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베로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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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는 마탑에 갑작스레 찾아왔다. 앞을 가로막는 마법사들을 쓰러뜨리고 결국 마탑의 정상, 미호의 방까지 도달했다.
애정도 없는 제자 마법사들을 쓰러뜨린 것은 상관없었다. 자신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온 것도 딱히 상관없었다. 그래서 제자로 받아달라는 베로니카를 바로 내쫓지 않았다.
그녀는 마법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전혀 없었지만, 소환 마법에 한해서는 이론이든 실전이든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재능은 있어 보여서 제자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재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다른 마법사들과 대하는 태도에 차별을 두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 의미없고 고된 심부름을 버티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때가 되면 마법에 대해서 알려줄 생각이었다.
“미호는 나한테 마법을 알려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어느 날 심부름을 하고 온 베로니카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존댓말을 하지 않는 것은 뭐라 하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아 보였고 애초에 심부름을 시킬 때를 제외하면 말을 섞을 일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말은 사실이었고, 이때까지 미호의 제자였던 많은 마법사에게 말투만 달랐지 똑같은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리고 이 말을 한 마법사들은 제자를 그만두었다. 즉 심부름을 하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내가 친절히 알려줄 것이라 생각하지 말거라. 마법이란 깨달음이다. 심부름을 하다 깨닫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성장인 것이다.”
그냥 알려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거였다. 이 말을 들은 마법사들은 대부분 실망하거나, 짜증을 내며 방을 나갔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달랐다. 미호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턱을 만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흐음… 알려줄 생각이 없으면 곤란한데.”
베로니카가 주먹을 쥐었다 펴며 무언가를 고민했다. 가끔 미호의 의미 없는 심부름에 화를 참지 못하고 덤비는 어리석은 자들도 있었기에, 베로니카가 하는 고민을 대충 알 수 있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덤비는 것과 의미 없는 심부름을 버티며 하염없이 미호의 가르침을 기다리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이때까지 들인 시간이 아깝지만, 제자를 그만두거나.
미호의 기억에 베로니카는 소환사였다. 애정은 없지만, 가르칠만한 가치가 있는 자인지 판단하기 위해서 제자에 대한 정보라면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베로니카는 소환수를 소환하지 않으면 싸울 수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달랐다.
그녀는 고민을 하다가 주먹을 꽉 쥐고 맨몸으로 미호에게 덤벼들었다. 그녀는 심부름을 마치고 미호의 탁자 앞에 서 있었으므로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투웅!! 베로니카의 주먹이 미호가 펼쳐둔 방어막과 부딪치며 공간에 파문을 일으켰다. 마법사가 주먹으로 자신에게 덤벼든 것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 생각은 금방 바뀌었다.
퉁!! 베로니카가 주먹으로 방어막을 한 번 더 세게 내리치자 쩌적 소리를 내며 방어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맨몸으로 대마법사가 펼친 방어막을 깨부순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뭣…!”
파문이 일은 공간에서 용의 송곳니가 나와서 미호의 어깨를 꿰뚫었다. 소환에 능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용마저 소환이 가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동 방어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덕분에 용의 이빨에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지는 않았지만, 어깨에 난 상처는 깊었다.
“살았네? 역시 대마법사야.”
목숨은 잃지 않았지만, 목숨에 준하는 것은 빼앗겼다.
“여우 구슬이라… 이건 가져본 적이 없는 물건이네.”
베로니카는 웃으며 미호의 품속에 있던 여우 구슬을 손에 들고 있었다. 마나 회복 기관인 여우 구슬을 빼앗긴 것과 생각지도 못한 기습으로 생긴 상처에 상황은 금세 베로니카에게 넘어갔다.
“힘을 숨기고 있었나.”
“숨긴 적은 없어. 이 힘은 마법이 아니라서 보여주지 않았을 뿐이지.”
베로니카가 허공을 두드리자 공간에 파문이 생기면서 소환수들이 하나둘씩 공간의 틈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넓은 방을 가득 채운 적들은 언제라도 미호의 목숨을 노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지금 상태로는 승산이 없다. 그렇게 판단한 미호는 상처를 치료함과 동시에 전이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영창을 시작했다.
“어딜 가려고?”
하지만 미호를 놓치지 않으려는 베로니카 뻗은 손 때문에 전이 마법을 사용할 때 좌표를 정확하게 입력하지 못했다.
그렇게 무작위로 전이된 곳은 무법지대였고, 남은 마나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쓰레기 더미를 뒤져서 버려진 음식물을 먹었다. 음습한 무법지대의 안개 때문에 쓰레기봉투에 맺힌 이슬을 마시고 버텼다.
그러나 여우 상태로 극한까지 마나를 아껴도 마나 회복 기관인 여우 구슬이 없으니 한계에 봉착했다.
그럴 때 애런이 미호를 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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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혹시 이제 나한테 마법을 가르쳐 줄 생각이 든 거야?”
베로니카는 미호에게 다가와서 용의 이빨에 구멍이 났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면서 말했다. 미호는 잔뜩 긴장했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내 심부름도 견디지 못해 나를 습격한 인내심이 부족한 제자에게 알려줄 것은 없다.”
“그래? 나한테 덜 맞아서 그래. 좀 맞다 보면 알려주고 싶을 거야.”
무덤덤하게 말하는 베로니카에게서는 살의도,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미호는 너무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사람이 아무런 감정도 없이 저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저런 인간은 처음 보는 종류였다.
