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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34화 (34/92)

〈 34화 〉 도로시 마이어

* * *

도로시는 활짝 웃으면서도 애런과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앉아서 얘기를 했다. 가까이 있으면 굳이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될 텐데, 제 목을 혹사하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이유는 자신의 능력이 애런에게 위해를 가할까 봐 걱정해서 그러는 것임을 애런은 알아차렸다.

“성녀님, 이렇게 떨어져서 앉을 필요가 있나요?”

도로시는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안 돼요..! 제 몸에 닿으면 애런 님이 사라질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안 닿도록 거리를 두고 있는 편이 안전해요.”

“그래도 불편하시잖아요? 떨어져서 얘기하느라 목도 쉬어가시는데.”

“제 목은 괜찮으니까 거기 계셔주세요.”

자신은 괜찮다고 하지만, 듣고 있는 애런이 이 상황이 불편했기에 도로시의 근처로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섰다.

“어, 어? 오지 마세요. 오지 말라니까요? 오지 마시라구요..!”

애런이 한 발자국 다가가면 도로시가 뒷걸음질을 쳐서 두 발자국 멀어졌다. 뒤로 물러서던 도로시는 뒤에 있던 의자를 보지 못하고 발이 걸려서 균형을 잃었다.

“아앗..!”

무방비하게 바닥에 쓰러지려는 순간 애런이 다가와서 몸을 팔로 받쳐주었다. 자신의 몸에 애런의 팔이 닿자 화들짝 놀란 도로시는 빠르게 균형을 잡고 다시 거리를 벌렸다. 그러면서도 걱정을 하는 표정으로 애런을 쳐다봤다.

“괜찮아요? 몸이 이상하지는 않아요? 막 어지럽다거나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아요?”

자신의 능력 때문에 애런이 사라지면 어떡하나 싶어서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애런의 몸이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봐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요?”

그러면서 신체 접촉이 있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도로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이 닿는 순간 한 번 몸을 떨면서 겁을 먹었지만, 이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손을 꼼지락거렸다.

“진짜 괜찮아요?”

“성녀님이 보는 대로 아무 문제도 없어요.”

“와아…”

12년 만에 느껴보는 다른 사람의 따뜻한 체온. 이자벨라도 지하실에 자주 찾아오기는 했지만, 도로시가 무방비한 신체가 닿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신성력을 두르지 않은 이자벨라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신성력을 두른 이자벨라의 손도 따뜻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신성력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이었다. 그래서 오로지 사람의 체온만을 느끼는 것은 지하실에 갇힌 뒤로 처음이었다.

고작 손을 잡고 있을 뿐인데도 도로시는 감정이 벅차올랐다. 이런 사소한 일에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자신이 비참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남들처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기쁘기도 했다. 도로시는 입을 벌린 채 애런의 손을 계속해서 만졌다.

“제 손이랑은 다르게 크네요..! 거칠기도 하구요. 거기다 딱딱하네요!”

“검을 쓰다 보니 손에 굳은살이 생긴 모양이네요.”

“검!”

도로시는 눈을 반짝이며 애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검 휘두르는 모습이 보고 싶은데, 보여주실 수 있나요?”

“당연하죠.”

“와아! 사실 지하실에 갇혀있으면서 용사님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걸 읽고 실제로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싶었어요..!”

“잘됐네요.”

마침 전생 용사가 여기 있으니, 운 좋게도 책에서 봤던 것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고 도로시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전생에 용사였다고 아일라나 이자벨라에게 말하고 다녔었는데, 그들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시선을 생각해보면 도로시도 믿어줄 것 같지는 않아서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

성녀로서 어울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애런이 보았던 전 성녀 같은 경우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직접 나서서 마족을 멸하며, 사람들을 치료하며, 마음이 무너져가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것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이자벨라가 했던 것들을 떠올려보자면, 사람들이 천사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기적을 보여주는 것이 있다. 그리고 평화로운 세계를 위해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

그렇다면 도로시가 성녀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이 있을까. 교황과 가브리엘이 말했던 성녀가 되기에 적합한지 평가에 대한 항목은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것이 옳다면 그것을 교황에게 보고해달라. 그것이 가브리엘이 전한 전부였다.

만약 보고가 하루라도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건 성녀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죽이겠다고 했다. 미친놈들. 애런은 속으로 욕을 하며 오늘 교황에게 보고할 것을 작성하기 위해서 도로시와 오두막을 나섰다.

원래라면 20세가 되기 이전에는 10대가 모노크롬 밖으로 나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지만, 단 한 명만이 존재해야 하는 성녀를 결정하기 위해서 특별히 밖에서 활동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모노크롬내에서만 활동하는 것으로는 성녀에 어울리는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결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애런은 도로시를 모노크롬 밖으로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도로시가 성녀로서 어울리는 일을 하기에는 이곳이 적합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모노크롬에 있을 아일라와 이자벨라를 우연히 만나기를 바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애런은 모노크롬의 건물과 아이들을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 있는 도로시를 불렀다.

“성녀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은 몸에 닿은 것을 소멸시킨다. 이렇게 알고 있는데 맞나요?”

“네, 맞아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제가 소멸시키고자 하면 소멸시킬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마나나 강한 신성력을 몸에 둘러야지 방어가 가능하고요.”

“네.”

역시 성녀에 어울리지 않는 공격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애런이 알거나 이야기를 들어서 아는 성녀는 여럿 있지만, 이런 능력은 처음이었다. 천사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능력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녀에 걸맞은 일을 할 수는 있었다.

“좋아요. 성녀님이 저랑 하실 일은 마왕 부활 저지에요.”

