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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42화 (42/92)

〈 42화 〉 도망

* * *

“한시라도 빨리 전해야 해..!”

앙겔로크라티카로 다시 돌아온 이자벨라는 자는 척을 하다가 새벽에 방을 탈출해서 도로시가 있는 오두막을 향해 달렸다.

불사의 능력을 가브리엘에게 들켰다. 그는 해가 뜬다면 교황에게 도로시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도로시는 이제 평가를 받을 가치조차 없는 존재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 말은 곧 도로시의 죽음을 뜻하며, 이자벨라가 완전한 성녀가 되는 것을 뜻했다.

넓은 모노크롬을 가로지르고 있으니 숨이 차오르고 다리는 후들거리며 움직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달렸다. 어차피 이자벨라는 이런 것으로 죽지 않는다. 몸을 아무리 혹사해도 죽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면 단검을 꺼내서 허벅지를 찔렀다. 그러면 고통으로 눈이 번쩍 뜨여졌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흘러나온 피가 검게 굳는다. 어느새 이자벨라의 다리부터 발까지 피가 굳은 자국이 가득해졌지만, 그 위에 또 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몇 번이고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며, 나무가 우거진 숲을 지나왔다. 그리고 작은 오두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이자벨라는 잠깐 숨을 죽이고 오두막을 지켜봤다.

가브리엘에게 들었던 도로시를 평가하는 이단심문관, 흑기사를 경계해서였다. 사도라서 항상 바쁜 가브리엘과는 달리 그는 오로지 도로시를 평가하는 임무만을 맡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현재 저 오두막에는 흑기사와 도로시가 같이 있을 것이다. 무작정 들어가서 도로시에게 도망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이자벨라는 자신의 허벅지에서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든 단검을 바라봤다. 이 작은 단검으로 가브리엘에게 인정받은 실력자인 흑기사를 죽이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하지만 지금 이자벨라는 이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가브리엘에게 능력이 들켰다는 사실과 도로시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도를 해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오두막의 나무문을 밀어 열었다. 작은 단검을 두 손으로 쥐고 의자에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저 사람이 흑기사.’

흑발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하겠지만, 이자벨라가 오두막에 들어왔는데도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도박은 하지 말자.’

도로시만 깨우고 도망치는 것이다. 굳이 흑기사를 죽인다는 도박수를 두지 않아도 된다면 그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

이자벨라는 조용히 닫혀있는 방문을 열여로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으드득... 순식간에 다가온 남자의 손이 손잡이를 잡고 있는 팔을 잡았다. 인간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악력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들고 있던 단검을 남자를 향해 휘둘렀다.

카앙! 분명 얇은 옷을 입고 있었을 터인 남자의 가슴에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단검이 튕겨져 나왔다.

옷 안에 갑옷을 입고 있었나? 자고 있는 척을 하면서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인가? 이 모든 것이 함정이었나?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이자벨라의 몸은 머리가 시키지 않더라도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우득!

남자에게 잡혀있던 팔을 억지로 빼냈다. 그 덕에 뼈가 다 부서지면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지만, 혀를 깨물고 버텼다. 단검을 버리고 재빨리 손잡이를 돌리고 도로시가 있는 방으로 소리를 치며 들어갔다.

“도로시, 일어나!!”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던 도로시는 갑자기 난 큰 소리에 벌떡 일어났고, 아직 잠이 덜깬 몽롱한 표정으로 문 앞에 있는 이자벨라를 바라봤다.

“꿈인가?”

지금 이 시각에 언니가 내 방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도로시는 멀뚱멀뚱 눈만 깜빡이면서 배시시 웃었다. 꿈이라도 어둡고 추운 지하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자벨라의 얼굴을 본 것에 만족하면서.

“도망쳐!! 가브리엘이 내 능력에 대해서 알아챘다고!! 이제 그 사람은 네 편이 아니란 말이야!!”

울음 섞인 절박한 목소리가 도로시의 귀를 때렸다. 그제서야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팔을 부여잡고 쓰러진 이자벨라에게 다가갔다.

“오지 마! 빨리 창문으로 도망치라고.”

“왜, 왜 그래 언니?”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에 비친 이자벨라의 몸은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다. 팔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있으며, 다리는 굳은 피 때문에 평소보다 더 두꺼워 보였다.

“내 말 못 들었어? 내가 흑기사를 막고 있는 동안 도망치란 말이야…”

빛이 들지 않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던 지하실과는 달리 서로의 얼굴이 너무나도 잘 보이지만, 분명 기뻐해야 할 재회일 텐데… 왜 둘 다 울상을 짓고 있단 말인가.

이자벨라는 다가오는 도로시를 밀치며 빨리 도망치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도로시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다친 이자벨라를 치료하기 위해서 기도를 했다.

쨍그랑. 창문의 유리가 부서지며 흑기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이자벨라는 팔로 도로시를 끌어안으며 창문으로 들어온 흑기사를 노려봤다.

“이자벨라 님, 일단 진정해요.”

조금 전에는 어둡고 긴박한 상황이어서 얼굴을 보지 못했었는데, 달빛을 받아 잘 보이는 흑기사의 얼굴은 자신이 아는 자와 똑 닮아있었다.

“애런 님?”

“암살자인 줄 알아서 팔을 부러뜨렸는데 괜찮으세요?”

“아… 네, 그건 괜찮아요.”

