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재회
* * *
“오빠!!”
아일라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펄쩍 일어나서 애런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2년 전보다 키가 더 커지기는 했지만, 분명 자신이 아는 애런이었다. 애런은 아일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품속에서 아일라에게 깔려 죽으려는 여우를 꺼내 구해주었다.
아일라는 활짝 웃는 얼굴로 애런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제 모노크롬에 있어도 되는 거야?”
“응, 그래도 1년 내로 다시 떠나게 될지도 몰라.”
“어? 왜..?”
“그건 그렇게 될 것 같으면 나중에 설명해줄게.”
애런은 뒤에 있는 사람을 보라며 손짓하자 아일라는 고개만 빼꼼 내밀어서 뒤를 쳐다봤다. 은발에 푸른 눈, 분명 이자벨라와 똑같이 생겼으나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아일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녀님의 동생?”
“굳이 따지자면 저분도 성녀님이야.”
“그렇구나.”
오랜만에 애런을 봐서 기분이 좋았던 아일라는 성녀가 두 명인 것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저 빨리 2년 동안 못 본 애런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애런과 도로시의 팔을 잡고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어? 아일라 님, 잠깐.”
도로시는 아일라가 자신의 팔을 붙잡자 놀라며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용사가 된 아일라의 손은 지하실에 갇혀 지내던 도로시의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로시는 결국 아일라에게 질질 끌려가는 아이처럼 방으로 옮겨졌다.
….
“흐흥~ 며칠 전에 성녀님도 갑자기 모노크롬을 나가서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아?”
아일라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애런의 곁에 달라붙어서 콧노래를 부르며 물었다.
“아일라, 지금 요리하고 있으니까 도로시 님이랑 얘기 좀 하고 있을래?”
“알겠어!”
그제서야 팔짱을 끼고 붙어있던 아일라가 떨어져서 칼질을 할 수 있게 된 애런은 노련하게 양파를 썰었다. 애런과 아일라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도로시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언니에게 들었던대로 사이가 좋네요.”
“저도 성녀님한테… 아니, 이자벨라 님한테 도로시 님에 대해서 많이 들었어요.”
“그래요? 저에 관해 얘기할 건 별로 없었을 텐데.”
“엄청 많던데요? 대부분 어렸을 때 이야기였지만, 도로시 님을 안 만나보고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어요.”
어렸을 때라 하면 도로시와 이자벨라가 성녀로 선택받기 전이다. 그런 어렸을 적도 이자벨라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도로시는 가슴이 뭉클했다.
아일라와 도로시가 한창 얘기를 하고 있자, 애런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요리가 담긴 그릇을 들고 왔다. 매번 딱딱하게 식은 빵과 우유만 먹던 도로시는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얘가 이제 애도 아닌데 침을 흘려대네.”
그리고 그건 도로시뿐만이 아니었다. 애런의 요리로 입맛이 높아졌던 아일라는 모노크롬의 맛없는 요리를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먹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두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흘렸다. 애런은 아일라의 입술에 묻은 침을 닦아주고는 작은 고기가 담긴 그릇을 바닥에 놓았다.
“그 그릇은 왜 바닥에 둬?”
“아, 여우한테 밥 주려고.”
애런은 품속에 있던 여우를 꺼내 그릇 앞에 놓아주었다. 여우는 아일라를 빤히 쳐다보며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오빠가 기르는 여우야? 귀엽다.”
“기른다기보다는 쟤가 일방적으로 나한테 붙어 다녀.”
“와아…”
조용히 요리를 입에 넣었던 도로시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이때까지 먹었던 푸석푸석한 빵은 아무 맛도 나지 않았는데, 지금 먹는 요리들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맛이었다.
“맛있죠? 우리 오빠가 요리를 조금 잘해요.”
“네, 정말 맛있어요.”
아일라는 자신이 요리라도 한 듯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신도 요리를 한 입 집어넣더니 미소를 지었다.
“이게 요리지. 식당에서 주는 것들은 사람이 먹을만한 게 못 된다니까.”
“아일라, 나랑 이자벨라 님 없이 어떻게 지냈어?”
씹던 고기를 꿀꺽 삼키고 아일라는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내가 둘이 없어지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놀 사람이 없어서 심심하기도 했고, 나한테 마법 가르쳐주는 여자는 나한테 못되게 군다니까?”
“마법?”
“응, 이자벨라 님이 베네쿠스에서 부른 마탑주거든? 근데 내 반지 보더니 막 자기 반지라면서 뺏으려고 들고, 반지가 안 빠지니까 내 손가락 자르고 불태워서 반지만 가져가겠다고 하는 거 있지. 그리고 내가 끝까지 안 주니까 마법 가르치는 척하면서 괴롭힌다니까?”
“아.”
애런은 그 마탑주가 누구일지 이름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전생의 애런 시절 반지를 팔았던 카펠라일 것이다. 역시 어린 시절에 대마법사가 돼서 그런지 아직 잘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깜짝 놀랄 일도 있다?”
“아, 혹시 애런 님은 모르시나요?”
도로시의 질문에 아일라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 용사로 선택받았어. 놀랐지? 내가 책에서나 나오는 용사님이랑 똑같이 천사님한테 선택받았어!”
“...”
아일라의 말을 웃으며 듣고 있던 애런의 얼굴이 콱 구겨졌다. 갑자기 흘러나오는 살기에 아일라와 도로시는 당황하며, 뭔가 잘못했나 싶어서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 오빠? 왜 갑자기 인상을 쓰고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혀를 씹어서 그랬어.”
“뭐야. 내가 잘못한 줄 알고 놀랐잖아. 너무 놀라서 혀를 씹었구나?”
