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43화 (43/92)

〈 43화 〉 도망

* * *

콰아앙!! 검은 갑옷을 두른 애런이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한 번의 도약으로 순식간에 눈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이동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자벨라는 조금이나마 안심을 했다.

‘애런 님이라면 도로시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상식을 초월하는 제1사도 가브리엘. 전생 용사인 애런이라도 현재의 몸으로 가브리엘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할 일은 조금이라도 가브리엘의 발을 묶어두는 것. 그러기 위해서 이자벨라는 이 자리에 남아있는 것이다.

“이자벨라 마이어!! 당신, 저희를 속이셨습니까?!”

애런이 두른 검은 갑옷을 이룬 것이 마기라는 것을 눈치챈 가브리엘이 격분하여 큰 소리를 냈다.

“언제나 침착하던 당신도 소리를 지를 줄 아시는군요.”

“저 음침하고 사람을 갉아먹는 불온한 기운. 분명 마왕과 견줄 수 있는 마기입니다.”

가브리엘은 전에 받았던 보고서에 대한 내용을 떠올리고 순식간에 진정하고 말했다.

마왕이 부활하기 직전이었지만, 성녀인 자신이 그것을 정화했다는 보고. 가브리엘은 그것을 보고 수상쩍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불완전한 이자벨라의 힘으로 그 정도의 악마의 아이를 제압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로시 마이어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서 악마의 아이를 숨긴 것입니까.”

이자벨라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네, 당신들이 제 거짓말이 섞인 보고에 속아준 덕분에 일이 잘 풀렸네요.”

“천사님의 믿음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서 마왕이 부활할 수 있을 여지까지 남겨두셨다니, 당신은 도대체 얼마만큼 저를 실망하게 하실 생각입니까.”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그의 눈과 꽉 쥔 주먹을 보고 그가 화를 억누르고 있다고 알 수 있었다. 더욱더 분노할수록 좋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시간을 낭비하도록 이자벨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과연 저만이 천사님의 믿음을 배신했을까요?”

“... 말을 가려가면서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마왕의 그릇인 악마의 아이를 찾기 위해 인간계를 감시하는 것 그리고 발견한 악마의 아이를 정화하는 것. 당신들은 천사들이 맡긴 일을 무엇 하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어.”

“그 이상 입을 연다면 죽지 못하는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대기마저 떨게 하는 가브리엘의 분노가 섞인 경고였지만, 이자벨라는 떨지 않고 말했다.

“당신들, 12사도는 천사님의 개 역할도 제대로 못 한 덜떨어진 것들뿐이야.”

“이자벨라 마이어, 불사의 능력을 가졌다고 죽음이 두렵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죽는 것보다 두려운 것이 많다는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알고 있어.”

이자벨라의 능력은 불사만이 끝이 아니다. 또 다른 능력 미래 예지로 이자벨라는 자신의 미래를 이미 꿈으로 경험하고 왔다.

죽지 않는 자신을 도로시가 있었던 지하실에 온몸을 쇠사슬로 묶어둔 다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여러 잔혹한 방법들로 고문한다. 그 고문은 하루도 빠짐없이, 쉬는 시간을 한 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이루어진다.

고문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성녀의 데이터를 얻기 위해서, 악마의 아이를 살려둔 죄를 묻기 위해, 자신을 죽지 않게 만든 천사를 원망하게 만들어 불사의 능력을 잃게 해서 죽이기 위함이었다.

끝없는 고문… 천사는 가혹하게도 고문 끝에 이자벨라가 어떻게 되는지는 꿈으로 보여주지 않았다. 고문을 버티다 못해 죽었을까? 아니면 평생 고문을 당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살아서 탈출했을까?

버티기 힘든 괴로운 과정만을 알 뿐 결과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이자벨라는 도로시를 구하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 선택을 후회할 생각은 없다. 언젠가 애런, 도로시, 아일라가 구해줄 것이라 믿으며 언제까지고 고문을 버틸 것이었다.

