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베로니카
* * *
베로니카는 카펠라가 써준 종이에 적힌 애런에 대한 것을 천천히 소리 내 읽었다.
"신성 마법은 사용하지 못하고 마나는 느끼지 못한 다라… 희귀하네. 수집하고 싶어."
"아니요, 그건 사양할게요."
베로니카의 검붉은 눈동자가 애런을 집어삼켰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에 애런은 손사래를 쳤다.
"카펠라의 부탁대로 정령을 소개해주는 건 해줄 수 있어. 대신, 계약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게 달렸어."
방안에 파문이 일더니 반딧불이처럼 형형색색의 빛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벨라도 정령사로서는 뛰어났지만, 지금 눈앞의 베로니카만큼은 아니었다.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정령의 질도 다르다.
이 많은 빛들이 고위 정령과 필적할만한 수준의 정령들이었다.
고위 정령은 쉽게 계약할 수 있는 정령이 아니다. 전생의 애런과 같은 전장에 섰던 정령사들도 한 마리 이상의 고위 정령과 계약을 하지 못했었다.
이 정도라면 굳이 미호의 자리를 빼앗지 않더라도 마탑주가 되는 것이 가능했을 것 같았다.
"대체 이만한 정령들을 어떻게 모은 것이냐."
놀란 것은 애런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예상을 초월한 베로니카의 성장세에 미호도 입을 벌리고 놀랐다.
"글쎄? 네가 나한테 마법에 대해서 알려준다면 나도 알려줄게."
"쯧… 내 제자들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것 같군."
"미호보다는 내가 나은 게 아닐까? 나는 적어도 알려줄 생각은 있는데 말이야."
"으음… 나도 알려줄 생각은 있었다."
미호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계약을 하는 방법도 알려줘야 하나?"
"아니요,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이미 전생에 정령왕과 계약을 해봤던 애런은 자연스럽게 정령과 교감을 하기 위해서 말을 걸었다.
"안녕?"
원래라면 먼저 말을 걸어오는 정령을 기다리는 것이 계약을 하기도 쉽고 감응도도 좋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널리고 널린 정령 중에 자신과 대화를 할 생각이 있는 정령들을 먼저 골라내고, 그중에서 잘 따를 것 같은 정령에게 계약을 제안한다.
거절당하더라도 상관없다. 다른 녀석에게 다시 제안하면 되니까.
"..."
하지만 이렇게 많은 정령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만했다.
애런에게 흥미를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처음 보는데도 적개심을 품고 살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 때문인 건가.]
조용히 있던 마왕이 말했다.
[정령자체가 영혼으로 이루어진지라 혼에 대해서 민감한 모양이군.]
'이 쓸모없는… 미호 같은 놈아.'
애런은 속으로 심한 욕을 날리면서 뿌득 이를 갈았다.
이러다가 정령 마법마저도 사용하지 못한다면 강해질 방법은 정말 흑마법 밖에 남지 않는다. 그런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흑마법은 사용법에 따라서는 위력적이기는 하나,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마법이다.
죽은 자의 혼을 돌아가지 못하게 가두거나, 몸만을 살려내 병사로 사용한다거나, 어쨌든 정상적인 마법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정령 마법도 배우지 못하나 하고 포기하려는 찰나, 한 정령이 애런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주변의 빛을 흡수하고 검은 빛을 내고 있는 작은 어둠의 정령이었다.
"안녕. 다른 친구들은 나를 피하는데 너는 피하지 않는구나?"
"저는 정령이 되기 전에 마족이었나 봐요. 다른 아이들은 꺼리는 마기를 느껴도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아요."
정령은 베로니카의 눈치를 살피더니 미호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조용하게 말했다.
"계약하기를 원하는 거죠?"
"응, 그렇지."
"좋아요.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계약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계약을 바라신다면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주세요."
애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의 숲인 필리스 대수림으로 가주세요. 그곳에 가셔서 저희 정령들에게 생긴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저희가 왜 이러는지 알고 와주세요. 그 정도로 노력하신다면 정령들도 마기를 두른 당신에 대한 경계를 조금이나마 풀 거에요."
"너희들에게 생긴 문제?"
"지금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못해요. 너무 오래 얘기를 하고 있으면 베로니카에게 의심을 받으니 여기까지만 할게요."
