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도망
* * *
보라색 마석에 마기가 흘러가서 점점 색이 탁해진다. 피나 생명력을 대가로 강한 힘을 준다는 마검은 애런의 마기를 빨아먹고 만족했는지 눈앞의 적을 베어버리기 위해서 살기를 뿜어댔다.
“마검 따위가 건방집니다.”
가브리엘은 눈을 부릅뜨고 마검을 노려봤다. 온몸을 가시로 찌르는 듯한 가브리엘의 살기는 마검의 살기 따위는 손쉽게 억눌렀고, 마검이 찌잉 떨렸다.
“도로시 님, 조금 떨어져 계세요.”
“네.”
도로시는 가브리엘과 애런의 싸움의 여파에 휘말리지 않게 거리를 벌리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은 그것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물어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고작 악마의 아이를 위해서 천사님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입니까.”
천사에게 신앙심을 증명하고 발현되는 기적의 대상이 악마의 아이라는 것은 참아주기 힘든 것이었다.
펄럭! 6장의 날개가 힘껏 날갯짓을 했다.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흘러나오는 살기가 향하는 곳은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카앙!! 도로시의 코앞에서 빛나는 검과 마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크윽!”
검을 막아내는 것은 성공했지만, 가브리엘의 힘은 애런을 웃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힘에 밀려 공중으로 날아갈 듯해서 마기를 땅에 꽂아 넣어 몸을 고정시켰다.
“무의미한 저항입니다.”
2장의 날개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깃털들이 애런과 도로시를 향해 날아갔다. 애런은 검은 갑옷으로 깃털을 방어해냈고, 도로시를 향해 날아가는 깃털은 마기를 가시로 만들어 하나하나 요격해냈다.
“... 기적을 내려주시옵소서.”
도로시의 기도가 끝이 나고 애런의 몸을 한 줄기의 빛이 휘감았다. 조금이지만 더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지는 것이 느껴졌다.
쾅! 애런이 발을 한 번 구르자 발에서부터 뻗어 나간 마기가 날카롭게 변해 가브리엘을 집어삼켰다.
“마기로 저를 붙잡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4장의 날개가 펄럭이자 금빛 태양이 생겨났다. 밝은 빛에 닿은 마기는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애초에 마기로 가브리엘을 붙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시야를 가리는 것, 그 정도로 충분히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헬슨의 목을 베었을 때의 기술을 재현할 수 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마검의 끝에 공간이 끌려가며 일순간에 베어졌다.
베어진 공간이 일렁이며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소멸시켰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일렁이는 공간은 지평선처럼 위아래를 구분 지었고 이질적인 광경을 만들었다.
“대단한 실력입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그것을 보고 피했다.
일렁이는 공간 아래, 날개를 펼치고 저공비행을 하며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통하지 않은 것에 애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괴물 놈.”
“그건 제가 할 소리입니다. 고작 인간의 몸으로 공간마저 베어버리다니, 대체 정체가 무엇입니까?”
애런의 발을 묶어두기 위한 가브리엘의 신성 마법이 발동되었다. 하늘에 거대한 십자가가 생기며 대지를 짓눌렀다. 구그그그… 공기도 위에서 내리누르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대지로 가라앉았다.
몸을 짓누르는 압력에 몸은 꼿꼿이 세우고 있지만, 발판인 땅이 버티지 못했다. 발이 푹푹 꺼지며 애런의 움직임을 봉하기 시작했다.
발판이 버티지 못한다면 새로 만들어내면 될 뿐이었다. 애런은 마기를 발에 집중시키고 그것을 발판삼아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떨어뜨리십시오.”
가브리엘의 말과 함께 하늘에 구멍이 생겼다. 새벽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은 순식간에 옆으로 밀려나며 하늘을 가리지 않고 길을 열었다.
구멍에서 천사들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작은 날개를 펼친 아기 천사부터 거대한 4장의 날개를 펼친 지천사까지 차례대로 구멍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들의 손에는 악을 벌할 검과 창이 들려져 있었고 자신들이 심판할 애런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미친…”
지천사가 손을 들었다가 휙 내렸다. 천사들의 영역인 하늘을 침범한 애런을 인간이 있어야 할 위치인 땅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하얀 육각 기둥이 떨어진다.
애런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눈앞에 있는 가브리엘을 견제하면서 기둥을 베기 위한 종베기.