“알면서도 택한 길이야.”

이자벨라의 손짓에 따라 방어막이 움직인다. 크게 입을 벌린 방어막으로 가브리엘을 감싸서 붙잡아둘 생각이었지만, 순백의 날개 6장을 펼친 그는 이미 인지를 벗어난 괴물이었다.

새벽의 하늘에 가브리엘의 머리색과 같은 금색의 태양이 떴다. 태양이 폭발을 일으키자 가브리엘을 집어삼켰던 방어막들은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고 와장창 깨져갔다.

조금이나마 시간을 끄는 것도 기적이다. 이자벨라는 가브리엘과 말하면서도 하고 있었던 심상 기도를 끝내고 몇 겹의 방어막을 더 만들어냈다.

촤르르르르!! 방어막들은 사슬이 되어 가브리엘의 날개와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옭아맸다. 사슬은 어떠한 일에도 부서지지 않겠다는 이자벨라의 마음에 응해 만들어진 끊어지지 않는 것이었지만, 가브리엘은 그것을 고작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너무나도 쉽게 끊어버렸다.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심상 기도로 이 정도의 신성 마법을 사용이 가능한 자를 죽이고 새 성녀를 기다려야 한다니!”

“천사님의 선택을 믿습니다. 감히 천사님의 뜻을 곡해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상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녀를 죽이려는 광신도를 벌할 기적을 내려주시옵소서!”

끊어진 사슬이 광신도를 벌할 검이 되어 날아갔다. 부서진 파편 하나하나가 모두 신성력이 담긴 검이었기에 하얀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소용없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커흑..!”

펄럭! 그가 날갯짓을 한 번 하자 어느 순간 목에 검이 들어왔다. 가브리엘의 빛나는 검은 목의 단면을 지져놨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심상 기도도 하지 못하도록 가브리엘은 떨어진 이자벨라의 머리를 짓이겨버렸다.

*

콰아아아앙!! 저 멀리 뜬 태양이 순식간에 수축하며 일점에 모이더니, 하늘을 덮을 듯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대기를 따라 전해져오는 충격파가 애런이 있는 곳까지 전해져왔지만, 마기를 등에 집중시켜서 어떻게든 버텨냈다.

“어, 언니…”

도로시는 폭발을 보더니, 걱정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괜찮을까.’

이자벨라가 죽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불사가 무적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힘 차이는 죽지 않더라도 메울 수 없는 것이고, 그런 자에게 패배했을 때는 계속해서 고통받는 것만이 남는다.

전생의 애런도 불사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이었다. 어렸을 시절 강한 악마에게 졌을 때는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것을 감내하고 저 자리에 남은 이자벨라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울지 알 수 있어서 애런은 더욱더 괴로웠다.

펄럭! 날갯짓 소리와 함께 깃털 하나가 애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벌써 쫓아온 건가.”

“제게서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습니까?”

하늘에는 6장의 날개를 펼친 가브리엘이 애런과 도로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자벨라 님은 어떻게 하고 왔지?”

“걱정 마십시오. 죽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죽을 수도 없는 자지만 말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고 왔냐고 물어봤을 텐데.”

가브리엘은 히죽 웃으며 반투명한 빛으로 이루어진 상자를 들어서 둘에게 보여주었다.

“애런 님, 저 상자에 든 것은 뭔가요..?”

상자 안에는 잘게 다져진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자석처럼 서로에게 이끌리는지 붙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지만, 그것들을 촘촘하게 나누어놓은 빛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 미친 새끼가 웃음이 나와?”

“도로시 마이어, 제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닥쳐!!”

애런은 도로시가 듣지 못하게, 보지 못하도록 귀와 눈을 가렸다. 가브리엘은 여전히 히죽히죽 웃으며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상자 안에 든 것은 이자벨라 마이어의 머리입니다.”

“아..?”

분명 귀와 눈을 막았는데도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도로시는 멍한 표정으로 상자를 빤히 바라봤다.

