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재회
* * *
“흑기사요?”
이자벨라는 자신을 평가하고 있는 가브리엘을 보며 물었다.
“네, 라타파 이단심문소 소속의 이단심문관입니다. 현재 그분이 도로시 님의 평가를 맡고 있습니다.”
“도로시를… 그분은 괜찮으신 건가요?”
도로시의 능력은 위험하다. 그걸 알고 있기에 이자벨라는 걱정스레 말했다. 흑기사를 걱정해서가 아닌 도로시가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죄책감을 가지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해서 한 걱정이었다.
“만나보기만 했는데, 강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도로시 님의 능력에 소멸당할 일은 없으실 겁니다.”
“그런가요.”
이자벨라는 사람들에게 천사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불렀던 빛을 거둬들였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넋을 놓고 쳐다보았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오랫동안 하신 일이라 그러신지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을 잘하십니다.”
가브리엘의 말 한마디로 평가가 끝났다. 꽤 많은 사람이 천사를 믿게 하였으므로 오늘도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했다. 이자벨라는 살아있음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물론 가브리엘이 목을 벤다고 할지언정 자신은 죽지 않는다.
그 불사의 능력은 애런과 아일라를 제외하면 아무도 모른다. 그걸 들키고 싶지 않기에 이자벨라는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서 오늘도 성녀에 어울리도록 노력했다.
“가브리엘 님은… 여전히 도로시가 성녀가 되기를 바라시나요?”
“네, 그분의 능력은 분명 마왕을 죽일 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자벨라가 능력을 숨기는 이유. 그것은 바로 가브리엘이 도로시의 능력을 알고, 그녀가 성녀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도로시를 위험하게 생각하고 죽이자는 교황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이유는 천사의 제1사도인 가브리엘이 전적으로 도로시가 성녀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사의 능력을 들키게 된다면 분명 가브리엘은 생각을 바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이자벨라는 가브리엘과 하나의 약속을 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도로시와 자신을 살려둔다면, 성인이 될 때 이자벨라가 자살을 해서 도로시를 완전한 성녀로 만들겠다고.
인제 와서는 죽지도 못하는 이자벨라가 지킬 수도 없는 약속이지만, 그 약속 덕분에 19살까지 살아있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이러한 사실이 들켰을 때 뒷감당을 할 자신은 없다. 도망치고 싶지만, 부모님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교황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죽지 않는 내가 남아있어야지 모두 살 수 있을 거야.’
그런 부담감이 앙겔로크라티카로 돌아가는 이자벨라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
“와… 정말 이런 비싼 걸 받아도 되는 건가요?”
애런이 사준 액세서리가 든 상자를 소중하게 안고 도로시가 물어봤다.
“네, 전에 이자벨라 님이 금화 10닢을 주신 적이 있어서, 그 빚을 갚는 거로 생각하세요. 그것보다 도로시 님 것도 사도 괜찮았었는데요.”
“아뇨, 아뇨! 언니 것만 사도 비싸잖아요…! 그 이상으로 받을 수는 없어요.”
애런은 12년 동안 지하실에 갇혀 있었던 도로시를 위해서 모노크롬에 있는 귀족들을 위한 거리로 데리고 갔다.
이자벨라와 처음 이 거리에 왔을 때 애런의 반응처럼, 상품들의 가격을 보고 도로시는 입을 쩍 벌리며 이런 비싼 것들은 받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자신도 그때 이자벨라에게 금화 10닢을 받으면서 부담스러웠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요? 그런데 이미 사버렸어요.”
애런은 주머니에서 포장된 상자를 꺼내서 도로시에게 건네줬다. 도로시는 눈을 크게 뜨고 애런과 애런이 내민 상자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그리고 왜 자신에게 그 상자를 내미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어… 이건 아일라 님에게 줄 선물이 아니었나요?”
“아니요. 아일라한테 줄 건 주머니에 있고 이건 도로시 님한테 주려고 산 거예요.”
“어, 음… 저한테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애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으라는 듯 상자를 다시 내밀었다.
“네, 도로시 님한테 드리는 선물이라고요.”