부러진 건 이미 다 나았지만,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있는 팔을 다시 꺾으며 대답했다.

2년 전. 이자벨라는 애런에게 다시 앙겔로크라티카로 돌아와달라고 말을 했었다. 그리고 애런은 그 약속을 지켰던 것이었다. 흑기사가 애런이라는 사실에 조금 마음이 진정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애런 님, 갑작스럽게 부탁해서 죄송하지만 도로시를 데리고 도망쳐주세요.”

“네.”

애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새벽에 이자벨라가 오두막으로 혼자서 찾아온 이유가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유는 묻지 않았다.

“애, 애런 님?”

애런이 도로시를 한 팔로 들고 옆구리에 끼자 당황해하며 바둥바둥거렸다. 지금 어떤 상황인 것인지도 모르겠고, 이자벨라가 왜 다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걱정이 되었기에 조금이라도 설명을 듣고 싶었다.

“어딜 가려고 하십니까.”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 방 안에 있던 세 명은 모두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어떻게…”

분명 사도의 일을 하러 가브리엘이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 몰래 방을 빠져나왔는데, 그가 어떻게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인가. 이자벨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곳에는 제1사도 가브리엘 플라벨룸이 서 있었고,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애런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에 십자가가 생기며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지만, 땅바닥에 엎드린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가브리엘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역시 완전하지 않다고는 하나 성녀님이십니다. 개처럼 땅바닥에 엎드렸던 가이세릭 추기경과는 다르게 제 신성 마법에도 품위를 잃지 않으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가이세릭 추기경?”

“네, 감히 성녀님을 암살하려고 한 죄로 제가 천사님을 대신해 신벌을 내렸습니다.”

“내가 할 일이 하나 줄어서 다행이네.”

애런은 가브리엘이 말하고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그는 바늘구멍만한 틈도 보이지 않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과연 사지 멀쩡하게 도망칠 수 있을까? 아니, 죽지 않고 도망칠 수 있다면 다행일 정도의 실력 차이다. 현재의 애런으로서는 가브리엘에게서 전력으로 도망치더라도 붙잡혀 죽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애런이 도망칠 작은 틈을 만들기 위해서 조용히 기도를 하고 있는 이자벨라를 본 애런은 조금만 시간을 더 끌기로 했다.

“이 새벽에 여기는 왜 왔지?”

“교황과 얘기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끝났다?”

가브리엘은 검을 빼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성녀의 평가를 길게 끌고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저와 교황의 의견입니다.”

새하얀 검에 빛이 흘러가더니 검의 일부가 되어서 애런의 키와 비슷할 정도의 장검이 되었다. 계속해서 보고 있으면 눈이 멀것만 같이 빛나는 검이 지나간 공간에는 반짝임만이 남았다.

“그 말은?”

“성녀, 도로시 님을 죽이고 이자벨라 님이 완전한 성녀가 되도록 돕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도로시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래도 그거면 된 거예요. 제가 죽음으로써 언니가 유일한 성녀가 될 수만 있다면…”

“도로시, 헛소리하지 마.”

그 말에 이자벨라는 하던 기도를 끝마치고,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부릅뜨고 도로시를 쏘아보며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미안해. 이걸로 언니도 행복해질 수 있어.”

“개소리하지 마! 네가 죽었는데 어떻게 행복해진다는 거야!”

화아아아악­!! 오랫동안 기도를 하며 준비했던 이자벨라의 신성 마법이 발동되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방어막이 주위로 퍼져가며, 애런과 도로시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방어막은 작은 오두막을 아주 쉽게 밀어내며 대지마저도 밀어냈다. 드드드드­!! 가브리엘 역시도 검으로 방어막을 막으며 밀려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주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2장의 날개를 펼쳐 방어막이 닿지 않는 하늘에서 내려다봤다.

“아주 실망입니다. 누구에게도 지지받지 못하는 성녀를 감싸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가브리엘의 날이 선 말에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 도로시는 고개를 푹 숙여 땅을 바라봤다.

“도로시, 숙이지 마.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성녀? 저건 잘못된 말이야.”

도로시는 벙찐 표정으로 이자벨라를 바라보았다. 천사의 검 가브리엘 플라벨룸 마저 밀어내는 신성 마법을 사용하며, 몸에 찬란한 빛을 두르고 있는 신성한 모습은 그야말로 성녀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역시 자신이 죽어서 이자벨라가 완전한 성녀가 되는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말하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 이자벨라가 말했다.

“넌 천사에게 선택받았고, 성녀인 내가 지지하는 성녀고, 세상을 구했던 사람이 지키려는 사람이야. 그것 외에 다른 사람의 평가가 어떤지 중요해? 그러니 고개를 들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너를 성녀로 인정하게 만들어.”

도로시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륵 흘러서 땅에 떨어졌다. 언제나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이자벨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내 편은 없을 거라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자벨라가 두르고 있던 찬란한 빛을 내는 신성력이 애런에게 넘어와 신체를 강화시켰다. 도망치다가 무조건 죽는다는 생각이 운이 좋다면 살아서 도망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엄청난 힘을 애런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도로시를 잘 부탁드려요 애런 님.”

“알겠어요.”

마기로 검은 갑옷을 만들어내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언젠가 저도 구하러 와주세요.”

애런이 도약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이자벨라는 세상을 구하고 사람들을 구원해주는 성녀가 아닌,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겨우 참으며 도움을 요청하는 평범한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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