악마의 아이를 소멸 시켜 마왕이 부활하지 않도록 하는 것. 성녀에게 아주 어울리는 일이라고 애런은 생각했다.

“마왕 부활 저지요..? 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도로시는 자신 없다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저 소멸하기를 바라며 손만 갖다 대셔도 되는 간단한 일이에요.”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건가요?”

“물론이죠. 마왕의 부활만 막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녀다운 일을 하는 거예요.”

사실 모노크롬에 있는 성기사들도 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도로시가 얼마나 유능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이 정도면 살려두는 것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도록 애런은 도로시의 능력을 높게 평가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만약 애런이 도로시를 데리고 도망치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살아남을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오셨습니까.”

악마의 아이를 체육관에 가두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성기사가 애런과 도로시를 보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모노크롬에 있는 성기사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왜인지 전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아무도 못 알아보는 것은 다행이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조금 궁금해지기는 했다.

“열어주세요.”

“네.”

철컹. 자물쇠가 열리고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도로시는 긴장한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들어갈까요?”

“네…”

체육관 안에는 보랏빛 마기가 겉돌고 있으며, 악마의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숨어있는 모양이었는데, 그걸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마기를 체육관 내부에 뿌려둔 것 같았다.

“생각보다 지능이 높은 녀석이네요. 성녀님, 습격당하지 않도록 능력을 발동하고 계세요.”

“네, 네.”

애런이 옆에 있어서 갑자기 도로시가 공격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말해놓았다. 체육관의 문이 다시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애런은 조용하게 말했다.

“성녀님, 지금부터 보시는 것은 비밀로 해주세요.”

“뭐를 하시려고요?”

“이런 거요.”

도로시의 질문에 답하듯 애런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체육관에 떠돌아다니던 마기들이 소용돌이를 치더니, 동그랗게 뭉쳐져서 애런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도로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괘, 괜찮은 거에요? 인간이 마기를 흡수하면 어떻게 되시는지 아실 텐데… 혹시 제가 신성 마법으로 마기를 정화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이러신 건가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하며 마기를 흡수하는 애런을 말리려는 듯 잠깐 머뭇거리더니 팔을 잡았다. 애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주었고, 남은 마기를 마저 흡수했다.

“제가 조금 특별해서요.”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요…”

체육관에 있던 마기를 모두 흡수하고 나니 2층에 있는 계단 사이에서 마기가 새롭게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도로시도 그걸 느꼈는지 고개를 휙 돌려서 2층을 쳐다봤다.

‘마기에 대한 반응도 괜찮네.’

애런은 오늘 보고 내용에 쓸 것이 더 생겼다고 생각하며 검을 빼 들었다. 마족이 가진 마기에 대한 좋은 반응은 성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교황이 조금이라도 도로시를 죽이기 아깝다고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천천히 나무로 된 계단을 올랐다. 마기에 침식된 계단은 애런이 걸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히, 히이익..!”

그리고 2층에 올라오자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는 악마의 아이가 보였다. 애런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성은 애런을 보더니, 몸을 심하게 떨었다.

“오, 오지 마. 이 괴물놈아!”

“누가 누구보고 괴물이라는 건지.”

아마 악마의 아이가 되면서 애런의 몸에 봉인된 마왕의 기운을 느끼고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애런은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악마의 아이에게 말한다.

“안 아프게 정화해줄 테니까 걱정 마라.”

“허, 헛소리를!! 나는 죽을 생각 따윈 없어!”

악마의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로시를 향해 재빨리 도약했다. 애런은 그가 뛰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것도 이유였지만, 도로시의 반응을 보기 위함도 있었다.

“앗..!”

도로시는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악마의 아이를 보고 몸을 떨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두려움에 의한 것이었다. 다만, 자신이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악마의 아이를 죽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역시 바로는 무리겠지.”

애런은 몸에 마기를 두르고 악마의 아이보다 빠르게 도로시의 앞에 섰다. 자신을 향해 내뻗은 주먹을 한 손으로 잡아 땅으로 꽂았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로 밟은 뒤 도로시를 쳐다봤다.

보이는 것은 없지만, 아마 능력을 해제한 것 같았다. 도로시는 악마의 아이를 보고서 소멸시킬 생각을 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성녀님.”

무덤덤하게 도로시를 불렀다. 질책할 생각은 없었다. 악마의 아이가 되었다고는 하나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애런도 이자벨라가 악마의 아이를 태워죽인다고 했을 때 조금이나마 거부감을 가졌기 때문에 그 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도로시는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당장 교황에게 보여줄 결과를 내지 않으면 내일이라도 도로시는 죽을 수도 있었다.

“네…”

“그 머뭇거림 저는 이해해요. 하지만 잘 들으세요.”

도로시가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도록.

“악마의 아이는 마기에 정신을 침식당해요. 그렇게 되면 언젠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악의에 집어 삼켜져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악의는 지금처럼 타인에게 향하게 되고 그것은 이 자의 소중한 자에게 향할 수도 있어요.”

“...”

도로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정말 슬픈 일이겠지요. 거기다가 마왕이 부활하게 된다면 더욱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될 테니 그때가 되면 이 사람만의 슬픔이 아니게 될 겁니다.”

“네, 그렇겠네요…”

“그러니 성녀님이 이 악마의 아이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죽이지 않도록, 다른 사람이 슬픔을 겪지 않도록 이 자를 말려줘야 해요.”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요.”

도로시는 손을 감싼 채로 애런의 곁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고통 없이 보내드릴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뿐이라서 죄송해요.”

악마의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러자 도로시의 손이 닿은 어깨부터 빛나는 입자가 되어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목에 걸린 펙토랄레를 쥐고 소멸한 악마의 아이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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