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미호
* * *
“끄으으…”
애런은 눈을 뜨자마자 신음을 흘렸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너무나도 평범한 몸은 마기에 의한 고통을 아직도 느끼고 있었다.
“얘는 또 뭐야.”
배에 무언가 푹신한 것이 올려져 있다고 생각해서 눈동자만 내려서 바라보니, 배에 미호가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한 손으로 미호를 옆으로 치우려고 했지만, 아직 몸이 제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일어났느냐.”
애런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니 잠에서 깬 미호가 대자로 누우며 말했다. 일어난 것을 확인하고도 비키지 않아, 애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안 비키냐?”
“뭘, 평소에도 이러고 있지 않았었나.”
“그때는 여우였잖아. 그리고 지금은 몸이 욱신거려서 아프다고.”
“엄살이 심하군.”
뭉그적거리며 일어난 미호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애런의 손을 잡았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이건 전부 내 마나를 회복시키기 위한 접촉이야.”
“마나 회복?”
“그래… 베네쿠스의 마탑주인 내가 왜 무법지대의 쓰레기 더미에 있었던 것인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네가 누구인지는 가브리엘에게 듣기는 했다만, 그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있었을 거라 생각해?”
미호는 음… 소리를 내며 돋아난 여우 귀를 쫑긋거렸다. 애런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군.”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지만 애런은 딱히 듣고 싶지 않았다. 아직 허용량을 넘는 신성력을 받아들인 여파가 남아있어서 정신을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이었다.
‘몸이나 정신이나 다 엉망이네.’
한숨을 쉬고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켜 세워 침대에 기댔다. 미호는 조용히 애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에 관해서 물어봐달라는 듯이.
“궁금하지 않나?”
“궁금하기는 한데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아.”
“... 보통 사람들은 내게 무엇 하나라도 더 알아내기 위해서 온갖 금은보화를 바치는데 말이야.”
마법을 쓰느라 다 없어졌던 미호의 꼬리가 하나 생겨났다. 그리고 혼잣말로 알고 싶지 않은 것에 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베네쿠스의 대마법사, 미호는 남들이 자신의 지식을 바라는 것에 익숙했다.
구미호가 되고,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나서, 대마법사가 된 미호는 남들과 궤를 달리하는 세월을 살아왔다. 오래 살아오기만 한 것으로도 남들이 알고 싶어 하는 지식과 진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미호를 찾아 마탑으로 찾아왔다. 그들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순전히 미호가 가진 지식에 대해서 알고 싶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자신이 얻은 것들을 너무나도 쉽게 얻기를 바라는 그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미호는 그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 지식을 알고 싶다면 노예… 아니, 제자가 되라는 것이었지.”
연구를 도와라. 그 과정에서 얻는 지식은 네놈들에게 알려주마. 어떻게 보면 노력을 하고 그만큼의 지식을 알아가는 것이니 공평한 계약이었다. 겉보기로는.
하지만 미호가 연구하는 것은 아주 터무니가 없는 것들이었고, 평범한 마법사인 그들로서는 지식에 대한 부분은 전혀 도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연구를 위해 필요한 잡다한 물건들을 구해오게 하는 심부름만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제자들을 부려먹는 도중 문제가 생겼다.
“이상한 녀석이 제자로 들어온 거다.”
붉은 단발머리에 불길한 검붉은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몇 번의 심부름을 하더니, 미호가 지식에 대해서 알려줄 생각은 없고 그저 고생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어느 날 심부름을 하고 돌아와서 언제나처럼 연구를 하고 있던 미호를 습격했다.
“불의의 습격이었지. 대마법사인 내가 반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굳이 습격을 하지 않고 정면에서 덤비더라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강자였다. 그만한 자가 왜 제자로 들어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미호는 그 상황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마나 회복을 위한 외부 기관인 여우 구슬을 빼앗겼다.”
“도망친 곳이 무법지대였고, 여우 구슬이 없으니 남한테서 마나를 빼앗는 것인가.”
“빼앗는다고 하니 듣기 거북하네. 네가 쓰지 못해 버려질 마나를 내가 쓰는 거라고 해라.”
덜컥 문이 열리고 도로시가 먹을 것을 한가득 들고 들어왔다. 애런이 깨어있는 것을 보더니 방긋 웃었다.
“애런 님, 깨어나셨네요!”
“네, 아직 몸 상태는 안 좋지만 어떻게든 정신은 차렸네요.”
그리고 미호가 애런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미호 님, 왜 아직도 사람인 채로 있는 거죠? 여우로 돌아가시지는 않는 건가요? 인간인 편보다 여우인 편이 마나 효율이 더 좋은 것 아닌가요?”
“너무 돌려서 말하는군. 그냥 내가 사람의 모습으로 이 녀석과 붙어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직설적이고 좋지 않나.”
“네, 네?”
도로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더니 도망치듯 황급히 부엌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잠들어 계셔서 배가 고프실 텐데 간단히 먹을거라도 만들어 올게요!”
부엌에서 꺄악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와장창 그릇이 깨지는 소리와 쇠가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이 가서 애런은 피식 웃어버렸다.
“저 녀석에게 맡겨둬도 괜찮은 거냐.”