어둠의 정령은 그렇게 말하고 애런에게 한 줌의 빛을 건네주고 다른 정령들 사이로 날아갔다.
'필리스 대수림이라.'
지금의 애런은 그곳에 가본 적은 없지만, 전생에는 정령왕과 계약을 하기 위해서 들른 적이 있기 때문에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가 우거져 햇빛이 들지 않는 필리스 대수림은 정령의 숲이라 불릴 만큼 은은한 빛을 내는 정령들이 가득해서 어둡지 않다.
하지만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벌목을 하러 오는 사람이나, 정령과 계약을 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오는 정령사를 막기 위해 강한 수호자가 존재한다.
수호자는 정령왕에 버금갈 정도의 강한 정령으로 대수림에서 생명력을 끝없이 공급받아서 쓰러뜨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수호자와 부딪치지 않고 필리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정령의 증표가 필요한데, 방금 어둠의 정령이 전해준 빛이 그 증표였다.
"내 여우 구슬을 돌려다오!"
"싫어. 이런 귀한 걸 언제 또 구한다고 돌려달라는 거야."
카펠라의 손님이라 자신을 해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미호는 겁먹은 모습 없이 베로니카에게 떽떽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애런의 곁에 정령이 없는 것을 흘려보고 말했다.
"계약은 실패한 모양이네."
"네, 지금은 말이죠. 나중에 한 번 더 시도해봐도 될까요?"
"선물을 가져다준다면."
"알겠어요. 미호, 이제 돌아가자."
애런은 꼬리를 홱홱 휘두르며 떼를 쓰고 있는 미호를 붙잡아 들었다.
"나는 아직 내 여우 구슬을 돌려받지 못했는데…"
"그런 걸 순순히 돌려줄 리가 없잖아."
"네 볼일을 다 봤다고 나까지…! 나는 아직… 아직 내 것을 돌려받지 못했단 말이다."
"아, 미호."
베로니카는 무언가 생각난 듯 애런의 손에 끌려가고 있는 미호를 불렀다.
"왜 그러느냐. 돌려줄 생각이 든 것이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애런은 내게 용의 심장을 선물로 줬다지만, 너는 나에게 준 게 없잖아? 그러니까 선물 달라고 부른 거야."
"뭐… 용의 마나를 더 효율적으로 흡수하는 방법을 알려줬지 않나."
"그것까지 포함해서 애런의 선물. 네 선물은 아직 못 받았어."
이게 무슨 억지란 말인가. 왜 내 지식이 녹아든 애런의 선물인데 그걸 따로 계산한다는 건지… 미호는 기가 찰 뿐이었다.
"설마 선물도 안 주고 이대로 가려는 건 아니지?"
베로니카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두들겨 맞기 싫으면 자신을 만난 대가를 내놓으라는 경고였다.
미호는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식은땀을 흘렸다.
"없다면 너 자신을 선물로 줘도 괜찮아. 네 깊은 지식을 전수해주겠다고 하면 애완동물처럼 길러줄 수도 있어."
"베로니카, 이 자식 일부러 늦게 말한 것이냐…"
자신의 제자였던 자에게 당한 것도 억울한데, 애완동물 취급을 받는다? 그럴 바에는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이 나았다.
이미 가루가 되어버린 자존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치욕은 참을 수 없다.
"..."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애런은 미호가 꽉 쥐고 있는 주먹을 펼쳤다.
"애런?"
그리고 미호를 지켜주던 카펠라의 증명서를 베로니카에게 건네주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이건 나한테 불필요한 건데?"
"대신 이게 없다면 미호는 카펠라의 손님이 아니게 되니까,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겠죠."
"애, 애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게 없다면 마법사들에게 습격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베로니카에게 바로 붙잡힐 것이다."
미호의 말은 옳았다. 지금 베로니카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것도 전부 이 증명서 덕인데, 이걸 준다는 소리는 그냥 자신을 데려 가달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면 너를 순순히 갖다 바칠거야?"
베로니카는 선물을 받은 보답으로 둘을 만나준 것이었다. 순서가 바뀌기는 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미호가 불리한 입장임은 틀림없었다.
"그건 아니다만…"
"좋아."
애런의 제안을 베로니카가 받아들였다.
"여기서 미호를 데리고 도망칠 자신이 있으니까 이런 제안을 한 것이겠지. 도리는 지키는 녀석인가 봐."