마검에서 어둠이 흘러나와 검 끝에 있는 모든 것을 양단시켰다. 쩌적… 하얀 기둥도 반으로 갈라졌지만, 가브리엘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빛의 검으로 어둠을 받아내는 것도 모자라 역으로 깃털과 작은 태양을 날려 보냈다.
퍼버버벙!! 애런의 근처에서 거대한 폭발이 잇달아 일어났다. 전 방향에서 일어나는 폭발은 어느 한 곳에 집중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온몸에 갑옷을 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방어가 약해졌다. 갑옷은 폭발만큼은 막아냈지만, 그것이 한계였고 갑옷은 사라졌다.
흙먼지가 일어나 생긴 연기를 뚫고 날아온 깃털은 애런의 맨몸에 고스란히 박혔다. 방어를 위해서 검을 들어 올려야만 하지만, 깃털은 박힌 채로 미세하게 떨리며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성녀의 신성 마법으로 신체가 강화되었다고는 하나 이만큼이나 저에게 버틴 것은 칭찬해드리고 싶습니다.”
어느새 하늘을 날고 있는 가브리엘의 손끝에는 거대한 적색 태양이 들려져 있었다. 화륵! 태양에서 플레어가 일어나며 엄청난 양의 빛과 열이 전해져왔다.
땅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열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버려 끈적끈적해졌고, 나무들은 순식간에 불타 사라졌다.
저것은 막을 수 없는 재앙이다. 곧 자신에게 떨어질 태양을 보며 애런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런 공격을 한다면 앙겔로크라티카에도 피해가 생길 텐데.”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쿵! 쿵!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기둥들이 주위를 감쌌다. 그리고 기둥 위에는 지천사가 서서 금빛 방어막을 펼쳤다. 반구 형태로 만들어진 방어막은 기둥 밖과 안의 공간을 나누어놓았다.
도망칠 수가 없다. 사방은 방어막으로 막혀있다. 방어막을 부순다고 하더라도 기둥마다 한 명씩 서 있는 지천사가 애런의 앞을 가로막을 것이다.
불완전하다고는 하나 애런이 손도 쓰지 못하고 당했던 마왕을 손쉽게 제압한 상급 천사를 뚫고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신벌.”
태양이 땅으로 떨어진다.
땅에 가까워지면서 하늘을 가린 태양을 바라보며 애런은 눈을 크게 떴다. 설령 막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포기를 할 생각은 없다. 태양을 베기 위해서 검을 두 손으로 잡았다.
[용사, 빨리 어떻게든 해봐라! 이대로 죽을 생각이냐?]
“너도 살고 싶으면 몰래 숨겨둔 힘 나한테 넘겨라.”
[말하지 않아도 그럴 셈이다.]
쿵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몸 깊숙이 봉인된 마왕으로부터 흘러들어온 마기를 펌프질해서 온몸으로 내보내기 위함이었다.
다른 생물이 몸에 들어와 휘젓는 것 같은 마왕을 처음 봉인했을 때처럼 엄청난 고통이 몰려온다. 애런은 이를 꽉 깨물고 정신을 잃지 않도록 버텼다.
한계를 넘어서는 마기에 몸이 침식되는 것이 느껴졌다. 마기가 몸을 변형시켰다. 머리에는 뿔이 돋아나고 눈동자는 날카롭게 바뀌었다. 몸이 버티지 못해 고깃덩어리가 되지 않도록 이자벨라와 도로시에게 받은 신성력으로 마기를 제어한다.
몸에 박혀있던 깃털은 마기에 썩어서 땅으로 떨어졌다. 이제 팔이 움직인다.
“후우…”
할 수 있나.
분명 대립해야 할 신성력과 마기가 조화를 이루어 마검에 담겼다.
막을 수 있을까.
‘잡념은 검을 휘두르는 데 방해만 될 뿐이야.’
머리를 비우고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전력으로 휘둘렀다.
부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마검에서 어둠이 쏘아졌다.
어둠은 떨어지는 태양과 부딪치며 균형을 이루더니, 가지를 뻗어 천천히 태양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은 다시 어두워졌다.
이걸로 위기는 넘겼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것은 아니라는 듯 가브리엘은 웃고 있었다.
“저는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화아아악!! 어두워졌던 하늘은 금방 밝아졌다. 그것도 아까 전보다 더.
