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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54화 (54/92)

〈 54화 〉 베로니카

* * *

광범위했던 카펠라의 마법에 그 튼튼하던 용의 비늘도 너덜너덜해져 쓸모가 없어 보였다.

미호는 쓸모도 없는 비늘을 벗겨내려 자신의 몸집만 한 비늘에 두 손으로 매달려서 낑낑대고 있지만, 작은 어린아이의 체중으로 벗겨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런은 비늘에 매달려 쓸데없이 힘을 빼고 있는 미호를 한 손으로 잡아 땅에 내려놓았다.

“그런다고 떨어지겠냐.”

“아니… 나는 조금이나마 도와주려고 한 것인데…”

최근에 너무 미움을 받는 것 같아서 이쁨받으려고 했던 노력이 무시당하였다.

자기 나름 불만을 표시하려고 꼬리를 홱홱 휘둘렀더니, 실수로 도로시를 치고 말았다. 도로시의 작은 한숨에 미호는 몸을 움찔거렸다.

“미호 님, 그냥 가만히 있으세요.”

“알겠다…”

미호는 이제 자기감정마저도 표출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미웠다.

“비늘은 못 쓰겠고 피만 빼가야겠는데.”

“아, 피를 빼낼 거라면 심장을 뽑거라.”

애런이 검을 뽑자 미호가 호다닥 뛰어와서 말리면서 말했다. 또 이상한 소리를 하나 싶어서 들은척도 하지 않으니.

“무시하지 말거라… 용의 피는 몸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점점 마나를 잃는다. 그러니 심장째로 옮겨야지 제대로 마나를 정제할 수 있단 말이다.”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보는데.”

“정말이다! 대체 너희들에게 나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냐… 나도 이래 보여도 카펠라랑 동급의 대마법사…”

“알겠어.”

미호의 쓰잘데기 없는 소리가 시작되었기에, 애런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호의 입을 막았다.

다른 마법사들은 어떻게 하나 싶어서 둘러봤더니 미호의 말대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법을 한점에 쏟아부어 구멍을 뚫고 흘러나오는 피를 병에 담고 있었다.

애런도 전생에 용의 피를 저렇게 뺏었고 정석으로 알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미호의 말대로 해보기로 했다.

“뭐, 이상하면 미호를 선물로 주면 되니까.”

“안 된다…! 내가 똑바로 심장을 빼내도록 도와주마. 여기를 베어라. 보이느냐?”

혹여 용의 심장을 베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미호는 애런에게 벨 곳을 손으로 짚으며 알려주었다. 애런은 피식 웃고는 장난스레 검을 푹 꽂아 넣어 시계방향으로 베었다.

“으아아아아!! 애런, 네 이놈!! 그렇게 막 꽂아 넣었다가 심장에 상처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러느냐?!”

“걱정하지 마. 제대로 베었으니까.”

주먹을 붕붕 휘두르는 미호의 옆으로 용의 피부가 툭 떨어졌다.

심장을 둘러싼 뼈를 조심스럽게 부러뜨려 치우자, 성인 남성 2명 정도 크기의 거대한 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 큰 거 아니야?”

애런이 심장을 툭툭 건드려보자 안에 든 피가 출렁거렸다. 도로시도 궁금했는지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안을 들여다봤다.

“괜찮다. 마법으로 옮기면 되니까.”

미호가 영창을 하고 심장에 손을 갖다 대자 크기가 조금씩 작아지더니,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무게도 가볍게 만들었으니 쉽게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미호는 애런에게 작아진 용의 심장을 쥐여주고, 반대편 손을 잡았다. 남은 한 손으로는 카펠라가 준 증명서를 보이도록 들었다.

“마나 회복을 위한 것이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라. 도로시…”

“노려보는 거 아니에요. 그냥 원래 이렇게 눈을 뜨는거예요.”