“그럼 네가 요리할 거냐?”
12년 동안 갇혀있었던 도로시가 제대로 된 요리를 할 수 있을지는 애런도 걱정이었다. 미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이때까지 나한테 해준 것이 많으니 바란다면 해줄 수는 있다만, 나는 요리를 전혀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떨지는 모르겠군.”
누구에게 맡겨도 불안했지만, 공교롭게도 애런의 몸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
“대단하군. 이걸 요리라고 내놓다니 말이야.”
미호는 새까맣게 타버린 죽이었던 것을 보며 말했다. 죽이라고 하기에는 수분이 부족해 질은 밥에 가까웠지만, 분명 도로시는 죽이라고 했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이건 먹기 힘들겠죠? 제가 식당에 가서 제대로 된 음식을 사 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도로시는 자기가 해놓고도 이 어이없는 수준의 요리를 보며 울상이 되었다. 분명 책에서 보았던 대로 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먹어보니 더욱더 가관이다.
싱겁고 탄 맛이 난다. 죽도 밥도 아닌 이것은 도저히 먹어주기 힘든 것이어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도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애런은 부족하지만, 열심히 만든 정성을 생각해서 죽을 한 숟가락 먹어보려고 했지만, 도로시가 말리며 죽이 든 그릇째로 소멸시키며 말했다.
“아, 안 돼요...! 이런 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돼요.”
“허어… 그 정도예요?”
“네, 애런 님이 해줬던 요리에 비하면 이건.... 쓰레기예요.”
“... 그럼 밖에 가서 먹도록 하죠.”
여전히 조금만 움직여도 고통스럽지만, 이제 천천히 움직이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애런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자 도로시가 머뭇거리다가 부축을 해주었다.
*
하늘의 별자리를 본 따 대육각형을 이루는 원기둥 형태의 마탑은 베네쿠스의 어디에서든 보이는 것이었다. 애런은 마탑을 바라보며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미호에게 물었다.
“미호, 저 중에서 카펠라의 마탑은 어느건지 알고 있어?”
“아, 그 꼬맹이 마법사 마탑이라면 가장 북쪽에 있는 저거다.”
미호가 손가락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마탑을 가르켰다.
“아는 녀석이냐?”
“어, 여기 온 김에 마법이나 좀 배워보려고.”
가브리엘과의 전투로 확실히 깨달았다. 역시 강해지기 위해서 마법은 필요하다. 기도만 해도 사용할 수 있는 신성 마법은 미카엘이 허락해주지 않고, 정령들이 대신 써주는 정령 마법은 계약한 정령이 없어서 사용하지를 못한다. 흑마법은… 웬만하면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미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바로 네 옆에도 대마법사가 있지 않느냐. 여우 구슬을 되찾을 때까지지만 내가 도와줄 수도 있다만?”
“제자한테 당해버린 허접한 녀석인 주제에.”
“뭐, 뭣?! 그건 습격을 당해서 그런 것 아니냐!”
“습격을 당할 정도라는 거지.”
애런의 말에 미호는 버럭 성을 내며 빽빽 소리를 질러댔다. 그걸 무시하고 애런은 다시 물었다.
“그보다 언제까지 같이 다닐 생각이었던 거야. 이제 몸이 아픈 여우도 아니니까 네 마탑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
미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들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아주 조용히 말했다.
“내가 노예… 아니, 제자들을 얼마나 굴렸는데. 내가 힘이 약해진 걸 알면 죽이려 들 거야…”
애런은 어이가 없어서 뭐라 하지 않고 미호를 그냥 바라만 봤다. 대마법사인 자신을 측은하게 쳐다보는 눈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뭐! 할 말이 있으면 하던가...!”
“저런… 뿌린 대로 거둔다더니, 심술을 부렸던 것이 결국 화가 되었군요.”
도로시는 은근히 웃는 얼굴로 미호를 약 올렸다. 그 모습을 보니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 배배 꼬였던 이자벨라와 쌍둥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이, 이 녀석들이 구해줬더니 은혜를 모르는구나!”
“나도 무법지대에서 한 번 구해줬잖냐.”
“이이이익!!”
꼬리를 휙휙 휘두르더니 애런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린아이 정도의 힘이었지만,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애런은 그 정도로도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됐다! 이제부터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들은 알아서 하거라!”
미호는 홱 돌아서서 애런과 도로시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을 쿵쿵 구르며 걸어갔다. 도로시는 혼자 걸어가는 미호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뭔가 밉상이라서 통쾌하기는 한데… 괜찮을까요?”
“자신 있게 걸어갔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겉모습만 어린아이지 실제로는 대마법사고,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니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듯이 몇 걸음을 걷지도 않았는데, 저 멀리서 미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애애애애러어어어언!!!”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이런 큰 소리가 나오나 싶을 정도의 엄청나게 큰 목소리였다.
“구해다오오오오!!!!”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한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이러는지... 대마법사라고는 믿기지 않는 한심한 외침을 들은 애런은 한숨을 푹 쉬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애런 님,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저한테 맡겨주세요.”
확실히 누굴 도울 정도로 몸 상태가 좋아진 것은 아니었기에 애런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