 거기서 움직이지 마. 허튼짓을 하려는 것 같으면 바로 마법을 날릴 거니까."

"그러도록 하지."

정신이 멀쩡한 정령들은 몸을 떨며 전에 왔던 침입자를 떠올렸다.

웬만한 마법사들로는 간섭하기도 힘든 결계를 맨손으로 부수고 들어온 자는 불길한 마기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어차피 결계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막아줄 것 아니냐는 것이 이유였고 또 자신의 욕망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것이 되어라."

강한 힘을 원하던 그 자는 정령들을 하나둘 굴복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자를 막아서기 위해서 수호자가 나섰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필리스 대수림을 지켜왔던 정령왕과 버금가는 강함을 가진 정령마저도 그자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대수림에서 끝없이 생명력을 공급받는 수호자는 몇 번이고 일어나서 다시 싸웠다. 공격으로 수호자가 죽지 않는 것을 파악한 침입자는 굴복시키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자기 소유가 되지 않는 것들은 필요 없다며 수호자와 그와 함께 항전했던 정령들을 마기로 오염시켰다.

그 이후 정신을 잃은 정령들은 자신들의 집인 대수림을 계속해서 파괴하고 있었다.

그런 행위를 막으려고 시도는 해봤으나, 하급 정령에 불과한 자신들로서는 수호자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사정은 알겠다."

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입자가 누구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베로니카, 그년을 말하는 거겠지. 이상하리만큼 소환수가 늘었다고 생각했더니 이런 과격한 방법을 사용한 것이었나.'

"다 들었으면 돌아가."

정령들은 번져오는 불길을 막으며 말했다.

"아니, 돌아가지는 않는다."

정령의 고향과 마찬가지인 대수림이 파괴된다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니, 위험하기는 하나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2년 동안 같이 다녔더니 정이 들었나."

여동생을 위해서 마왕을 죽이겠다, 성녀를 구하기 위해 제1 사도와 맞서겠다고 노력하는 애런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에 도움이 될 정령이 모두 사라져버려도 곤란하니 이대로 보고만 있기는 싫었다.

"대마법사인 내가 너희를 도와주도록 하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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