“네? 저, 저는 애런 님한테 해드릴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이런 비싼 걸 받을 수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냥 받기 부담스러운 가격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애런은 도로시가 거절한다고 그 거절을 받아줄 생각은 없다. 전생의 자신처럼, 오히려 더 불행한 삶을 살아왔을 도로시가 조금이라도 사는 것을 즐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한다. 애런은 어쩌다보니 환생했지만, 도로시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애런은 손사래를 치고 있는 도로시의 손을 잡고 상자를 쥐여줬다.
“이거 끼고 저한테 보여주세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아…”
도로시는 입을 벌리고 자신의 손에 쥐어진 상자의 포장을 조심스레 뜯었다. 상자에는 은빛의 날개 모양의 귀고리가 들어있었다.
“제가 음… 이런 말을 성녀님한테 하기는 좀 그렇지만, 천사는 싫어해도 날개는 예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드는 거로 사봤는데 어떤가요?”
“예뻐요. 마음에 들어요.”
이자벨라를 제외하고 자신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진 도로시는 묘한 감정을 느끼며 귀고리를 귀에 갖다 댔다. 귀고리는 마법이 걸려있는지 귀에 닿지 않고 살짝 떨어진 상태에서 고정되었다.
애런은 도로시의 머리카락을 살짝 들어 귀고리가 걸린 모습을 보며 말했다.
“어울리네요.”
“가, 감사합니다.”
자신의 몸에 손을 대면서도 소멸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는지 무심하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애런의 손. 아직 도로시도 남과 닿는 것이 조심스러운데, 왜 정작 애런은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사라지는 쪽은 내가 아니라 당신일 텐데.
‘나보다 더 나를 믿는 것 같아…’
도로시가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도로시는 자신을 믿지 못했지만, 애런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보다 성녀님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물려야 하는 것은 조금 불편하네요.”
“그게 당연한 거에요. 제가 12년 동안 갇혀있던 것도 의도치 않더라도 다른 분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죠.”
애런이 걸어가면서 사람들을 물러나게 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길을 도로시가 뒤따라 걷는다. 그건 도로시의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닌, 사람들의 안전을 위하는 과정이었다.
그 사실이 애런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스로 능력을 제어하지 못할 것이라는 도로시에 대한 불신이 더욱더 그녀의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악순환이었다.
“성녀님, 모노크롬의 야경 보신 적 없으시죠?”
“네, 본 적 없어요.”
“그럼 오늘은 야경을 보기 전까지는 오두막으로 돌아가지 말죠.”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그동안 뭘 하나요?”
“성녀님 하고 싶은 거 해요. 성녀님이 저를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제가 성녀님을 따라다니는 입장이니까요.”
도로시는 잠깐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친구를 만들고 싶어요.”
*
아일라는 오늘도 방에 박혀서 마법 수련을 하고 있다. 2년 전 카펠라가 모노크롬에 방문하면서 주고 갔던 수정 구슬은 밝게 빛을 내며 베네쿠스의 마탑에 있는 카펠라의 모습을 비췄다. 바쁜 카펠라가 멀리서 아일라의 마법 수련을 돕기 위해 만든 아티팩트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아직 더 할 수 있는데요?”
“한가한 너랑 다르게 나는 바빠.”
카펠라의 말이 끝나자 수정 구슬에서 나오던 빛은 사라졌고, 카펠라의 모습도 흐려지며 없어졌다.
“나는 한가하고 싶어서 한가한 줄 아나…”
아일라는 그대로 침대에 누우며 몸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으으응… 심심해.”
성녀인 이자벨라는 무슨 평가를 받아야 한다며 모노크롬을 나갔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는데도 혼자 특별취급 받으며 나간 것이 아일라는 부러웠다. 애런에 이어 이자벨라도 곁에서 사라지자 아일라는 혼자 시간을 보내며, 지루한 삶을 살고 있었다.
“2년이 지났는데, 오빠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애런이 지냈던 침대에 얼굴을 푹 박는다. 2년이나 지나며 이미 몇 번이고 세탁한 이불에서는 이제 애런의 냄새는 나지 않고, 향긋한 세제 향기밖에 나지 않았다.
