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카펠라의 마탑
* * *
카펠라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석문에는 도로시와 미호가 방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듣기 위해 귀를 갖다 대고 있었다.
애런이 들어가고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문이 열릴 생각을 하지 않자, 대체 안에서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미호는 오호… 소리를 내며 흥미롭게 듣고 있는 반면, 도로시는 두꺼운 석문에 대화 소리가 막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미호 님, 대체 두 분은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건가요?"
도로시는 답답한 마음에 평소 싫어하던 미호에게 물었다.
"알고 싶느냐?"
짜증 나는 표정으로 실실 웃는 미호의 머리에 주먹을 당장 쥐어박고 싶었지만, 여기서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네, 좀 알려주세요."
"그럼~ 앞으로 내 머리를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거라. 네 주먹 때문에 내 머리가 두 배는 커진 것 같다."
"그러도록 하죠."
"너무 쉽게 대답하는군. 믿지 못하겠는데…"
"빨리 알려주기나 해요."
계속되는 도로시의 재촉에 이기지 못하고 미호는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말거라…"
"네."
꿀꺽. 이게 뭐라고 도로시는 긴장을 해서 마른 침을 삼켰다.
"역시 대마법사의 방을 가로막고 있는 문이다. 전혀 들리지 않는구나."
"..."
퍼억! 도로시의 손이 미호의 머리를 가차 없이 가격했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미호의 머리가 휙 아래로 내려갈 정도였다.
"아아악!! 안 때리기로 했지 않았느냐!"
"저는 약속대로 주먹으로 때리지는 않았어요."
미호는 맞은 머리를 부여잡고, 눈물이 맺힌 눈으로 도로시를 노려봤다.
"뭐요. 소멸하고 싶어요?"
"... 이게 어딜 봐서 성녀란 말이냐… 악마, 마왕 그 자체이지 않느냐…"
도로시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신이 봐왔던 성녀와는 너무나도 동 떨어진 모습이다.
어머니, 성인, 천사의 이미지는 어디 가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머리를 때리는 여자가 눈앞에 있단 말이냐…
"사실 안에서 애런과 카펠라가 하는 얘기를 어느 정도 듣기는 했다."
"진짜요? 또 거짓말하는 건 아니죠?"
이런 악마 같은 여자니까 분명 약속의 틈을 찾아서 자신을 괴롭힐 거라 생각했다.
"그래, 진짜니라. 이제 나한테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알려주겠다."
"... 어느 정도로 들은 거죠?"
"쯧… 거의 다 들었다."
자신이 파놓은 함정을 눈치챘다. 역시 눈치가 빠른 년이었다. 하지만 안에서 한 대화 내용은 자신만 알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조금 놀려주기로 했다.
"일단 둘은 반지를 교환한 사이다."
"... 거짓말 하지 마요."
도로시의 눈빛이 확 바뀌며 미호의 볼에 손을 올렸다.
"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얼른 손 치우거라! 나를 소멸시킬 셈이냐?"
"네, 계속해서 말해보세요."
손이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말했다.
"그리고 카펠라가 애런에게 금화 2000닢을 준 적이 있고, 애런은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겠다는군."
거짓은 없다. 대신 도로시가 혼란스러워하도록 일부 대화를 생략하고 말해줬다.
"어쩐지… 돈이 너무 많다 싶었어요."
금화 수준으로 돈을 팍팍 쓴다고 생각했더니, 마탑주에게 돈을 공급받고 있는 것이었다. 돈을 주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둘은 이미 그런 사이였나보다.
"실망했다는 표정이군. 어때? 이미 애런은 남의 것이었다. 이제 포기하거라."
"실망을 하기는 했지만, 포기는 안 했어요."
"으응…? 그게 무슨 소리냐?"
설마 카펠라를 소멸시키고 얻으려는 셈인가? 이 여자는 정말 악마인 건가? 라고 생각하며 미호가 덜덜 떨고 있자, 도로시가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또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죠?"
"아, 아… 아니다. 네가 이어지지 못해서 안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요? 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실망을 한 건 애런 님의 첫 번째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 소리는 설마."
"일부다처제는 흔한 거잖아요?"
생각을 뛰어넘는 대답에 미호는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동시에 굳게 닫혀있었던 석문도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들어가죠."
카펠라를 만나러 들어가는 도로시의 모습에는 왜인지 비장함이 엿보였다.
"거기 앉아."
마탑의 정상은 이때까지 올라오면서 봤던 어느 층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도로시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확인하는 것은 카펠라.
'확실히 애런 님에게 어울리는 아름다우신 분…'
"카펠라, 내가 앉을 곳은 없는 것 같다만?"
방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의자는 3개뿐이었다. 미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서 있었다.
"아, 네 자리는 거기야."
카펠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아무것도 없는 차가운 바닥이었다.
"여우는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카펠라…!"
너도나도 자신을 괴롭히는 현실에 눈물이 핑 돌았다. 최근 몸이 어려진 탓인지 약해진 탓인지 대마법사답지 않게 눈물이 많아졌다고 생각하며, 애런의 무릎 위에 털썩 앉았다.
"너 왜 자연스럽게 내 위에 앉냐."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설마 너도 나를 저 차가운 바닥으로 내치려는 셈이냐?"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애런을 올려다보며 말하면서 형용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꼈다.
"뭐, 그러던지."
다행히도 애런만큼은 자신을 내치지 않았다… 아니, 남들에게는 다 쳐내 졌으니 불행한 것일까. 미호는 자신의 신세에 한숨을 쉬었다.
"근데 이 둘도 나한테 용건이 있어서 온 거야? 그냥 따라온 거 아니에요?"
카펠라는 애런을 바라보며 물었다.