날이 갈수록 자신을 쳐다보는 도로시의 시선이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이대로는 무방비하게 자고 있을 때 쥐도 새도 모르게 소멸할지 모르겠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유일하게 자신을 지켜주는 애런에게 붙어있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

카펠라의 화려하고 신비로웠던 분위기의 마탑과는 달리 베로니카의 마탑은 투박하고 살벌했다.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벽에 박제되어있는 곤충이나 동물들 때문이었다. 종류도 아주 다양했는데, 작은 쥐부터 시작해서 사자, 곰, 더 나아가서는 위압감이 넘치는 용에 이르기까지했다. 사람도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다행히 사람이 박제된 것은 없었다.

카펠라에게 들었던 대로 세상 모든 것을 수집하려는 듯한 베로니카는 그야말로 소환수와 계약하고 자신의 것처럼 다루는 소환사에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호다.”

“저 나쁜 년이 뻔뻔하게도 살아돌아왔다.”

“그냥 죽어버렸으면 나았을 텐데 말이야.”

전 미호의 마탑의 마법사였던 자들은 미호를 보자마자 미호에게 들으라는 듯 욕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카펠라의 손님이라는 증명서가 있었기에 덤벼들지는 않았지만, 이게 없었다면 마탑이 난장판이 되었을 것 같았다.

“으으…”

미호는 손으로 귀를 닫았다. 분명 자신이 마탑주였던 시절에 저자들에게 못되게 굴었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가르침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는데… 자기 뜻도 모르고 원망만 하는 마법사들을 보니 가르쳐주지 않기를 잘한 것 같았다.

“미호 님이 밉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탑주였을 때는 더 했나 봐요.”

도로시는 미호를 자신의 원수라도 보듯 노려보는 마법사들 때문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욕을 듣는 건 분명 미호지만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듣기 거북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너도 나를 밉상이라고 욕하는구나…”

“그건 사실이니까요.”

“미호, 가만히만 있어도 반은 갈 수 있다고 그랬어.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어떨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한다만 이 입이 자꾸 열리는 것을 어떡하느냐…”

“그럼 제가 막아드릴게요.”

자동문처럼 자꾸 열리는 미호의 입을 도로시가 손으로 틀어막았다. 미호는 크게 뜬 눈으로 뭐라 말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미호 님은 소멸시켜도 죄책감이 안 들 것 같아서 편하게 만질 수 있네요. 이걸로 남과 접촉하는 연습을 해야겠어요.”

마탑을 오르면서 또 정상까지 가기 위해서 엄청난 수의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야하나 걱정을 했지만, 카펠라의 마탑과는 다르게 엘리베이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였다.

“그보다 베로니카 님을 만나는 것은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바로 만날 수 있네요?”

“아, 제가 아까 봤는데. 소환수가 베로니카 님 대신 마법사들을 만나주는 것 같았어요.”

애런은 미호를 욕하는 마법사들 때문에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던 도로시에게 말해줬다.

소환수는 수준에 따라 사람과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지능이 높은데, 마탑의 1층에서 봤던 소환수들은 모두 그 정도는 가능해 보였다. 거기다가 대화를 하면서도 돌발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것으로 베로니카라는 마법사가 실력도 없는데 미호의 자리를 빼앗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정상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렸다.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방을 가로막는 석문이 아닌, 몸은 사자이고 인간의 머리가 달린 스핑크스였다.

얌전하게 앉아있던 스핑크스가 인기척을 느끼고 방문자들을 바라봤다.

“기다려라.”

스핑크스가 조용히 말했다.

“이곳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내가 하는 질문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주인, 베로니카가 결정한 방문자를 직접 만나는 규칙이다.”

“알겠다.”

애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뱀의 머리가 달린 꼬리가 스르르 기어 나오더니 애런에게 다가왔다. 차갑고 딱딱한 푸른 비늘이 얼굴을 감싸더니 뱀의 눈동자가 얇아지며 애런을 향했다.