아일라는 애런이 돌아오기 전까지 이불을 세탁할 생각이 없었지만, 가끔 방에 놀러 왔던 이자벨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깨끗하게 살라며 혼을 내서 어쩔 수 없이 세탁을 했다.
“성녀님도 없고 오빠도 없으니까 너무 심심하다…”
아일라는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하나 밖에 없는 일과인 마법 수련이 끝이 났으므로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산책이라도 하러 나가기 위해서였다.
….
“하아…”
기분 전환을 하러 왔던 아일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짜증이 몰려왔다. 눈앞에 있는 회색 털을 두른 돼지, 헤드릭이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 상쾌해질 줄 알았는데, 나온 지 30분도 안 돼서 기분을 더 나쁘게 할 줄은 몰랐다.
“얼른 무릎을 꿇어라!”
헤드릭은 아일라의 곁에 이자벨라가 사라지자마자 위협하는 강도를 높여왔다. 물론 용사인 아일라에게 무력으로 이길 수는 없으니, 무고한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며 얘가 다치는 꼴을 보기 싫으면 네가 알아서 기어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아주 유효했다.
“야, 너는 왕자라는 놈이 권력을 그렇게 사용하냐?”
“시끄럽다. 이 녀석의 가족이 사는 마을이 오르도 왕국에 불타 사라지는 것을 보기 싫다면 얼른 숙여라!”
“아아… 아일라 님… 도와주세요.”
헤드릭에게 머리카락을 붙잡힌 아직 모노크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소녀는 울면서 아일라에게 부탁했다. 아일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건드리기만 해봐. 내가 네 목 베어버릴 테니까.”
“윽..!”
아일라의 말에 움찔거리면서도 헤드릭은 물러서지 않았다. 겁먹은 것을 숨기기 위해서 더 목소리를 키워서 말했다.
“내 목을? 내 아버지가 누군지는 알고 그 말을 하는 거냐?”
“네 아버지 알고 있다니까… 그래도 하나도 겁 안 나는데? 내가 그런 늙은 사자 하나 못 이길 것 같아?”
“으으… 닥쳐라! 네년 가족이 죽기 바라지 않는다면 빨리 저년이 무릎을 꿇도록 만들어라!”
짝! 헤드릭의 두꺼운 손이 소녀의 뺨을 후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잡고 소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일라에게 말한다.
“아일라 님… 부탁드릴게요… 제 가족이 죽지 않도록 해주세요…”
“...”
소녀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마음이 약해진 아일라는 입술을 꽉 깨물며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알겠어. 내가 꿇으면 되잖아.”
저런 돼지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정말 헤드릭의 한 마디면 소녀가 사는 작은 마을 하나 정도는 쉽게 불타 사라질 것이었다. 자신 때문에 휘말린 죄 없는 소녀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천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강한 힘에는 책임감이 있어야 하며 약자를 보살필 의무가 있다.”
아일라와 헤드릭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무늬가 섞인 옷, 어깨 부분에 있는 빨간 십자가, 팔까지 올라오는 금속 건틀릿.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이단심문관은 헤드릭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힘은 천사님이 주신 것이오, 그러한데 천사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그에 대한 배신이고 그것은 이단임을 뜻한다.”
“뭐? 우리 아버지가 왕이 된 것은 천사님이 준 것이 아니라…”
“리처드 폰 오르도. 그를 왕으로 만든 힘은 분명 천사님이 주신 것이 자명하다.”
이단심문관의 검 끝이 헤드릭의 목을 향했다. 헤드릭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져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를 따르던 부하들은 이단심문관을 보고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며 용서를 구하고 이단심문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들이 다시 괴롭힌다면 나에게 말하도록 하라.”
“감사합니다! 아일라 님 죄송합니다…”
소녀는 이단심문관과 아일라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눈물을 닦으며 걸어갔다.
‘이 목소리…’
얼굴을 가렸지만 잊을 수 없는 목소리는 아일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했다.
“오빠!”
이단심문관은 얼굴을 가렸던 천을 치우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아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