애런은 식탁 밑에서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서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화를 참았다. 천사에게 용사로 선택받았다는 말은 그 강한 힘만큼 책임감과 의무를 떠밀겠다는 뜻이다. 그 의무는 마왕 토벌, 사람들을 마족으로부터 지키는 것. 너무나도 힘든... 아주 힘든 일이었다.
‘씨발. 천사 이 개씹새끼들아. 왜 하필 아일라를…’
[뭐가 나쁜가? 용사가 된다면 비상식적인 강함을 가지게 되고,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면서 살게 될 텐데.]
애런의 부정적인 생각이 봉인되어있던 마왕을 깨웠다. 마왕은 애런이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물었다.
‘그만큼 짊어져야 할 것이 늘어나지. 그건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거라고. 전생에 용사였던 나니까 얼마나 힘든 일인 건지 알고 있다.’
[용사였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네 동생은 이미 용사로 선택받았는 것을.]
‘... 아일라가 짊어질 짐을 내가 대신 짊어지면 돼.’
[그 말은?]
애런은 평범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아일라가 용사가 되버린 이상 이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속으로는 천사에게 쌍욕을 하면서 다짐한다.
‘내가 용사가 된 아일라 대신 마왕을 쳐죽인다. 마족이 인간계로 쳐들어올 생각도 못 하게 철저하게, 잔혹하게 죽이고 아일라에게 가는 부담을 줄인다.’
[오? 용사도 아닌 네가 마왕을 죽이는 것이 가능한가? 솔직하게 말하지. 나는 7대 마왕 중 약한 편이다만… 지금 네 수준은 나에게도 닿지 않는다.]
‘안 닿는다면 닿게 하면 돼.’
꽉 깨문 혀에서 나온 피 맛이 입안에 퍼졌다. 마왕을 죽일 정도로 강해질 방법을 생각하느라 잠시 조용하게 있으니 아일라가 애런을 불렀다.
“오빠? 듣고 있어?”
“응? 아, 듣고 있었어.”
“그럼 이제 오빠 얘기도 좀 해줘. 2년 동안 뭐 하고 살았는데?”
“나는 별거 없는데.”
애런은 악마의 아이가 되고 나서 무법지대로 도망쳤던 일, 그곳에서 벨라에게 도로시의 암살 의뢰가 있는 것을 알아채고 금화 1000닢을 모아서 의뢰를 받지 않게 만든 것, 벨라의 의뢰로 오르도 왕국에 있는 말셀러스를 암살하러 갔다가 악마의 아이를 인공적으로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얘기했다.
“그리고 말셀러스 저택에 있던 것을 교황에게 바치고 라타파 이단심문소 소속의 흑기사가 되었어.”
“별거 없기는… 엄청나게 많은 일이 있었으면서.”
아일라와 도로시는 애런의 이야기를 입을 벌리고 들었다. 아일라는 습격했던 헬슨이 인공적으로 악마의 아이가 되었다는 것에, 도로시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다는 것과 애런의 몸에 마왕이 봉인되어있다는 것에 놀랐다.
“애런 님의 몸에 봉인된 마왕은 부활할 가능성은 없나요? 애런 님이니까 못 믿어서 묻는 것이 아니라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거니 기분 나쁘지 않게 들으셨으면 좋겠어요.”
“괜찮아요. 성녀님도 제 몸에 흐르는 마기에 대해서 눈치채지 못하셨잖아요? 제대로 억누르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보다 교만의 마왕 파이몬? 그 마왕은 진짜 믿을 수 있는 거야?”
아일라의 질문에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애런도 인간의 적이 아니고 세계의 섭리를 바꾸려는 것이 목표라는 파이몬을 믿을지 말지는 아직 고민을 하고 있었던 부분이었기에.
“그건 직접 만나게 된다면 알 수 있겠지.”
“진짜 만나러 갈 거야? 거짓말이면 어떡하려고… 위험해질 수도 있잖아.”
“괜찮아. 말셀러스의 저택에서 만났던 악마가 날 죽이지 않은 걸 보면 죽이지는 않을 거야. 애초에 걔 아비가 내 몸 안에 있으니 말이야.”
마족에게 그런 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를 감정이 없는 놈으로 아는 거냐. 괜히 피도 이어지지 않았는데 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그 모든 게 연기일 수도 있잖아.’
[허… 너와 같이 지낸 지 2년이 지났다만 이리도 나를 못 믿는단 말이냐.]
‘믿을 놈을 믿어야지.’
*
밤이 깊어지자 셋은 야경을 구경하기 위해서 기숙사의 옥상에 올라왔다. 세계 곳곳에서 온 아이들이 지내는 기숙사는 다른 건물에 비해 더 크고 더 높았기에, 시야를 가로막는 것 없이 모노크롬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모노크롬의 밤은 어둡지 않았다.
낮에도 밤에도 한 줌의 빛조차 없었던 지하실과는 너무나도 다른 세계였다. 모노크롬 곳곳에 있는 천사 모양의 동상에서는 환한 빛이 나오고, 늦게까지 자지 않고 깨어있는 아이들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서 사람이 사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시야를 막는 것은 없어서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푸른 은하수가 너무나도 잘 보였다. 도로시는 그 광경을 입을 벌리고 올려다보았다.
“도로시 님, 춥지는 않아요?”
“아일라 님 덕분에 따뜻해요.”
“네? 붙지 말라고 해서 안 붙었는데 어떻게 따뜻하지..?”
그리고 지하실과는 달리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도로시는 아직 타인과 신체 접촉을 하는 것에 두려움이 있어서 조금 떨어진 상태였지만, 그렇더라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과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역시 살고 싶네요.”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로시는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성인이 된 이자벨라와 같이 이런 광경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때까지 둘 다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리고 별똥별 하나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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