“이해를 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상자의 안, 공간을 나누어 놓았던 빛이 사라지며 꿈틀거리는 것들이 서로 달라붙는다. 그것들은 진흙을 덧대어 붙이는 듯이 천천히 형태를 갖추었고, 점차 사람의 머리처럼 바뀌어갔다.

그리고 곧 긴 은빛의 머리카락이 생기고, 뻥 뚫린 구멍에 파란 눈동자가 만들어졌다.

“언니?”

애런은 보지 못하도록 도로시의 고개를 누르려고 했지만, 도로시는 상자 안을 보기 위해서 꼿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자벨라의 머리가 다시 붙는 것을 전부 지켜보고 이해했다.

저 상자에 든 것은 이자벨라의 머리라는 것을.

“애런 님, 언니의 머리가 왜 저기에 있는 거죠?”

눈을 깜빡이며 애런을 보고 물었다. 하지만 애런은 입을 꽉 다물고 그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스르르… 살기가 섞인 마기가 애런의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격렬한 전투가 일어나더라도 마기를 억누르는 것은 잊지 않았는데, 지금만큼은 감정에 잡아먹혀 마기를 억누르는 것을 잊어버렸다.

“애, 애런 님?”

애런의 몸과 접촉하고 있던 도로시는 마기가 피부에 닿자 애런의 감정이 조금이나마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가브리엘에 대한 분노, 살의. 가브리엘의 발을 묶어두기 위해 남았던 이자벨라를 구할 힘이 없는 무력감이 뒤섞인 부정적인 감정들이었다.

애런의 눈은 전생의 용사 시절의 적을 죽이기 위한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도로시는 그 눈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정신 차려라!]

봉인된 마왕이 이성을 잃은 애런을 깨우기 위해서 머리가 울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뇌가 떨리는 감각에 애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왕, 지금은 닥치고 있어.”

[헛소리 하지 마라. 지금 가만히 내버려 두면 천사의 개한테 덤벼들어서 죽을 생각이면서 뭘 닥치고 있으라는 거지?]

“...”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거기다 네놈이 죽으면 슬퍼할 사람도 있을 텐데.]

마왕의 말에 애런은 부모님과 아일라를 떠올렸고, 조금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저런 저급한 도발에 넘어가지 마라.]

“... 이번만큼은 고맙다고 해야겠네.”

[앞으로도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져라.]

날고 있는 가브리엘을 무시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자벨라가 자신의 신체를 강화해준 것은 도로시를 데리고 도망치라고 강화해준 것이지, 가브리엘과 싸우라고 한 것이 아니다.

“설마 제가 도망가는 것을 보고만 있으리라 생각하셨습니까?”

“이 새끼가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가브리엘은 순식간에 날아와 애런의 앞에 서서 날개를 펴고 길을 가로막았다.

“처음부터 내 앞에 설 수 있으면서 도발을 한 이유는 뭐냐?”

“가로막으려면 땅으로 내려와야 하지 않습니까. 당신들과 똑같은 위치에 말입니다.”

“건방진 놈.”

가브리엘과의 싸움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애런은 쓸 수 있는 수는 모두 쓰기 위해서 이때까지 침식에 대한 걱정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보라색 마석이 박힌 검은 검을 꺼내 들었다.

[내 말이 또 도움이 되는군.]

“마검은 되도록 쓰고 싶지 않았는데… 저놈을 상대하는데 수단 방법 가릴 처지는 아니니까 말이다.”

피를 원해. 생명력을 내놔라. 성녀를 죽여라. 나에게 네 몸을 맡겨라.

마검이 애런의 정신을 갉아먹으며 몸을 차지하기 위해서 속삭였다. 과연 평범한 사람이 쓴다면 순식간에 몸을 빼앗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애런은 여유로웠다.

“야, 마왕. 너한테 고마워해야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뭐냐.]

“네 헛소리를 듣다 보니 마검이 하는 소리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다.”

[... 닥쳐라.]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