"카펠라 님에게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그때 도로시가 손을 들고 말했다. 카펠라는 말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미호 님이 문으로 대화를 엿들은 내용을 들었는데, 혹시 두 분은 아시는 사이인가요?"
"대화를 엿들어? 아주 별짓을 다하는구나."
"그, 그… 그냥 들린 것뿐이다. 조금 더 보안에 신경을 써야겠더구나…"
"그냥 들려? 저 문에 마법이 몇 중으로 걸려있는 줄 알면서 뻔뻔하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카펠라의 눈길을 버티지 못한 미호는 애런의 무릎 위에서 벌벌 떨었다. 원인은 미호에게 있지만, 조금 불쌍했던 애런은 머리나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아는 사이야."
"그냥 아는 사이인가요? 금화 2000닢을 주고 반지까지 교환한 사이라던데요."
"조금 오래된 일이기는 한데, 맞는 말이야."
미호의 말을 믿지 않았건만 사실이었다. 도로시는 살짝 낙담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계속 밖에 두기는 미안해서 불렀는데, 나한테 용건이 있는 사람은 애런 밖에 없는 거지?"
"나도 있느니라."
"용건이. 있는. 사람."
"나한테 왜 그러는 것이냐…"
카펠라의 차가운 태도에 미호가 울먹거리면서 물어보자, 마음이 약해졌는지 혀를 차고 말해보라 했다.
"내 마탑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
"네 제자였던 마법사가 마탑주가 되었어."
"그 녀석, 나를 습격하고 여우 구슬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내 자리까지 빼앗은 것이냐."
미호는 2개의 꼬리를 홱홱 흔들면서 짜증 냈다. 실력이 있는 녀석이기는 했지만, 설마 마탑주로 인정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고 되돌아갈 곳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뭐, 애런에게 말할 것도 그거와 관련된 거였는데 잘 됐네."
"나한테 말할 거?"
"응, 신성 마법은 못 쓰고 마나는 못 느낀다면서요? 흑마법은 논외니까 남는 건 하나밖에 없잖아."
"정령 마법?"
카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 마법은 정령이 말을 걸어서 계약을 해야지만 사용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저 여우 자리를 빼앗은 마법사, 베로니카한테 가야 한다는 소리예요."
"아, 불러내서 계약시키겠다는 거냐?"
미호는 무언가 눈치챘는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래, 베로니카는 정령도 소환 가능한 소환사니까. 그 녀석이 부른 소환한 정령에게 애런과 계약하라고 하면 돼."
"그런데 걔가 네 말을 듣겠느냐?"
"난 너랑은 다르게 대부분의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니까 될걸."
뭐라 반박을 하려다가 미호는 입을 꾹 닫았다. 생각해보니 이 입이 문제였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 말 하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요."
도로시가 말했다.
"뭔데?"
"혹시, 아일라 님한테 마법을 가르쳐주실 때 저도 참관해도 되나요?"
가브리엘에게서 도망칠 때, 도로시는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눈앞에 이자벨라를 두고 도망치는 것… 다시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상관없어."
"감사합니다."
대마법사임에도 수업료도 받지 않고 허락해준 카펠라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용건 끝이지?"
그렇게 물어보고는 수정 구슬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그건?"
"아일라한테 연락하고 싶다며."
우웅.
카펠라가 구슬에 손을 대자 푸른 빛이 퍼지며, 아일라의 방을 비췄다.
"... 저 바쁜데요."
그리고 힘없는 아일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바쁘기는 뭐가 바빠."
"설거지 연습하느라 바빠요."
"설거지가 연습해야 할 만한 일이야?"
그때 와장창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 방해하지 마요. 전에 오빠한테 설거지 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릇 다 깨 먹어서 연습하고 있으니까요."
애런은 떠나기 전에 자신 있게 자기에게 맡기고 가라고 했던 아일라가 떠올라서 피식 웃었다.
"남자 웃음소리? 옆에 누구 있어요?"
"어, 있어."
"그래요? 이왕 그렇게 된 거 좀 잘 해봐요. 이미 돌아가신 전 용사님 생각만 하지 말고요. 나이가 몇 살인데… 거미줄 생기겠어요."
"네 여동생 죽는 거 아니냐?"
미호의 걱정과는 다르게 카펠라는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래, 네 덕에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아."
"네? 웬일이래요? 평소 같았으면 나한테 더 한 욕이 돌아와야 할 텐데… 아, 남자 앞이라고 착한 척하시는 거구나."
아일라는 재밌는 일이라도 생긴 듯 히히 웃으며 설거지를 그만두고, 수정 구슬에 모습을 비쳤다.
"뭐야뭐야? 남자들은 전부 고블린 같아 보인다더니, 그렇게 착한 척 내숭 떠는 걸 보니까 벌써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 거에요?"
"응."
"와아… 표정 뭐야. 맨날 무뚝뚝하더니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네요? 이왕 그렇게 된 거 확 잡아서 도망 못 치게 해요. 마탑주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응, 그러려고. 나중에 내가 하는 말도 다 들어준다더라."
그러면서 앙큼한 눈빛으로 애런을 바라봤다. 이제는 자신의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는 카펠라의 눈빛은 둔감했던 애런마저도 그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어서, 민망한 듯이 웃을 뿐이었다.
"잘됐네요. 어떤 사람이길래 전 용사님 바라기였던 카펠라 님이 푹 빠졌는지 궁금한데, 얼굴이라도 좀 보여줘요."
"들었지? 얼굴이라도 한 번 보여줘요."
카펠라는 미소를 띈 채 수정 구슬을 애런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서 헤실헤실 웃고 있던 아일라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오, 오빠가 거기서 왜 나와?"
"어때? 내 말 다 들어주기로 했던 남자야."
조금 전 거미줄 얘기에 대한 복수라는 듯 아일라에게 아주 잘 들리도록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