하늘에는 하나의 태양만이 존재하지 않았다. 7개가 떠있다. 애런은 입을 벌리고 욕을 한마디 내뱉었다.
“씨발.”
더는 남은 힘이 없다. 아까 휘두른 검에 남은 힘을 모두 담아 떨어지는 태양 하나를 겨우 막았더니, 이번에는 7개였다. 저 괴물 놈은 그러고도 여유가 있는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래에 천사님에게 닿을 악마를 지금 이 자리에서 처리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가브리엘의 손짓과 함께 7개의 태양이 떨어진다. 이제는 검을 들려고 해도 남은 힘이 없어서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남은 방법이 없었다.
[글렀군.]
마왕도 애런도 도로시도 체념하려는 순간.
“따라올 상대를 잘못 골랐어.”
애런의 품속에서 얼굴을 비집고 나온 여우가 말했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땅으로 내려간 여우의 몸이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해주는 밥이 맛있어서 따라왔더니 지옥이 따로 없군. 용사한테 붙어있을 걸 그랬어.”
여우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고 나니 긴 금발에 금안을 가진 여성이 되었다. 살랑이던 꼬리는 9개로 나누어져 산만하게 움직이고 있다.
“구미호?”
“쯧… 2년 동안 붙어 다니면서 모은 마나를 다 쓰게 생겼군.”
구미호는 혀를 차더니 영창을 하기 시작했다. 꼬리가 빛을 발하며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ooue owo viwolu.”
총 7개의 꼬리가 사라지고, 7개의 아주 작은 푸른 불꽃이 구미호의 주위에 생겼다. 뭔가 자신감 있게 말을 하길래,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애런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구미호는 그걸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구나… 들어라, 멍청아. 분명 마법은 분명 광범위한 공격을 하는 것에 최적화되었지만,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범위를 한정시킬 필요가 있다.”
7개의 작은 불꽃이 땅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저런 작은 불꽃이 날아간들 무엇이 되겠냐고 생각하던 애런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쿠콰콰콰쾅!! 태양에 비하면 점에 가까웠던 불꽃이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태양을 꿰뚫고 순식간에 7개의 태양을 모두 파괴했기 때문이다.
순수한 신성력 덩어리였던 태양은 부서지더라도 파편 따위는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사르르 녹듯이 사라졌다.
“입체보다는 면이, 면보다는 선이, 선보다는 점이 마나의 밀도가 높아지며 마법의 위력이 높아진다. 그러니 저 거대한 태양도 점에 불과한 불꽃에 파괴당한 것이다.”
“베네쿠스의 대마법사, 미호 님이 왜 거기 있는 것입니까.”
태양이 작은 불꽃에 파괴된 것 때문인지 표정을 콱 구긴 가브리엘이 하늘을 다시 태양으로 가득 채우며 말했다. 구미호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제1사도가 나를 알아보다니 그것참 영광이로군.”
“분명 행방불명이 된 채로 오랜 시간이 흘러 죽었을 거란 소문이 돌았는데…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 모양입니다.”
“그런 셈이지.”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 소문이 사실이 될 겁니다.”
세지도 못할 수의 태양이 떨어진다. 구미호는 휙 돌아서 애런과 도로시를 팔로 붙잡고 영창을 했다.
“jalocne oi.”
구미호의 남은 꼬리 2개가 사라지며 푸른 빛이 세 명의 몸을 감쌌다. 콰아아앙!!! 가브리엘은 땅에 떨어지기 전에 태양을 터뜨렸고, 공중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지천사들이 펼친 금빛 방어막들이 충격파에 심하게 요동쳤다. 깨지고 재생되고,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방어막 안이 잠잠해졌고 시꺼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브리엘이 날갯짓을 한 번 하자 연기는 순식간에 날아갔다. 움푹 파인 대지, 빨갛게 달아올라 녹아내린 지표면, 일렁이는 대기. 분명 사람이 폭발에 휘말렸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력이었지만, 가브리엘의 눈은 그들이 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장거리 전이 마법... “
놓쳤다.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은 도망쳤다. 그 생각에 속에서 욕이 올라왔지만, 천사의 검으로서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입을 꽉 다물었다.
“제가 말했죠. 당신들은 개 역할도 제대로 못 하는 덜떨어진 것들이라고…”
반투명한 상자에 머리만 재생이 된 이자벨라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가브리엘은 눈을 부라리고, 상자를 열어 이자벨라의 머리를 쥐어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