"네, 뭐 그렇죠. 베로니카 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도망치냐, 안 지키고 도망치냐 차이는 크니까요."
"그래, 뭐… 재주껏 도망쳐. 10초 세고 출발해줄게. 10."
애런은 발에 마기를 집중시키고 미호를 옆구리에 끼웠다.
"9."
쾅! 지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히 높은 마탑이지만, 애런은 망설이지 않고 뛰어내렸다.
"8."
"흐와아아아!"
바람에 눈을 뜨기도 힘들다. 어느새 마탑의 허리 부근까지 내려왔으며, 낮게 깔린 구름을 통과했다.
쿠우… 그 거대하던 마탑이 잠깐 미세하게 흔들렸다.
"베로니카 녀석, 제대로 10초 세고 출발한 것 맞냐?"
아직 지상까지 내려가기에는 시간이 남았는데, 베로니카는 벌써 구름을 뚫고 애런을 쫓아왔다.
"아직도 거기 있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베로니카가 발을 차자 파문이 일면서 더욱더 가속했다.
"곧 따라잡힌다?"
그녀는 사냥을 하듯이 히죽 웃으면서 애런을 몰았다. 그리고 어느새 애런의 옆에 나란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베로니카가 주먹을 뻗기 위해서 팔을 뒤로 당겼다. 그냥 때릴 준비를 했을 뿐인데 불길함에 애런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건 맞으면 안 된다!"
대마법사가 펼쳐놓은 방어막도 부수는 주먹이다. 저런 걸 맞았다가는 애런의 몸에 구멍이 생길 것을 아는 미호가 다급하게 말했다.
"애런, 방어는 맡겨라!"
미호의 꼬리 하나가 사라졌다. 영창과 함께 에런과 베로니카 사이에 투명한 방어막이 생겼다.
투웅!!
방어막과 함께 공간이 떨렸다. 모든 충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는지 떨어지던 애런의 몸이 직각으로 꺾여 날아갔다.
"크윽…!"
안 그래도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는데, 이 충격은 버텨내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여유는 없다. 애런은 이를 꽉 물고 착륙할 준비를 하였다.
"Hyeevi suwo."
투욱. 그 높은 마탑에서 빠른 속도로 떨어졌는데도 평범하게 걸을 때와 다름없는 소리였다. 그것이 미호의 마법덕임을 깨닫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제 꼬리가 하나 남았네."
"허… 어떻게."
왜 베로니카가 먼저 지상에 내려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애런은 대마법사답지 않은 신체 능력을 가진 베로니카를 보자마자 베네쿠스의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미호, 분명 베로니카는 소환사라고 하지 않았어?"
"그래 소환사다."
"근데 저 신체 능력은 뭐야?"
"나도 궁금하다!"
잡담을 할 시간도 없었다. 베로니카는 거리를 벌려도 귀신같이 뒤를 쫓아왔다.
"그거 알아?"
쿠웅!
베로니카가 한 걸음 디딜때 마다 땅에 깊은 발자국이 남았다.
"나는 내 소환수들이랑 동등하게 계약을 하지 않았어."
어느새 도약한 베로니카는 애런의 머리 위에서 주먹을 당기고 있었다.
"그저 힘으로 굴복시켰을 뿐이지."
미호가 급하게 펼친 방어막을 뚫고 베로니카의 주먹이 마기를 감은 애런의 등을 가격했다.
방어막이 깨지면서 죽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애런의 몸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베로니카가 애런의 등을 가격하기 전에 주먹에서 힘을 뺀 탓이었다.
"애런, 괜찮느냐?"
그 사실을 모르는 미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어봤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꼬리 하나도 사라졌다.
그만큼 온 힘을 쏟아부어 펼친 방어막이었는데도 힘없이 깨져버렸다. 충격은 줄었겠지만, 몸이 성치 않은 애런에게는 치명타로 작용할 것으로 생각해 걱정이 되었다.
"괜찮아."
애런은 앞으로 고꾸라져 넘어졌을 뿐, 몸에 구멍이 생기거나, 뼈가 부러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왜 때리기 전에 힘을 빼신 거죠?"
베로니카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네 마기, 마왕의 것이잖아? 몸 안에 마왕이 있는 인간을 죽이기에는 아깝지 않나. 수집을 해야지."
세상 모든 것을 수집하는 그녀에게 애런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