“이걸 봐라. 나는 카펠라의 손님으로 이곳에 온 것이니 너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 아니냐.”
미호는 떨어뜨렸던 종이를 들어서 베로니카에게 보여주었다. 베로니카는 눈을 찡그리고 종이에 적힌 내용을 천천히 소리 내서 읽었다.
“나한테 왜 왔나 싶었더니 이걸 믿고 온 거였구나?”
검붉은 눈동자에 미호가 비추어진다. 카펠라의 손님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을 집어삼킬 듯한 눈동자에 미호는 애런의 뒤에 숨어버렸다.
“대마법사가 숨어버리다니 재밌네. 카펠라랑은 전혀 다른 느낌이야. 그녀는 나를 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내가 어린애가 되어서 그런 것이다.”
미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한 모양이었지만, 벌벌 떨리는 목소리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직 몸은 베로니카에게 습격당했을 때의 감각을 잊지 않은 것이었다. 날카로웠던 공격은 몸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새겨놓았다.
“뭐, 좋아. 카펠라는 미호랑은 다르게 가르침도 주고, 상식에 대해서도 알려줬으니까 그녀의 손님이라면 해치지는 않아. 아직 배우고 싶은 것들이 있거든.”
베로니카는 몸을 홱 돌려 마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카펠라가 그랬어. 무언가를 부탁할 때는 선물을 해야 한다고. 그러니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미호를 가르켰다가, 휙 손가락의 방향을 돌려서 용의 시체가 있는 동문을 가르켰다. 둘 중 하나를 선물로 들고 오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후아…”
베로니카가 마탑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 미호는 한숨을 쉬었다.
“내 여우 구슬이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니.”
마나만 회복시킬 수 있다면 저 건방진 녀석도 제압할 수 있을 터인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베로니카에게서 그것을 빼앗는 것은 쉬워 보이지 않았다. 역시 갑작스러운 습격, 미호의 방심이 섞이지 않았더라도 베로니카는 강자라는 것이 느껴졌다.
“확실히 불길한 느낌이 나는 사람이네요. 뭐랄까… 사람으로서 뭔가가 결여된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애런 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저도 도로시 님하고 비슷해요. 조금 특이한 느낌이기는 하네요.”
눈앞에 두고도 어떤 자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느껴지는 기운도 없고, 언행도 작위적인 것 같았다.
모습은 사람이지만 분위기에서 불쾌한 골짜기가 느껴지는 자라는 표현이 딱 맞는 자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선물을 달라고 하니 용의 시체라도 챙기러 가보죠.”
“그냥 미호 님을 선물로 줘도 되는 것 아닐까요?”
아무렇지 않게 한 도로시의 말에 미호는 입을 벌리고 애런의 다리에 매미처럼 매달려서 빌기 시작했다.
“나, 나를 버릴 셈은 아니겠지? 베로니카, 저년한테 잡히면 어떻게 될지 몰라…! 버리지 말아다오…”
“도로시 님, 너무 괴롭히지 말아요.”
울먹이면서 비는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고,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당황한 도로시는 무심코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랠 뻔했지만, 평소 머리를 많이 때려서 그런지 움찔거리는 미호를 보고 손을 멈췄다.
“죄송해요.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어요…”
도로시는 평소 미호를 너무 막 대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반성하기로 했다. 아무리 입을 열 때마다 짜증 나는 소리를 해대고, 하는 행동도 짜증 나지만 겉모습만큼은 어린아이지 않은가.
‘설마 이런 것까지 노리고 어린 모습으로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고개를 홱홱 저으며 그만두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아직 근거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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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쿠스에는 앙겔로크라티카나 오르도 왕국처럼 성벽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보다도 훨씬 튼튼하고 듬직한 대마법사들이 펼친 방어막이 존재하니까.
그리고 동서남북 각각 하나씩 있는 출입을 위한 방어막의 틈은 유일하게 적도 오갈 수 있기 때문에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들이 항상 지키고 있으며 경비가 삼엄하다.
그래야만 할 터인데… 지금 베네쿠스의 동문은 경비를 서는 마법사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하늘에서 마법사들에게는 금은보화와 다름이 없는 용의 시체가 우수수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단단한 용의 비늘은 방어구로 만들기에 적합하고, 날카로운 이빨은 무기로 만들기에 적합하다. 용의 마나가 담긴 피를 마시면, 단기간 마법의 위력을 높일 수 있는 도핑 역할을 하기 때문에 환장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앗…! 저 녀석들 얼마 없는 용의 시체를 가져가려고 하고 있다!”
용의 시체가 없으면 베로니카를 만나기 위해서 자신을 갖다 바칠 것이라 생각한 미호는 카펠라가 준 증명서를 들고 용의 시체를 향해 마구 달려갔다.
“비켜라!! 나는 대마법사 카펠라의 명에 따라 용의 시체를 챙기려고 온 대마법사다!”
미호는 상태가 좋아 보이는 용의 시체 앞에 서서 종이를 보란 듯이 들고 으르렁 거리며 다가오는 마법사들을 쫓아냈다.
“저런… 저런 추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던 제가 바보 같아요.”
도로시는 미호의 행동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마나 효율 때문이라고 하면서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고 저런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있는 것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표정을 짓기 위함이고, 자신의 것을 챙기기 위해 말을 하기 위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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