“인간도 악마도 천사도 아니다. 모든 것이 섞인 키메라와 같은 네놈은 대체 무엇인가.”

몸에 마왕이 봉인되어있다는 것을 꿰뚫어 본 것인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뱀이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 나는 애런이다.”

“알겠다. 그걸 잊지 않기를 바라마.”

그 무엇도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애런의 대답에 뱀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혀를 낼름 내밀고는 이번에는 도로시에게로 향했다.

도로시의 능력도 꿰뚫어 본 것인지 몸을 휘감지는 않고 멀찍이 떨어진 상태에서 물었다.

“치천사에게 선택받아 세상을 구할 의무를 가진 성녀가 이곳은 왜 왔는가.”

“저는…”

도로시는 눈살을 찌푸리고 대답을 머뭇거렸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그저 애런을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과연 뱀의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이 될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러 돌아가라. 이곳은 네가 올 곳이 아니다.”

“... 네.”

해야 할 일. 그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도 맞지만, 지금 당장은 언니인 이자벨라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로막는 앙겔로크라티카의 강자들을 쓰러뜨릴 힘, 애런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힘이 필요했다.

“애런 님, 저는 카펠라 님의 마탑으로 돌아가 볼게요.”

“혼자서 돌아가셔도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제 능력 잘 아시잖아요.”

“네, 조심해서 가세요.”

미호와 같이 있는 것을 본 마법사들이 도로시를 습격하지는 않을까 해서 한 걱정이었지만, 쓸데없는 걱정인 것 같았다.

도로시는 아직 문이 닫히지 않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아직 탈 사람이 남아있을지도 몰라서인지 문을 닫지 않고 기다렸다.

뱀은 마지막으로 애런의 손을 잡고 있는 미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나 힘을 잃은 대마법사여,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함인가.”

미호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고작 마탑주라는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 찾아온 것으로 보이느냐? 내가 되찾을 것은 내 힘이다. 그것을 되찾는다면 그에 걸맞은 자리는 저절로 돌아오겠지.”

“좋다. 이제 돌아가라.”

스핑크스의 말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며 출발했다. 뱀은 다시 원래 자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며 길을 비켜주었다.

“들어가라. 너희들은 베로니카를 만날 자격이 충분하다.”

끼익. 알 수 없는 뼈로 장식된 석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베로니카 녀석… 그새 소환수들을 더 늘렸군.”

넓은 방에는 자신의 몸을 다듬고 있는 새끼 용이 있었고, 각자 다른 형태와 빛을 가진 정령들이 날아다니고 있고, 은빛 갑옷을 입은 인간 형태의 소환수가 있었다.

애런과 미호가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방을 가득 채운 수 많은 소환수들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살의나 악의가 담긴 시선은 아니었지만, 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은 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스핑크스를 지나서 이 방에 온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이제 두 손으로 세어야겠네.”

곰처럼 생긴 동물 위에 앉아있는 베로니카가 손가락 두 개를 접으며 말했다.

“그래서 선물은 챙겨왔어?”

애런은 가지고 왔던 용의 심장을 베로니카에게 건네주었다. 미호를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서 실망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미호를 선물로 가져온 게 아니라서 실망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입을 벌려서 용의 심장을 집어삼켰다. 콰득! 딱딱한 용의 심장을 씹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지고 베로니카의 입가에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음… 괜찮네. 이때까지 용의 피는 많이 마셔봤지만, 이렇게 순도가 높은 적은 처음이야. 좋은 선물을 가져와 줬으니, 나도 부탁을 들어줘야겠지.”

베로니카가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핥으며 일어섰다.

“애런, 들었느냐? 내 방법이 옳았다는 것을 알겠지?”

“알겠으니까 조용히 좀 해줘.”

조금은 미호에 대한 생각이 바뀔 뻔하다가도 저 오두방정을 떠는 입이 열리니 그런 생각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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